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학 미명호 근처에 있는 에드가 스노우의 묘.김대오
@BRI@<뉴욕타임즈>의 헤리슨 솔즈베리는 "에드가 스노우를 읽거나 연구하지 않고는 누구도 오늘의 중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던 에드가 스노우를 높게 평가했다.
1972년 2월 15일, 에드가 스노우가 죽자 '나는 중국을 사랑한다. 내가 살아서 그랬던 것처럼 나의 일부는 죽어서도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그의 유언대로 유골의 반은 미국에, 나머지 반은 그가 자신의 일부로 여겼던 중국에 묻혔다. 베이징대학을 가본 사람이면 미명호(未名湖)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에드가 스노우의 묘를 보며 왜 그가 그곳에 묻혀 있는지 의아해 했을 것이다.
1928년 상하이에 온 에드가 스노우는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1932년 님 웨일즈와 결혼하고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베이징대학의 전신인 옌징(燕京)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는데 현재 무덤 근처가 바로 그의 연구실이 있던 곳이라고 하니 냉전시대의 서릿발같던 이념의 칼날도 인간들이 나누는 따뜻한 우정과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했나 보다.
에드가 스노우는 그의 자서전에서 중국에서의 체험들을 소개하며 중국에 대한 강한 애정을 이렇게 드러내 놓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 나 개인의 의미란 역사라는 커다란 물결 위에 떠서 흘러가는 하나의 낟알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나의 일부가 되어 다음과 같은 생생한 장면과 인격으로 다가왔다.
기근이란 백만 살은 된 것 같은 말라붙은 가슴을 지닌 처녀를 의미했으며, 공포란 불타는 전쟁터에 방치되어 아직 숨이 남아 있는 병사들의 살을 뜯어먹는 쥐떼를 의미했고, 반역이란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다니며 짐을 나르는 아이를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를 의미했으며, '공산주의'란 집안의 아들 셋이 공산군에 가담했다고 해서 일가족 56명이 처형당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 싸우는 젊은 농부를 의미했다. (중략) 나는 이와 함께 내 마음속에 어둡게 굳어 있는 공포와 비겁함을 목격하고, 유치하게도 한때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던 하층민들에게 용기와 결단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 이들 모두에 나 역시 속할 것이다. 중국의 황갈색 언덕과 초록색 논들, 이른 아침 안개 속에 보이는 절들, 나를 신뢰하거나 사랑했던 몇몇 사람들, 나를 재워주고 먹여주었던 가난하지만 쾌활하고 교양 있는 농민들, 햇볕에 그을리고 누더기를 걸친 채 눈만 반짝이던 아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결하고 굶주리고 경멸받지만,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에 가치를 부여한 농민전사! 이들 모두에 나의 일부는 남아 있는 것이다."
대장정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중국의 붉은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