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 공순이라고? 명품 의상 제작자셔!"

[가상일기] 패션쇼 준비하는 창신동 '수다공방' 1기생 천원순씨의 하루

등록 2006.11.29 10:17수정 2006.11.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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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 숙련공들이 모델로 선다. 20~30년 경력의 여성 봉제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무대에 선다. 무대는 다음달 1일 열리는 패션쇼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를 달다!'. 이 패션쇼를 여는 수다공방은 전순옥(전태일 열사 여동생)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가 동대문 지역 영세자영업자에게 옷제작의 이론과 실무를 교육하기 위해 지난 6월 문을 연 교육센터다. <오마이뉴스>는 28일 이 곳의 1기 졸업생인 천원순(55)씨를 만났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가상 일기 형식의 기사다. <편집자주>
a '수다공방' 1기 졸업생 천원순(55)씨. 천씨는 다음달 1일 열리는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달다'라는 제목의 패션쇼에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모델로 선다.

'수다공방' 1기 졸업생 천원순(55)씨. 천씨는 다음달 1일 열리는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달다'라는 제목의 패션쇼에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모델로 선다. ⓒ 오마이뉴스 이민정


오전 10시 수다공방(서울 종로구 창신2동)에 도착했다. 공방 막내 (곽)미순이(47)와 한 조를 이뤄 상의 하나를 마쳐야 한다. 다음달 1일 열릴 패션쇼에 당장 올려야 할 옷이라 마음이 급하다. 내가 입을 옷은 이미 끝냈지만, 유명 인사들 입을 옷이 아직 남았다. 바쁜 공장일은 뒷전이 됐다.

아무리 바쁜들 어찌 미싱 바늘 허리에 실 매겠는가. 열아홉살에 시작한 봉제일인지라 옷 한 벌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지금 만드는 옷은 지난 30여년간 쉴 새없이 찍어낸 옷들과는 수준부터 다르다. 영국 '버버리' 뺨치고 이태리 '구찌'도 울고갈 '창신동표' 명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마음가짐도 다르다.

내가 누구냐. 1기 졸업생 중에서도 '똑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천원순 아니냐. 지난 6월 시작된 1기들의 수업은 이미 지난 7월 말 끝났지만 학구열 높은 미순이와 손발을 맞추자니 신이 난다. 패션쇼 무대에 서기 위해 어제는 공방 동생들과 그 비싼 얼굴 마사지도 받았다.

창신동표 명품, 버버리 뺨치고 구찌도 울고간다

맘은 급한데 또 기자가 찾아왔다. 패션쇼 홍보도 좋지만 조금은 지겹다. 취재는 이제 됐으니, 패션쇼 이후 결론이 좋기를 바랄 뿐이다.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날뿐만 아니라 공방에 딸 나이대의 젊은이들이 봉제 기술을 배우러 많이 와줬으면 좋겠다. 값싼 인건비 때문에 봉제 일이 중국으로 나가는 탓에 가뜩이나 동대문에 일도 없는데,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봉제 기술이 동생들 나이대에서 끊길 지경이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려고 머리를 싸매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유망한 봉제 기술이 있는데'라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공순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봉제공장을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이 더욱 뜸해졌다. 어느 고등학교에는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라는 급훈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나를 공순이라 깔보는가. 누구 덕에 우리 나라 경제가 여기까지 왔나. 가발·의류 만들어 파느라 햇빛도 못 보고 하루 14~15시간 꼬박 일한 이 언니들의 공이 아니던가. 이제는 공순이마저 골동품 취급을 당하니, 패션쇼 무대에서 당당하게 외치리라. '우리는 명품을 만드는 명품 의상 제작자'라고.


대학가서 미팅? 공장가서 미싱!

a 청소년뉴스 사이트 바이러스(www.1318virus.net)에 실린 한 학교 학급급훈.

청소년뉴스 사이트 바이러스(www.1318virus.net)에 실린 한 학교 학급급훈. ⓒ 인터넷뉴스 바이러스

열아홉에 아랫집 사는 금순이를 따라 동대문 평화시장 2층에서 일을 시작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았던 나는 남의 집 식모살이로 가느니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봉제 일을 시작했다.

붙잡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공방 같은 교육기관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미싱 봉제사가 책상 의자에 앉아 패달을 밟으며 미싱을 돌리면 시다(보조)였던 나는 땅바닥에 앉아 실밥을 뜯거나 원단을 잘랐다.

그러니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전부다. 세상이 좋아져 요즘 미싱에는 모터가 달렸지만, 예전에는 모두 미싱 앞에 앉아 달리기를 하듯 발을 빨리 굴려야 했다.

일이 끝나면 또 달려야 했다. 일이 항상 통행금지(자정) 5~10분 전에 끝났기 때문에 당시 출퇴근 버스였던 '기동차'를 타고 얼른 집 근처 골목길로 들어서야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전 7시에 출근해 꼬박 하루종일 일해 번 돈은 하루에 700원. 그땐 그 돈이 여자 수입으로는 꽤 짭짤한 편이었다.

공방의 동생들과 나는 기계 부럽지 않는 정확함과 섬세함을 갖고 있다. 딸뻘 되는 기자가 옆에 딱 붙어서 '스와리가 뭐냐' '데끼가 뭐냐'는 질문을 쏟아내도 내 손에 쥔 원단 위의 연필선과 미싱이 지나간 자리가 정확히 일치한다.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옷은 금세 울어버린다.

그래도 세상사는 게 미싱일처럼 몸에 쉽게 배였겠나. 남편과 통일상가에서 직접 옷가게를 열어 돈도 꽤 모았지만, 남편이 암에 걸려 모은 돈을 까먹었다. 93년 남편이 죽고 난 뒤 남은 것은 딸 셋과 봉제 기술뿐이었다. 20여년간 미싱을 돌리며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힘들다'라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해봤다.

미싱 위에서 30년 달렸지만, 아직도 '잘 살아보세'

a 천원순씨는 공방 막내 곽미순(47·오른쪽)씨와 조를 이뤄 축하 게스트가 입을 옷을 만들고 있었다.

천원순씨는 공방 막내 곽미순(47·오른쪽)씨와 조를 이뤄 축하 게스트가 입을 옷을 만들고 있었다. ⓒ 오마인뉴스 이민정

지금은 딸들도 자리를 잡고, 미싱 하나 있지만 공장도 갖고 있다. 이제는 '봉제장인'으로서 후진 양성에 힘써야 할 때다. 생활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창신동 3천여 하청봉제공장의 1만3천명의 봉제사 몫이기도 하다.

주5일제다 뭐다, 세상 좋아졌다고 하지만 동대문 의류시장은 세월을 비껴갔다. 아직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미싱 앞을 떠나지 못하지만, 그마저도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일이 뚝 끊겼다.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미싱 위에서 달렸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살아보세'를 외쳐야 한다.

햇빛도 못 보고 일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동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일했고 가족을 위해 봉사했지만, 돌아온 것은 '공순이'라는 비하와 업주들의 착취였다. 국가도 '경제성장'이라는 간판 아래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봉제사들에 대한 국가 정책이 절실했다. 지금이라도 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활동가로 변신하고 싶다.

어쩌면 정책보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일지 모른다. '공순이'라는 손가락질이 아닌 경제 성장의 역군으로, 당당한 직업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다. 그러면 뜸해진 젊은이들 발길도 이어질 지 모른다.

다이어트? 우린 그런 거 필요없어

옷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기자를 어서 돌려보내기 위해서라도 작업 중인 옷을 끝내야 하는데, 자꾸만 오점이 보인다. 몇십년 한 일이지만, 일생에서 가장 잘 만들고 싶은 옷이기 때문에 쉽게 넘길 수가 없다.

기자는 '명색이 모델인데 다이어트는 안 하느냐'고 묻는다. 웬걸? 요즘 깡마른 모델 안 쓰는 게 대세인 걸 모르시나. 그리고 우리는 당당한 직업 여성이며, 남이 만든 옷이 아닌 내가 직접 만든 옷으로 무대에 서는 특별한 모델이다.

그나저나 어제 쓰고 남은 마사지 크림은 언제 또 발라야 하나.

이소선·장하진·강금실 패션모델 된다
다음달 1일 서울패션아트홀서 70년대 봉제노동자 패션쇼 개최

참여성노동복지터(대표 전순옥)는 다음달 1일 오후 6시 서울패션아트홀(중구 신당동)에서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달다'라는 제목의 패션쇼를 연다.

이 행사에는 70~80년대 동대문 의류시장에서 봉제사로 일한 여성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모델로 나서 눈길을 끈다.

주최 측은 "과거에는 '공순이'로, 지금은 '제품쟁이'로, 섬유산업의 생산기반을 이루는 여성 봉제 노동자들의 노고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없었다"며 "중년이 된 노동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패션쇼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날 행사는 정용실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이상수 노동부 장관,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 강금실 여성인권대사, 심상정·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 등 사회 각계 인사 20여명이 직접 모델로 참여한다. 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여동생 전순옥 대표도 무대에 선다.

패션쇼뿐만 아니라 여성 봉제 노동자들의 삶과 역사를 조명한 영상다큐, 여성학자 오한숙희씨와 패션 토크쇼, 가수 이은미·전인권·정태춘·박은옥 등의 축하무대도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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