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지배에서 반란을 꿈꾸는 사람들

[서평] 가이 가브리엘 케이 <티가나>

등록 2007.04.24 19:28수정 2007.04.25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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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티가나> 1권

<티가나> 1권 ⓒ 황금가지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인간과 요정, 난쟁이족이 한데 뭉쳐서 오크, 트롤 같은 괴물들과 결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아니면 최고의 생명체라고 부르는 드래곤을 잡기 위해서 몇몇 전사와 마법사들이 모여서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로도스 전기>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나약하던 전사가 점점 성장하고, 그 전사의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악의 무리에서부터 구해낸다는 결말로 이어진다. 이것은 국내에 소개된 판타지 소설이나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의 전형적인 구성이다.


굳이 <반지의 제왕>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런 전통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톨킨이다. 그리고 톨킨의 뒤를 이은 작가들은 대부분 이렇게 세계의 운명을 놓고 싸우는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인간과 요정, 난쟁이가 어우러진 커다란 세계가 있고 그를 위협하는 악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주인공은 온갖 난관을 헤쳐가면서 그 악과 싸워나가야만 한다.

어쩌면 톨킨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톨킨이 죽은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판타지 독자나 작가들에게 '톨킨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세계관에서 벗어난 판타지의 무대를 볼 수는 없을까?

캐나다의 작가 가이 가브리엘 케이의 <티가나>는 색다른 판타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가브리엘 케이는 스무 살의 나이에 톨킨의 유작을 편집하는 작업에 동참하면서 판타지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그는 <티가나>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실제 역사의 세계관과 판타지적 구성요소를 결합하여 '사극적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팜 반도에서 자유를 되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티가나>의 배경이 되는 곳은 가상의 공간 팜 반도이다. '티가나'는 이 반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팜 반도는 북쪽으로 뻗어있는 반도이다. 왼손을 들어서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접으면 팜 반도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판타지 소설의 공간이 항상 그렇듯이, 이 팜 반도 또한 한때는 평온하던 곳이었다. 해가 지면 비돔니, 일라리온 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달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모여서 그 달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다시 일터로 향한다. 밭을 갈고 여신의 모습을 조각하고, 높은 탑을 쌓아 올린다. 마치 달에 오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18년 전에, 대륙에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온 두 명의 마법사에 의해서 그 평화는 끝나고 만다. 알베리코, 브란딘 이라는 이름의 이 마법사들은 팜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팜 반도를 동서로 나누어서 서쪽은 브란딘이, 동쪽은 알베리코가 지배하게 된다.

브란딘은 한 술 더 떠서 팜 반도의 서쪽 전체에 강력한 마법을 걸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티가나'라는 이름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브란딘과 알베리코는 팜 반도에 있던 마법사들을 모조리 잡아서 죽인다. 팜 반도의 사람들은 나라의 이름을 빼앗기고 착취당한다.

브란딘과 알베리코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마법사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사의 역할이다. 마법사의 지원이 없는 군대는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빼앗긴 나라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반도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를 모으고,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마법사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쉽지 않다. 나라를 빼앗긴 지 18년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은 나라의 이름을 잃은 것처럼 희망을 잃었고, 자유를 되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게다가 동지들을 모은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알베리코와 브란딘을 동시에 팜 반도에서 몰아내려면, 그만큼의 무력과 마법이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마법사 한 명을 찾는 것도 어려운 판국이다. 알베리코와 브란딘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팜 반도가 다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

톨킨의 영향에서 벗어난 '사극적 판타지'

판타지 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판타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빨리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티가나>의 세계관은 그리 낯설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십 년 전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된다. <티가나>의 무대는 물론 가상의 세계이지만, 이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결코 가상이 아니다. 20세기의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다.

이름을 잃은 나라는 침략당하고 수탈당하는 식민지이다. 마법을 앞세운 정복자는 무력으로 한 나라를 빼앗은 제국주의 열강이다. '티가나'라는 이름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만든 것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통채로 없애버리려는 정책이기도 하다.

<티가나>에는 요정이나 난쟁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판타지 소설의 단골인 오크, 트롤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들 뿐이다. 그래서인지 <티가나>에는 절대악이나 절대선도 없다. 모두를 이끌어가는 영웅도 없다. 단지 고뇌하고 갈등하고 방황하는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을 통해 가브리엘 케이는 톨킨의 전통에서 벗어나서 '사극적 판타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티가나>는 20개국 언어로 번역되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멕시코와 폴란드, 크로아티아의 독자들은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내 조국의 이야기를 쓴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티가나>는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어쩌면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판타지 소설의 장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티가나> 1, 2. 가이 가브리엘 케이 지음 / 이수경 옮김. 황금가지 펴냄.

덧붙이는 글 <티가나> 1, 2. 가이 가브리엘 케이 지음 / 이수경 옮김. 황금가지 펴냄.

티가나 2

가이 가브리엘 케이 지음, 이수경 옮김,
황금가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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