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꽃병에 적힌 소중한 글... '우리 딸'

이삿짐 속에서 22년 전 아버지가 주신 글을 찾다

등록 2006.12.04 17:38수정 2006.12.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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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네.”
“그러니까 공연히 물건 욕심 내지 말라고 했잖아. 이거봐. 몇 년 동안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물건도 몇 박스인지 몰라.”


이사를 준비하다 보니 베란다며 창고에서 묵은 짐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결혼 전에 사용하던 테니스라켓부터 누군가에게서 결혼선물로 받았을 낡은 토스터까지 버리긴 아깝지만 거의 10년 이상 사용 하지 않던 물건들입니다.

못생기고 허름한 꽃병에 쓰여진 아버지의 사랑.
못생기고 허름한 꽃병에 쓰여진 아버지의 사랑.김혜원
“이참에 다 버리자. 두 집이 한 집으로 합치려면 물건을 줄여야 해. 꼭 필요하지 않은 건 과감히 버리라구. 이거 봐라. 여기도 한 짐이다. 꽃병이랑 그릇들인데 사용하지 않으면 누굴 주지 왜 끌어안고 있나?”
“그래 버리자구. 당신이 내 놔. 내 놓으면 누군가 가져가더라구. 깨진 건 없으니까 누가 가져다 쓰겠지 뭐.”

못 쓰거나 안 쓰는 소형가전제품이 한 박스, 안 입는 옷들이 두 박스, 그리고 안 쓰는 그릇과 이런저런 소품들이 또 한 박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사를 다닐 때마다 구석 구석 끼워 두었던 묵은 짐들을 버리고 오는데도 여전히 버릴 것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버릴 물건과 그렇치 않은 물건을 구분하느라 온통 뒤집어쓴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찜질방을 다녀오는 길. 우리가 내다 버린 물건이 가득했던 쓰레기장으로 눈길이 갑니다. 어느새 누군가 우리가 내다 놓은 물건 중에 필요한 물건을 골라 가져간 듯 아까와는 달리 주변이 썰렁해져 있습니다.

“벌써 다 가져갔네. 빠르다.”
“거봐 버리기 전에 누굴 주었더라면 더 좋았잖아. 그럼 고맙다는 소리나 듣지.”


@BRI@남편과 이야기를 하며 남아 있는 물건이 뭐가 있나 궁금해 쓰레기장을 들여다보니 플라스틱 그릇 몇 개와 못 생겨 보이는 꽃병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저 꽃병도 우리집에서 나온 거야? 저런 것도 있었나?”
“당신이 신문지에 잘 쌓아 두었던데. 애들이 도예촌 견학 가서 만든 꽃병 아니야?”
“애들이 만든 거라고? 언제 저런 걸 만들었지?”


플라스틱 그릇들 속에 함부로 나뒹굴고 있는 허름한 꽃병. 꽃병에는 정말 삐뚤빼뚤 서툰 솜씨의 붓글씨가 써 있습니다.

‘우리 딸... 우리 딸?’

“여보, 저 꽃병 꺼내줘. 저거 버리면 안돼. 얼른.”

쓰레기 통 속의 꽃병을 바라보던 저는 잊었던 꽃병의 의미를 기억하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글을 쓰신 1984년 4월은 나의 약혼식이 있던 때였다.
글을 쓰신 1984년 4월은 나의 약혼식이 있던 때였다.김혜원

1985년 4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약혼을 했습니다. 24년 애지중지 키운 맏딸이 배우자를 만나 약혼식을 하던 날 아버지는 전에 없이 들떠 보이셨지요. 사위와 사위친구들이 권하는 술을 한잔 한잔 받아드시던 아버지는 술기운 탓인지 일찍 잠이 드셨고 아버지가 안 계신 가운데서도 약혼 피로연은 밤늦은 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약혼식이 끝난 후 좋다 싫다 별다른 말씀 없이 지내시던 아버지가 저와 함께 두 여동생을 방으로 부르신 것은 며칠 뒤였습니다.

“혜원이는 약혼을 했으니 이제 조만간에 남의 식구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나름대로 내 딸을 잘 키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시댁에서 보면 부족한 것이 많을 것이야. 둘째딸과 막내딸 너희들은 아직 어리지만 언젠가는 너희들도 언니처럼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그리고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우리 딸들에게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버지가 여기에 적어 두었으니 늘 읽고 명심하며 살거라.”

그렇게 적어 놓으신 글이 바로 저 허름하고 볼품없이 생긴 꽃병에 새긴 ‘우리딸’이라는 글입니다. 딸들의 먼 장래까지 걱정하시며 늘 마음에 담고 살아갈 글까지 준비해주시던 아버지. 쓰레기통에서 버려져 사라질뻔한 꽃병을 생각하니 새삼 아버지께 송구스런 마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합니다.

꽃병은 다시 잘 포장을 해서 우리의 이삿짐과 함께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아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 이거 기억나세요? 아버지가 딸들에게 써주신 글이요. 생각 나시죠?”
“그래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 났냐? 내가 언제 그런 걸 썼지? 누가 썼는지 명필에 명문이구먼. 하하하.”

아버지는 커다랗게 웃으셨지만 저는 아버지가 바라는 딸이 되어드리지 못한 죄송함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답니다.

엄마를 도와 딸들에게 줄 김장을 나르시는 아버지
엄마를 도와 딸들에게 줄 김장을 나르시는 아버지김혜원

우리딸

푸른꿈을 높이높이
밝고 고운 마음으로
인자함을 항상 간직하고
주위를 아늑하고 화사하게
높은 덕 깊은 지식을 갈고 닦아
행동거지를 무겁게
아침이슬을 머금은 꽃잎같이 싱그럽고 건강하게
밝고 찬란한 아침햇살이 누리를 조용히 밝히듯
모든이에게 희망과 평안을 주는 여인이어라

1984년 4월 입석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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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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