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들의 대규모 야유회가 열리는 경주 남산에서

영화처럼 재미있는 동해안 문화기행(33)

등록 2007.05.15 20:38수정 2007.05.15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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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절묘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많은 불상들이 산과 계곡 사이에 지천으로 널려 있을까? 부처님들이 대규모 단합대회라도 나오셨는지, 산 마디마디에 자애로운 미소와 설법 소리가 하루 종일 넘쳐흐른다.

어떤 부처님은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며 바위 위에 아름드리 새겨져있고, 또 어떤 부처님은 아담하게 가부좌를 튼 자세로 오가는 길손들을 빙그레 쳐다보고 있다. 이쪽에 여래좌상이 보이는가 싶더니 저쪽에는 마애대좌불이 보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누가 말했지만 산은 산이요, 부처는 부처라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보면 볼수록, 가면 갈수록 오묘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경주 남산. 그 남산의 부처님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안부인사라도 하려면 한 달도 짧을 것이다.

한마디로 경주 남산은 대규모 야외 박물관이다. 그것도 불교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전시한 노출 박물관이다. 나정과 포석정을 포근히 안고 있는 남산은 신라인들의 높은 심미안을 유감없이 엿볼 수 있는 예술의 산이다.

494m의 아담한 높이에, 금오산과 고위산, 도당산이 한 데 어우러져 있는 산이기도 하다. 동서 4km, 남북 8km의 능선에는 수많은 불상과 암자가 수줍은 계집아이처럼 몰래 숨어 있다.

삼불사를 거쳐 상선암으로 올라가는 길도 좋고, 삼릉계곡을 지나 부처골로 올라가는 길도 좋다. 쉬엄쉬엄 올라가다 가끔씩 만나는 부처님에게 작은 예불 올리면서 쉬는 맛도 일품이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향은 달고 시원하며, 산 정상에서 내리 꽂히는 바람은 온 몸에 찬연하게 부딪힌다. 그 뉘라서 경주 남산을 그냥 지나칠 것인가. 경주의 참 맛을 알려면 석굴암과 첨성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산의 석불들을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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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만한 몸매가 인상적인 석불좌상 ⓒ 김대갑

남산의 석불들은 삼국 통일 전·후에 조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통일 전에 세워진 불상들에는 불국토를 꿈꾸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고, 통일 후에 만들어진 불상들에는 높은 문화를 지닌 자긍심이 깃들어 있다.

신라의 예술가들은 불상을 만들면서 조각 하나하나, 선 하나하나에 신심(信心)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외적의 침략에서 조국을 지켜주기를 빌었고,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하실 미륵불이 빨리 나타나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랐다. 남산에 존재하는 수많은 불상에는 민중의 염원이 절절히 맺혀 있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하늘나라로 간 사이, 우다야나 왕이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설화적인 이야기라서 신빙성은 별로 없다. 여태까지의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불상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인도의 간다라 지방과 마투라 지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간다라 지방에서 발견된 불상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석재나 청동으로 묘사하는 기법이 발달했는데, 그 기법이 간다라 지방에 전해져 부처의 모습을 구체적인 형상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불상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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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 육존불 ⓒ 김대갑

원래 인도에는 불상이 없었다. 초기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가 전국 각지에 세워졌다. 그리고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장소에 각종 기념물을 세워 공양을 드렸다. 이런 기념물은 성수(聖樹)나 불족적(佛足蹟), 불좌(佛坐) 등 이었는데, 이 모두는 부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때를 무불상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지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초월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불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상을 조성할 때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반드시 담아야 하는 부처님만의 특질이있는 것이다. 이른바 32상 80종호라는 것이다. 32상은 부처님의 모습을 32개의 형상으로 구분한 것으로써 부처님의 위대함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제시한 것이다. 가령 몸이 금색으로 되어 있거나 신체 주위에 광채가 빛나는 모습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80종호는 이런 32상을 더욱 세분화시킨 것이며 부처님의 성격·음성·행동까지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몸을 한 번 돌리면 코끼리 왕과 같고 푸른 구슬 같은 머리칼을 지니고 있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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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없는 여래 좌상 ⓒ 김대갑

신라의 조각가들은 부처님의 이런 특질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억 겁의 세월 동안 무생물로 방치된 돌덩어리를 부처님으로 만들면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렸을까? 남산의 석불들에는 그들의 이런 노력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래서 남산 기행은 단순히 석불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수 천 년 전에 이곳에 머무른 예술혼을 보러 가는 것이다. 천 년의 미소가 태양의 각도에 따라 변하는 배리 삼존불 입상에, 바위기둥에 소박하게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에 스민 그들의 예술혼을 느끼러 가는 것이다.


그뿐인가. 상선암을 거쳐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마애대좌불에는 웅혼한 자태가 넘쳐나고, 풍만한 몸매가 인상적인 석불좌상에는 천진한 미소가 일품이다.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각육존불도 빼놓을 수 없다. 머리 없이 몸체만 외로이 남아 있는 여래좌상은 또 어떠한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많은 부처님을 알현하는 영광을 누리겠지만 무심한 산새들이 하산 길을 재촉한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삼릉에는 8대 아딜라왕의 흔적이 엿보였다. 그리고 계곡의 끝에는 경애왕의 무덤이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눈 들어 하늘을 보니 서산에 기운 해가 예술혼이 겹겹이 쌓인 남산을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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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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