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땐 '용역'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잊혀진 외침 ②] 르네상스노조 "열심히 사는 여성노동자의 승리는 당연"

등록 2007.06.14 19:56수정 2007.06.1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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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53) 르네상스노조 위원장은 "먹고 살겠다는 사람의 일자리를 어떻게 뺏을 수 있느냐"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옥순(53) 르네상스노조 위원장은 "먹고 살겠다는 사람의 일자리를 어떻게 뺏을 수 있느냐"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오마이뉴스 선대식

"보리차를 끓이는데 불이 안 나오더라고. 그제야 가스가 끊긴 걸 알았지."

이옥순(53) 르네상스노조 위원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 위원장은 "먹고 살겠다는 사람의 일자리를 어떻게 뺏을 수 있느냐"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18년 간 다니던 호텔에서 지난 2005년 12월 31일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쫓겨나 농성을 시작한 지 벌써 525일째. 서울 강남 22층짜리 르네상스 호텔 앞에 있는 폐차 직전의 승합차가 그들의 농성장이다. 또한 그들의 삶터이기도 하다. 이 곳으로 출근해 이곳에서 퇴근한다.

지난 11일 오전 11시에 찾은 현장에서 여느 때와 같이 노조의 승합차가 호텔 앞에 서있었다. 승합차 앞 유리에는 '정규직으로 원직복귀' '불법파견 판정했다' 등의 피켓이 걸려있었다. 다른 농성장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 구호도 있었다. '우리는 일하고 싶다.'

이옥순 위원장은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9인승 승합차 안에는 가방·플래카드·피켓 등이 한쪽에 쌓여있었다. 짐을 피해 기자와 이옥순 위원장 등 노조원 5명이 의자에 앉자 승합차 안은 무척 비좁아 보였다. 인터뷰는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

"아파도 못 쉬고, 휴일에도 나왔다"

6월 11일로 농성 525일째. 서울 강남 22층짜리 르네상스 호텔 앞에 있는 폐차 직전의 승합차가 그들의 농성장이다.
6월 11일로 농성 525일째. 서울 강남 22층짜리 르네상스 호텔 앞에 있는 폐차 직전의 승합차가 그들의 농성장이다.오마이뉴스 선대식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 지옥이었지."


긴 싸움의 시작에 대해 물었을 때 이 위원장이 내뱉은 말이다. 이 위원장은 "아이들 졸업식·생일 때도 못가고, 아파도 못 쉬고, 휴일에도 나오라면 나오고 18년 동안 몸 바쳐 일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아줌마들을 내칠 수 있느냐"고 소리를 높였다.

이 위원장은 1988년 르네상스호텔 객실관리부에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연봉이 3000만원 넘는 어엿한 정규직으로 호텔의 성장을 도왔다.


하지만 2001년 12월, 그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호텔이 망하게 생겼다"며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퇴직금으로 16개월치 월급을 줄 테니 희망퇴직을 받겠다"고 했다.

희망 퇴직을 신청한 직원은 거의 없었다. 이 위원장은 "며칠 뒤 회사 쪽의 태도가 돌변했다"고 말했다. 이어 "객실관리부장이 윽박지르고, 몇 번이고 사무실로 불러서 '권리포기서'를 강요했다"며 "'다른 직원들도 다 썼다'고 거짓말도 했다"고 덧붙였다.

결국 회사 쪽의 "사인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회유와 "사인 안 하면 호텔에 못 들어온다"는 협박에 100여명의 객실관리부 직원 전원이 사인을 했다. 이듬해 1월 객실관리부 직원들은 '르네상스서비스팀'이라는 회사로 용역 전환됐다. 이 위원장은 "그 땐 용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밝혔다.

"노조에서 임금 협상 결과를 내놓았는데 월급이 11만원 올랐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시정조치, 그러나 바뀐 것은 없었다

2002년 6월 용역으로 전환된 객실관리부 여성 노동자 50여 명이 회사 몰래 전국여성노조에 가입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

"9월 노조 가입 사실이 들통났다. 그 땐 사람도 노예도 아니었다. 화장실까지 쫓아다녔다. 한 노조원의 경우 친척이 죽어 경조휴가를 갔는데, 회사에서 못 믿겠다며 무덤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없던 스케줄까지 생겨나 노동 강도가 점점 세졌다. 정규직 때 한번 받지 않았던 서면경고를 무수히 받았고 연봉은 1/3로 줄었다."

르네상스노조원들은 강남노동사무소에 불법파견 진정을 냈고 노동사무소는 2004년 5월 호텔 쪽에 '시정조치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 뿐, 바뀐 것은 없었다. 2005년 11월 검찰은 호텔에 대해 무혐의 처리했다. 결국 2005년 12월 31일 계약해지라는 이름으로 노조원 15명을 포함해 20여명이 해고됐다.

이에 대해 현재 르네상스 호텔 쪽은 "검찰에서 무혐의 판정을 냈기 때문에 사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앞으로 새로운 판결이 나오면 그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위원장과 노조원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갔다. 특히 현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함소란(53) 사무국장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들었다. 해고된 뒤 그들의 농성은 그리고 그들의 생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 위원장과 함 사무국장은 번갈아가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들의 농성과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옥순(53) 르네상스노조 위원장이 르네상스 호텔을 뒤로 하고 승합차 옆에 서 있다.
이옥순(53) 르네상스노조 위원장이 르네상스 호텔을 뒤로 하고 승합차 옆에 서 있다.오마이뉴스 선대식
- 이옥순 위원장은 현재 어려운 상황이라고 들었다.
"비정규직인 아들과 집에서 쉬고 있는 남편, 딸과 같이 생활한다. 결혼자금을 모으고 있는 비정규직 아들이 가계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실질적으로 가계 수입은 '0'이다. 해고 당시 모아놓은 돈은 현재 바닥상태다. 얼마 전 전화·가스가 끊겼는데 친척한테 돈을 빌려 복구했다. 냉장고엔 김치 뿐이다."

- 농성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나?
"오전 10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자동차 안에서 농성한다. 현재 해고 노조원 15명 중에서 7명만 이곳에 나오고 있다. 2005년 12월에 해고 뒤, 실업급여 6개월을 받고 그 뒤로 어떠한 수입도 없다. 교통비가 없어서 집회를 한 달 쉰 적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겐 차마 그 말을 못했다."

- 농성에 필요한 장비들은 어떻게 꾸리나?
"이 승합차는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에서 폐차하려는 걸 가져와서 사용하고 있다. 각종 플래카드 역시 민주노총 총연맹 쓰레기장에서 주어왔다. 구호 내용은 비슷하니까."

- 밥은 어떻게 해결하나?
"식사가 제일 걱정이다. 예전에 도시락을 싸왔는데 모두 밥과 김치만 싸왔다. 라면도 먹었는데 이것도 지겨워졌다. 오늘은 (7명이) 김밥 2줄과 계란 10개 정도로 점심을 때우려고 한다."

- 벌금이 많이 나왔다고 들었다.
"호텔에서 업무방해 혐의로 민사· 형사 소송을 걸었다. 큰 집회 시 1인당 벌금 50만원 나왔다. 현재까지 벌금만 1850만원이다. 낼 돈이 없다. 18년간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너무 파렴치하다."

- 이 투쟁의 의미를 무엇으로 보나?
"여성노동자들한테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싸움이다. 처음에는 내 싸움이었는데, 지금은 전국 여성노동자들의 싸움이 되었다. (이 싸움은) 여성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찾겠다는 정당한 싸움이다. 이겨서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노동자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조그마한 희망... "승리는 너무 당연한 얘기"

'세계 여성의 날' 99주년을 기념하는 전국여성대회가 2007년 3월 8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에 참가한 르네상스 호텔 노조 조합원이 해고자 원직복직을 촉구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세계 여성의 날' 99주년을 기념하는 전국여성대회가 2007년 3월 8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에 참가한 르네상스 호텔 노조 조합원이 해고자 원직복직을 촉구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오마이뉴스 남소연
인터뷰 내내 대화의 색깔은 잿빛이었지만 그 끝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지난 7일 법원에서 전해진 기쁜 소식 때문이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은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불법파견이 2년이 넘으면 정규직"이라고 판결했다. 이 위원장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싸움에 대한 정당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르네상스노조도 2004년 11월 르네상스 호텔을 상대로 '체불임금 지급 및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을 낸 상태다. 2007년 2월로 예정됐던 선고가 현재 미뤄진 상태지만 노조원들은 '희망'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입에 올렸다. 노조원들은 모두 "우리에게도 좋은 결과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승리를 확신했다.

"1년 동안 청바지 2개가 찢어질 정도로 열심히 투쟁했다. 전혀 창피하지 않다. 내가 너무 당당하니까. 현재 여성노동자들은 '3D', 즉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열심히 사는 여성노동자에게 승리는 너무 당연한 얘기다."
#비정규직 #르네상스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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