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인턴은 '불면증'이다

'귀한자식'의 인턴 체험기

등록 2007.08.13 16:54수정 2007.08.1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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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은 습관적으로 수면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디서나 잠을 잘 잔다. 시끄럽거나, 버스처럼 흔들리는 공간도 머리만 댔다 하면 곧바로 곯아떨어져 잠들 수 있는 바람직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런 내가 오마이뉴스 인턴 6주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불면증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 경우 흥분하거나 불안감으로 정신상태가 항진되어 있을 때, 환경의 변화나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이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인턴 초기엔 과제와 의욕에 불타 잠들지 못했고, 후반엔 괜히 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뭔가에 흥분 상태였다. 도대체 오마이뉴스가 뭐기에, 나를 잠도 재우지 않는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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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첫주, 인턴 6기 12명이 회의실에 모여있다. ⓒ 김귀자


[1-2주차] 시작한다는 설렘으로 '잠들지 못하다'

처음 오마이뉴스를 출근하던 날, 지금껏 마음 속으로만 그려왔던 기자를 직접 뛰어들어 체험한다는 것에 너무나 설렜다. 그러나 아직 대학생인 다른 인턴 친구들과 달리 나는 졸업을 앞두었기에 뭔가 인생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처음 2주 동안 '기자 교육'을 받았다. 기자가 무엇이고 뉴스가 무엇인지부터 시작했다. 기자는 무엇이고, 뉴스란 무엇인가?

무엇인가 내 가슴을 뛰게 한다면, 그것이 뉴스다. 기자는 메신저다, 다수와 소통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접점에 있는 이다. 그런 만큼 부지런해야 하고, 촉수가 예리해야 한다. 나는 그런 기자로서, 보다 좋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퍼다 주고 싶었다. 여기 희망이 있소! 여기 꿈이 있소!

교육을 받으면서 느낀 건 내가 너무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기자를 내 꿈으로 가슴 한 켠에 조신하게 묻어두고 지내왔지만, 사회 흐름에 너무 무식했다. 기자를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뿐 내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자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잠을 줄였다. 매일 과제를 하고, 뉴스와 신문을 보려면 서너 시간은 필요한데 이를 하기 위해선 딴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한답시고 몸에 힘을 너무 많이 주고 있었나 보다. '대학생 내 곁에는 언제나 뉴스가 있다'는 말에도 내 곁에는 뉴스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잘하고 싶다는 스트레스가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첫 2주간은 시작에 대한 설렘과 의욕으로 밤을 불태웠다.

[2-4주차] 가슴 뛰는 가운데 '밤새다'

교육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부서배치를 받았다. 나는 바람대로 문화부에 배치되었다. 출근시간은 30분 당겨졌고, 매일 아침 문화부팀장과 기획아이템회의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문화부에 들어가 처음으로 연예인을 본 날이 기억난다. 엄정화, 이동건, 한채영, 김동욱 등 TV로만 보던 사람들을 실제 만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연예인 보고 좋아하는 것도 잠시, 힘들긴 해도 스스로 기획해서 그를 기사화하는 것이 더 재밌었다.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것들이 하나둘씩 기사화될 때, 느껴지는 쾌감.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히로뽕 맞은 것의 백배는 되지 않을까? 그러나 다음날 기획안을 세우지 못한 날은 누워도 잠들지 못했다. 몸은 누워 있었지만, 머릿속은 끝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벌떡 깨기를 여러 차례. 매일 3시간 이상 잠들지 못하면서도 아무 것도 길러 올리는 것이 없을 때면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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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30일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 영안실로 운구되던 모습을 CCTV를 통해 단독 촬영했다. ⓒ 김귀자


현장은 내가 세상과 접점에 있다는 설렘을 안겨 주었다. 첫 현장취재를 나간 날이었다. 배형규 목사의 시신이 아프간에서 샘 안양병원으로 운구 되던 날이라 많은 취재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한 시간여 늦게 시신이 도착했고 정신없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시신이 부검을 위해 영안실에 들어가고 나선 아무도 찍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병원 곳곳을 찍어주는 CCTV를 발견했고, 시신이 부검현장으로 인도되는 장면까지 고스란히 사진기에 담을 수 있었다. 비록 카메라 연결 잭이 없어서 기사에 싣진 못했지만,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발견한 데 대한 짜릿함이 남았다. 특히 내 이름이 실린 기사가 나간 날은 나도 기자구나, 라는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한번은 북 세미나 취재를 끝내고 집으로 오던 길이었다. 자정 무렵이었는데 그때 한국일보 근처에서 시꺼먼 연기와 함께 십수 대의 소방차가 어지러이 도로 가에 있었다.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구나, 해서 선배 기자에게 전화하고 취재를 시작했다.

바쁘고 지쳐 있던 소방관들은 취재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30분을 서성거렸지만 내가 알아낸 것은 화재가 난 시각과 원인불명이라는 것뿐이었다. 결국 충분히 확인되지 않아 기사화하지 못했지만, 이런 게 '현장'이구나, 가슴이 뛰었다.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됐던 기간 늘 흥분되어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곤 했다. 그러나 늘 설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를 쓸수록 고민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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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0일 (구)한국일보에서 발생한 화재.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 김귀자


[4-6주차] 고민 속에 뜬눈으로 '지새우다'

마지막 2주를 남기고 정치부, 문화부, 사회부, 스포츠 등 각 부서에 배치됐던 인턴 12명은 모두 사회부로 다시 모였다. 각자 팀을 이루어 알아서 기획기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혼자 각개전투를 벌이다 함께 하게 되니 재미있었다.

인턴기자 6명이 출동해 인천공항에서 24시간 지새우고, 머리 맞대고 기획하고 편집부 검토를 기다리던 순간도 재밌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뛰어다니고, 공부하던 다른 인턴들의 모습은 나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자란 무엇인가라는 고민도 깊어졌다.

아프간 피랍자 가족들이 미 대사관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날, 나도 수많은 취재진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기자들은 안타까움에 흐느껴 울고 있는 가족들의 얼굴 바로 앞으로 사진기를 들이댔고, 가족들의 감정에는 상관없는 듯 취재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도대체 기자라는 게 무엇인가, 어떤 일도 취재만 하면 그만인 건가? 란 고민을 하게 됐다.

동대문 흥인시장 상인들이 철거문제와 관련해 단식투쟁을 벌어고 있다고 하여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어쩐 일인지 누구도 취재를 시도하지 않아서 우리가 맨 처음이었다. 우리를 보고 하소연하시는 상인들과 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구청 사이에서 참으로 무기력함을 느꼈다. 결국 취재를 도중에 포기했지만, 그들의 안타까운 눈길이 기억에 남는다. 도대체 무엇을 알려야 할까? 어떤 글을 쓴다는 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취재를 접고 주말 내내 고민했다.

처음으로 기사 때문에 항의받은 적도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취재를 갔는데, 삼성 관련해서 기사에 한마디 넣었다가, 당장에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그냥 한 말이니 왜 싣느냐며 지워달라고 부탁했지만, 명백한 협박이었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썼는데, 내가 쓴 글이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보니 책임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제대로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대 다수로 소통한다는 것, 무언가를 알리는 글이 좋은 역할뿐 아니라 무서운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에 나는 기사를 쓰면서 놀라고 있었다.

불면증은 끝나지 않았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골프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 공이 멀리 나가지 못한다. 힘 빼고 공에 집중해야 멀리, 멋지게 날아간다. 잘해야겠다는 강박을 버리고 스스로를 놔버려."

어느 영화잡지에서 본 글인데 내게 참 필요한 말이다 싶었다. 나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힘주다가 오히려 보지 못한 면이 많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주위의 많은 뉴스거리와 취재원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도 아쉽고, 의욕에 앞서 막판 체력저하로 힘겨워한 것도 아쉽다.

이렇게 설렘과 흥분, 고민 속에서 6주가 흘러갔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마이뉴스는 6주간 내게 'oh my news'란 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 그것이 오마이뉴스다. 나는 늘 거창한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작아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좋은 뉴스라는 걸 알려줬다.

내질러 보라던 선배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설렘과 흥분만이 있었을 뿐, 아쉬움이 가득하기에 오마이뉴스 인턴 6주는 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인턴이 끝났음에도 나는 아직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있다. 내 심장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여전히 세차게 뛰고 있다. 무엇 때문에 뛰는 것인지 그 대상을 만날 때까지, 살아 뛰어주길 바란다.

오마이뉴스에서 시작된 불면증은 생각보다 꽤 오래 갈지도 모르겠다.
#오마이뉴스 #인턴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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