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인턴은 '삶의 전환점'이다

부모님의 결별과 방황, 그리고 인턴 생활

등록 2007.08.13 20:55수정 2007.08.1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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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면 취직시켜 주는 거 아니야?"
"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도 한 달에 얼마라도 받고 일하면 좋을 텐데."
"......"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버지. 흔치 않은 3부자만이 사는 가정의 저녁식사는 여느 집처럼 평온하면서 활발하지 않다. 조용한 젓가락질 속에 간간히 할아버지와 나의 대화가 들릴 뿐. 그렇게 6주 동안의 오마이뉴스 인턴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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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6기 인턴 동기들 ⓒ 최재인

지난 6주간의 시간은 내 스물일곱 해 중에 가장 빨리, 가장 힘들게 지났다. 2주의 교육과 4주간의 취재. 그 짧지 않던 한 달 반이란 시간은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내 머릿속을 헝클어 놓았다.

"너 처음에는 눈빛이 이렇지 않았어. 뭐랄까 생각이 없고 미래에 대한 목표 없이 그냥 대충 사는 건달? 건달은 아니고... 의식이 없어 보였지."

마지막 날 면담에서 교육을 맡은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과연 지금은 처음에 비해 달라진 것이 있나?' 얘기를 들으며 생각해 본다. '당연하지! 달라져야지.'

나의 늦깎이 사춘기

대학 1학년 가을. 99년도 9월쯤이었나. 그때 처음으로 부모님도 사생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년 넘게 한 이불 속에 살던 그들도 과거는 추억으로 남기고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3부자와 모녀가 딴 살림을 시작했다.

내 대학 성적 중 1학년 2학기 성적이 가장 최악이었다. 0.74인가. 시력도 아니고. 늦깎이 사춘기를 맞아 나의 방황은 시작됐다. 더불어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 생활에 대한 압박감이 삶의 전부였다. 2학년이 되기 전 학사경고의 부담감과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군대에 갔다.

허수아비 같은 삶을 보내던 내게 2006년 겨울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상이 다가왔고, 생각지도 못한 좋은 결과로 올해 여름 오마이뉴스 6기 인턴을 시작하게 됐다.

인턴 첫 주 대박이 터지다!

인턴 첫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대박이 터졌다.

'무단결근'

목요일 밤. 인턴 시작 후 동기들과의 첫 술자리였다. 남은 기간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적지 않은 술을 마셨다. 자리가 파할 무렵, 하늘의 장난인지 우연찮게 선배들을 만나게 됐다. 그 자리에서 술을 얼마나 목구멍에 쏟아 부었던지, 다음날 일어나니 오후 12시가 넘어 있었다. 전날 입었던 옷에, 가진 거라곤 달랑 술자리에서 받았던 선배 명함 한 장. 가방, 지갑, 카메라, 전화기, 모든 카드들은 암흑 같은 기억과 함께 어딘가에 묻혀졌다. 신기하게도 집에는 잘 들어왔나 보다. 그렇게 나의 오마이뉴스 인턴 첫 주말은 금요일부터 시작됐다.

다음 주 목요일. 드디어 심판의 날이 왔다. 12명의 인턴 중 2명이 중도 탈락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과제는 '금토일 3일 동안 매일마다 기사를 작성해야 할 것'. 물론 책상머리에서 끄적거리는 것은 제 무덤을 파는 것이고. 나는 독기와 오기와 절박함으로 3일간의 취재를 마쳤다. 그러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잉걸 두 개와 생나무 하나였으니... 두 번째 금요일 역시 사무실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나마 노력이 가상했는지 다행히 중도 탈락하는 쪽팔림은 면하게 됐다. 그러나 12명의 인턴 중 연장자로서의 책임감, 의무감, 창피함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 남은 생활에 대한 부담감이 가중됐다. 아마 이 때부터 삶의 전환점이 시작됐던 것 같다. 밀려오는 압박감들.

현장에서 보고 느껴야 전환점을 돌 수 있다

나는 비교적 다른 동기들에 비해 현장에 많이 있었던 편이다. 홈에버 월드컵몰점에 얼떨결에 따라가 2박3일동안 조합원들과 한솥밥을 먹기도 하고, 샘물교회와 한민족복지재단을 오가며 피랍자 가족들의 아픔을 눈앞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사건들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면서 시나브로 전환점을 돌고 있었다.

7월 18-19일까지 나는 홈에버 월드컵몰점에 있었다. 입구를 막고 있는 두 대의 버스 사이로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에 전경 3명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 좁은 통로가 사회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라고 생각하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담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조합원들과 함께 한 시간들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선배의 지령으로 조합원들을 찾아다니며 25명 개개인의 사진과 인터뷰를 끝낸 후에는 사방이 막힌 그 곳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20일 아침. 찬 땅바닥에 서로 팔짱을 끼고 누워 있는 그녀들이 한 명 두 명씩 들려 나갈 때 내 사고도 함께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기자로서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느냐?"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감히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달에 80만원을 벌기 위해 생고생을 하는 그들의 생각과 아픔을 내가 어찌 모두 알 수 있겠으며, 자신의 어미뻘을 강제로 끌고 나가는 이들의 괴로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끝도 없는 사고와 함께 세 번째 금요일이 지나갔다.

탈레반에게 납치된 희생자들의 가족을 보면서 사회와의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연일 나오는 보도와 댓글에서는 '무리한 선교가 납치의 원인이었다' '당해도 싸다'라는 인식이 전반적이었다. 나 역시 특정 종교 활동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붙이를 납치당한 부모 형제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피 말리는 심정이었을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생명이기에 적어도 이미 깊은 나락에 빠져 있는 가족들에게 다른 아픔을 주지는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 금요일은 아쉬움이 큰 하루였다.

'삶의 전환점'이 된 오마이뉴스 인턴

대학 생활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있다. 오마이뉴스 인턴을 마치고 남은 시간들이 다시 예전처럼 방탕하게 돌아갈지, 아니면 전환점이 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는 대선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마이뉴스 6주간의 인턴 기간이 확실한 '삶의 전환점'이 됐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병기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인턴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병기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인턴이었습니다.
#인턴 #오마이뉴스 #전환점 #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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