손주 면회에 신이 난 아버지의 하루

아버지의 지극한 손자 사랑... 피자까지 먹인 뒤 만족하는 아버지

등록 2006.11.13 14:47수정 2006.11.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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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손주도 보고 즐거운 가을 소풍의 추억도 남기고
보고 싶은 손주도 보고 즐거운 가을 소풍의 추억도 남기고김혜원

"늙으면 추운 날 거동이 힘들어. 입동이 낼모렌데 면회 안 가냐. 어미가 돼 가지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군대간 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으냐? 춥기 전에 한번 가자."


자대로 배치를 받고 난 후 면회가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는 손주가 보고 싶으신지 춥기 전에 한번 다녀오자며 며칠 전부터 저를 조르십니다. 삼복 중에 입대를 하게 된 손주를 따라 먼 진주까지 다녀오신 아버지는 손주가 입대하는 그날도 엄마인 저만큼이나 손주와 이별을 슬퍼하셨답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이사준비니, 집수리니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던 면회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졌습니다. 날씨가 더 추워져 면회를 가지 못하게 되면 아버지는 다시 날씨가 따뜻해지는 내년 봄까지 손주의 면회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쩌면 내년 봄에는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셔서 손주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 이상 면회를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하얗게 세어버린 아버지의 흰머리처럼 아버지 머리 속에도 작은 지우개가 생겼습니다. 지우개는 매일 매일 조금씩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고 있습니다. 물론 지연을 늦추는 치료를 하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머릿속도 아버지의 흰머리처럼 듬성듬성 검은머리를 남겨두고 하얗게 지워져 버릴 것입니다.

아버지가 조금씩 기억들이 사라지는 병에 걸리셨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기억이 남아 있고 추억을 되짚을 수 있는 동안 더 많은 추억을 남겨드리기로 했습니다. 기억이 다 지워져도 가족들의 사랑과 따뜻함은 의식 어디엔가 남아서 당신을 외롭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지요.

손주 면회에 신이 난 아버지 "쫄병 손주 어서 좀 나오라고 해줘요"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PBS기자 바네사와 함께 식사를 하시는 아버지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PBS기자 바네사와 함께 식사를 하시는 아버지김혜원

손주 면회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신이 났습니다.

"공군 장정이니 많이 준비해. 키를 봐라 얼마나 잘 먹게 생겼냐. 짜식 잘 있겠지? 할아버지 보면 좋아할까? 아마 깜짝 놀랄 거야. 하하하."


면회를 가는 날은 마침 PBS라는 미국 공영 방송사의 취재도 있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한다는 PBS의 취재 요청에 따라 그들 역시 우리 가족과 함께 면회를 하러 가게 된 것이지요. 느닷없이 방송사 카메라와 마주하게 된 아버지는 싫지 않으신 듯 익숙하게 인사하십니다.

"헬로우~ 굿모닝. 코쟁이들이 내 말 알아들었을까? 저 놈들 좀 봐라. 남의 집 거실로 신발을 신고 저벅저벅 들어온다. 아이고 코쟁이 놈들이란. 이봐 신발은 벗고 들어와야지. 하하하."

손주를 면회 가는 것도 즐겁고 딸을 취재하러 나온 외국방송사 기자들을 보는 것도 즐거우신 아버지는 한껏 기분이 좋아지셔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으십니다.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출발한 우리는 토요일의 지독한 고속도로 정체를 뚫고 3시간만에 원주에 도착했습니다. 부대 앞 면회소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저보다 먼저 가족대표로 면회를 신청하십니다.

"우리 손주 면회 왔어요. 이용석이라고 쫄병인데… 할아버지가 왔으니 얼른 좀 나오라고 해줘요."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면회소 바깥에 나와 서성거리며 손주를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손을 높이 흔드십니다. 멀리 달려오는 손주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어이~ 일등병. 할아버지 왔다. 우리 일등병 손주 만나기가 왜 이렇게 어렵냐."
"필승!!"

아들은 함지박만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거수경례로 인사를 합니다. 손주의 경례에 멋지게 거수경례로 답을 하시는 아버지도 기뻐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십니다.

"이 녀석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따뜻한 날씨 덕에 즐거운 면회가 되었답니다.
따뜻한 날씨 덕에 즐거운 면회가 되었답니다.김혜원

새벽부터 음식준비를 하느라 분주를 떨고 세시간여를 달려 군인 손주, 군인 아들의 면회를 온 우리를 보는 외국인 기자의 시선이 신기함으로 일렁거립니다.

"우리 손주 배고팠지? 차가 막혀서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어. 얼른 꺼내라. 점심 먹자. 물 먼저 먹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아버지는 손주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즐거우신지 손주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아버지도 같이 드세요. 시장하실 텐데…."
"난 괜찮아. 용석이부터 먹고… 이 녀석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손사래를 치시는 아버지에게 억지로 수저를 집어드리니 음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손주와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십니다.

"유아 굿 마더. 유어 패런츠아 굿 그랜드패런츠 투~."

점심을 준비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외국방송사 기자가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아들과 손주를 면회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풍경이지만 저들에게는 남다른 감동을 주는 모양입니다.

"함께 먹어야지. 여기 앉아서 먹어요. 한국음식 잘 먹나? 많이 먹어요. 밖에 있는 코쟁이들 점심은 어떻게 하나? 여기 와서 밥 먹으라고 해라. 함께 왔으니 밥도 같이 먹어야지."

우리와 동행한 기자는 물론 부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기자들의 점심을 챙겨야 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삶은 그렇게 나누어주는 삶이셨습니다. 밥 한 그릇에 수저 몇 개만 꼽으면 먹는다는 아버지의 인심 때문에 어릴 적에는 우리 가족만 모여 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던 때도 있었을 정도랍니다.

아들은 가져간 밥과 전골, 생선회, 과일까지 모두 먹고 배가 부르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뭔가 부족해 보이셨는지 면회소 벽에 써 있는 전화번호로 통닭이나 피자를 시켜 보라고 하십니다. 군대가기 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니 먹고 싶었을 거라는 겁니다.

꿈속에서도 손주를 만나고 계신지...

군 부대 안에서 시켜 먹는 피자맛도 일품이더군요.
군 부대 안에서 시켜 먹는 피자맛도 일품이더군요.김혜원

배가 부르다면서도 꾸역꾸역 피자를 먹는 손주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만족함이 떠오릅니다.

"그래 그래 그 정도는 먹어야지. 이제 됐다. 할아버지가 한동안은 못 올 거야. 휴가 나오면 그때 보자. 그때까지 건강하고 씩씩하게! 알았지? 장하다. 우리 손주."

"할아버지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야 제가 결혼해서 낳은 손주도 보셔야 되잖아요. 할아버지 손주 좋아하시죠. 그쵸?"

"이눔아, 내가 그때꺼정 어떻게 사냐? 색시감은 있어? 그 녀석 하하하."

면회를 하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새벽부터 서둘러 긴 시간 다녔으니 고단하셨던 모양이지요. 하지만 코를 골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계십니다. 아마도 방금 이별하고 온 손주를 꿈 속에서 또 다시 만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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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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