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서 온 김치 구출하기

어머니만의 공간 속에 숨긴 김치 찾기

등록 2010.07.19 20:08수정 2010.07.2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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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우리의 밥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반찬입니다. 아랫집 할머니가 김치를 한 양푼 가져왔습니다. 색이 바래서 광택은 다 없어지고 여기저기 찌그러진 노란 양푼에 담긴 김치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습니다.

 

냉큼 어머니께로 가져가서 김치를 보였습니다. 곧 바로 사단이 생겼습니다.

 

"이리 내 놔."

 

내 손에서 김치 양푼을 낚아채시더니 뒤로 감추셨습니다. 이때만 해도 큰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전개된 일들은 간단치 않았습니다. 이 맛 좋은 김치를 구출(?) 하기 위해 이틀 동안 백태만상이 연출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감춰놓은 김치를 꺼내게 하는 방법은 김치가 꼭 필요한 음식을 만들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김치를 먹고 싶은 마음은 반도 안 되고 이 무더위에 김치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햇감자를 한 소쿠리 캐 와서 삶았습니다. 파근파근하게 삶아서 어머니 코 앞에 갖다 댔습니다.

 

"어무이. 감자 삶았어요. 김치랑 묵으믄 참 좋은데?"

"칼이랑 도마 가져 와."

 

어머니의 산뜻한 대꾸에 사태가 해결 된 줄 알고 도마와 접시와 반찬통을 가져왔습니다. 당연히 반찬통은 김치를 썰어 냉장고에 넣기 위한 것이었지요. 어머니는 접시에만 코딱지만큼 김치를 썰어 놓고는 도마와 칼을 밀쳐놓았습니다. 반찬통은 휙 집어 던지셨습니다. 감자를 먹다 김치가 동이 나자 또 김치를 쪼끔 썰어놨습니다.

 

"냉장고에 너 노믄 잉가이 존 줄 알고 있어. 그라믄 매가리가 없어서 맛이 엄능기라. 그것도 모르능기....츳츳"

 

이 무더위에 김치의 운명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궁리를 거듭 했지만 별 뾰족한 대책이 안 떠올랐습니다. 어쨌든 김치의 행방 만큼은 주시하고 있어야겠다 싶었는데 어머니 무르팍에 있던 김치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어무이! 김치는요?"

"걱정 마. 내가 간수 해 놨어."

"어디요?"

"어디믄? 어짤락꼬? 니 볼일이나 봐."

 

분명 김치는 방 아랫목 이불 밑이나 어머니 보따리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뚜껑도 없는 양푼에서 김치 국물이라도 엎질러지면 낭팬데. 저는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도 김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 눈치를 피해가며 김치를 찾았습니다. 김치그릇을 빼 내고 그 자리에는 어머니 좋아하시는 새우멸치 한 봉지를 두거나, 김치를 양푼에는 쪼끔만 남겨두고 다 꺼내 와서 냉장고에 넣으려고 했는데 김치 그릇을 찾지를 못하고 있으니 내 기발한 계략들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김치 찾기를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습니다. 아랫목에도 이불속에도, 어머니 가방 속에도 없었습니다. 옷장에도 없었고 오죽하면 베개 속까지 뒤졌지만 허사였습니다.

항복의 표시로 나는 냉동실에서 쑥 백설기를 꺼내 쪄 왔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쑥 백설기 앞에 어머니의 김치 양푼이 등장했습니다.

 

눈 깜짝할 새였습니다.

 

부엌에서 물을 떠 오는 사이에 상 위에는 김치 양푼이 턱 하니 놓였고 어머니는 천연덕스럽게 김치를 죽죽 찢어 드시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마룻장을 들추고 꺼냈나? 옷소매 속에 숨겼었나? 투명 봉지에 넣어 공중에 매달아 두었나?

 

근데 신기한 것은 김치가 아주 시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쉬기는커녕 아랫집 할머니가 가져 올 그때처럼 싱싱했습니다.

 

"어무이. 김치 쉬면 못 먹어요. 냉장고에 넣어요."

"이 김치는 서울에서 가져 온기라. 그 먼데서 가져와도 안 쉬었어. 짭짤하믄 안 쉬는기라. 걱정 마."

"이 김치는 서울서 가져 온 게 아니고 아랫집 한동 할머니가 갔다 줬는데요?"

"찌랄하고 있다. 내가 서울 가서 가져 온긴데 머락카노. 저리 가."

"그런데 김치 엇따 뒀었어요?"

 

이때 어머니의 표정이 가관이었습니다. 곁눈으로 나를 보면서 가소롭다는 듯이 입 끝을 치켜 올리며 씨익 웃었습니다. '와? 갈차주믄 니가 다 처먹을라꼬? 뭇놈들 오믄 다 내 줄락꼬? 아나 콩이다.'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법.

 

그래도 4년을 한 방에서 살고 있는 모자지간 아닌가. 어머니는 마루 끝에 놓여있는 호박돌(돌확) 뚜껑을 여시고 그 속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꺼운 돌확 속에 넣어 뒀으니 김치가 시원했구나. 바로 곁에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방 안을 온통 이 잡듯이 뒤졌으니 김치를 찾을 수가 있겠나.

 

일본의 유명한 에니메이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든 '너구리 대작전' 못지않은 내 작전이 왜 헛일이 되고 말았는지 드러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김치를 모두 썰었습니다. 그리고는 다 나를 주셨습니다. '게임 끝!'이라고 선언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김치를 진짜 구출하는 것이 과연 내 생각처럼 냉장고에 넣는 것이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오랜 경험에 기대어 김치는 돌확이라는 천연냉장고 속에서 고이 보관 되었던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천도교 월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7.19 20:08ⓒ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천도교 월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치 #돌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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