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탄로 나기 위해서 존재한다... '진짜'

[연재소설 - 하얀여우 11] 배신... 한 잔 술에 찾아드는 그리움

등록 2012.01.07 11:25수정 2012.01.1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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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호야 너 어떻게 여기를?"

이렇게 말하며 그녀가 얼른 내 몸에서 떨어졌다. 한참 서로에게 열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난 그녀의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우리의 아지트 '집시'에서는 <스마일 어게인>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쉬쉬하며 만났어도 역시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호 얼굴을 보자마자 비밀이란  탄로 나기 위해서 존재 한다는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나와 고윤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인호가 우리를 미행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맞은 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심하고 나온 듯 싸늘한 눈초리로 나와 고윤희를 번갈아 노려봤다. 난 아무래도 남자끼리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호야 사실은 말야…, 미리 얘기 하려고 했는데, 우리 윤희 보내고 둘이 얘기 할까?" 하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듣고 고윤희가 일어나자 인호가 거칠게 고윤희 어깨를 밀어서 주저앉혔다. 고윤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인호야! 너 누나한테 무슨 짓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인호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누나? 그래 누나지! 그럼 누나가 이 상황 좀 설명해봐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라고 말했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미안해 인호야 우리 사귀고 있다는 것 미리 얘기 했어야 했는데 미처 기회를 잡지 못했어."
"사귄다고? 형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분명히 내가 먼저 사귄다고 말했잖아!"
"인호야, 네 마음 이해는 하겠지만 너 혼자 좋아하는 것 하고 사귀는 것 하고는 다르잖아"
"나 혼자 좋아 한다고? 형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누나가 얘기해봐. 정말 나 혼자 좋아 한거야? 그런 거냐고? 왜 아무 말 못해 말을 해봐 말을!"


인호가 소리를 치며 다그쳤지만 고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가 단순히 누나 친구, 친구 남동생 사이는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이 스쳤다.

"난 설마설마 했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이 날 배신 할 거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어."
"인호야, 미안해. 하지만 난 너를 배신하지 않았어. 너를 배신하는 일이라면 절대 하지도 않았을 테고."
"정말 모르는 거야? 하긴 누나가 말 했을 리가 없지.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해 줄께 잘 들어 우린…."

인호가 여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갑자기 고윤희가 "그만! 그만해!"라며 자리를 박차고 뛰어 나갔다. 인호가 벌떡 일어나 고윤희 뒤를 따랐다. 부리나케 일어나 계산하고 두 사람 뒤를 쫓았다. 인호와 고윤희가 길거리에서 다투고 있었다. 고윤희는 인호 팔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인호가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네가 뭔데 그래? 네가 남편이라도 돼? 왜 간섭하고 그래, 이거 놔 나 갈거야!"
"누나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리고 왜 하필이면 상범이 형이야. 왜 하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이거 놔, 나중에 얘기해. 너 지금 흥분 했어."
"나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설악산 갔을 때도 그랬잖아, 그리고 우리가 함께 보낸 수많은 밤은 도대체 뭐고"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느낌 이었다. 배신감이 몸속 깊은 곳에서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고윤희는 나와 인호를 번갈아 가면서 만난 것이다. 번갈아 가면서 잠도 자고. 설악산에서 내가 술에 취해 방에 들어갔을 때 인호가 왜 방에 없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바로 그날 밤 인호는 고윤희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고윤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디서 힘이 났는지 인호 팔을 사납게 뿌리치고 총총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부터 고윤희는 연락이 끊겼다. 전화를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그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가을이었다. 그해 가을은 참으로 처절했다. 배신감과 그리움이 뒤엉켜 안절부절했다.

밤이 되어 술을 한잔 마시면 찾아오는 진한 그리움을 참기 힘들었다. 내 머리는 배신감에 파르르 거렸지만 내 몸은 고윤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부드러움과 촉촉함을 끊임없이 그리워했다. 그 갈망은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은행잎을 보면서 지독한 우울감을 느꼈다. 우울해져서 견딜 수 없었다. 노란 은행잎이 길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는 내 모습 같아 애처로웠다. 찬바람이 살을 스칠 때마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외로움도 견딜 수 없었다. 참으로 지독한 가을 이었다. 그 지독한 괴로움에 난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이때부터다. 이때부터 난 지독하게 가을을 타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을만 되면 괜히 센티해 져서 까닭 없이 감상적으로 변하곤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가벼운 감기 같은 '가을병'이었다.

하지만 이때 시작된 '가을병'은 지독했다. 한번 가슴앓이가 시작되면 소주병이 머리맡에 수북이 쌓여야 잠시 진정됐다. 더 무서운 것은 치료약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술만이 내 가슴앓이를 잠시 진정시켜 줄 수 있었다. 이 지독한 '가을병'은 이렇게 살금살금 내 인생을 갉아 먹고 있었다.  

인호와는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건 인호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사무실에서 만나도 낯선 사람을 대하듯 데면데면했다. 인호도 수척해져 있었다. 나처럼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인호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호와 난 가을이 끝나갈 때 쯤 강남역 부근 포장마차에서 마주 앉았다.

"힘드니?"
"힘들긴! 형은 좀 어때?"
"나? 그래 좀 힘들어. 잠도 잘 안 오고. 우리 참 우습게 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래 잘못됐지, 분명 잘못 됐어. 근데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게 문제야. 아무래도 이 일을 그만 둬야 할 것 같아."
"그렇다고 그만두면 어떡해, 네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쩌고 또 그동안 투자한 돈도 찾아야 하잖아?"
"그래 돈도 찾아야지, 내가 데리고 온 사람들 돈도 찾아 줘야 하고. 형은 어때 할 만해?"
"나야말로 그만 두려고, 사실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잖아. 아무래도 난 이 일이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내가 뭐에 홀린 거지"

인호도 나만큼이나 힘들어 보였다.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 지금 힘들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허허로운 표정 속에 숨어 있었다. 그 날 만남은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날 만나 그저 같은 이유로 힘들어 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다시 고윤희를 만난 건 은행잎이 모두 떨어진 초겨울쯤 이다. 고윤희는 예고도 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집시'에 있다며 나오라고 했다. 집시는 고윤희와 내가 맨 처음 만나 술을 마신 후 아지트처럼 이용하던 데이트 장소였다.  

"잘 지냈어? 좀 말랐네. 사업은 잘 되고?"
"응 그저…. 이젠 그거 그만 하려고. 아무래도 체질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래 잘 생각 했어. 상범씨 하고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왜 연락 안 했어? 전화 많이 했는데?"
"응 좀 바빴어. 나 내년 봄에 결혼 해….그래서 준비 할 것도 많고…."

결혼한다는 소릴 듣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몸에 있는 힘이 한꺼번에 쑥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를 다단계 사업에 끌어 들이기 위해서 유혹했냐고, 인호도 같은 이유로 유혹했냐고 잔인하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결혼 한다는 소릴 듣자마자 맥이 풀려서 아무것도 따질 수 없었다. 허한 속을 채우기 위해 술만 마셔댔다.

결혼할 남자와는 스무 살 때 쯤 만났고 벌써 오래전에 결혼 약속을 했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고백했다. 그리고 바람이었다고 말했다. 나와 함께 한 모든 일이 그저 바람이었을 뿐이라고. 이젠 너무 위험해서 그만 접으려한다고 취중에도 또박또박 말했다. 인호와 있었던 일도 바람이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것을 묻는 순간 상할 대로 상한 내 자존심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문득, 고윤희가 이 도시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다 받아 줄 것처럼 친절해 보이지만, 막상 다가서려 하면 갑자기 차가워지는 도시.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약아빠진 도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난 이방인이었다. 서울에 온 이후 계속 이방인이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몇 년 씩이나 다니고 서울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들과 함께 지냈지만, 난 결코 '서울놈'이 될 수 없었다. 역시 '촌놈'일뿐이었다.

서울사람들의 약삭빠름을 따라가지 못해 종종 뒤통수를 맞곤 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경우라고 생각했다. 순진한 농촌 총각이 서울에 와서 깍쟁이 같은 도시 여자에게 된통 당했을 뿐이라고.

고윤희는 그날 밤 끊임없이 날 원했다. 난 끝까지 거절했다. 내 몸은 고윤희를 안으라고 강렬하게 요구했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고윤희를 안으면 내가 너무 비참 해질 것 같아 두려웠다.
#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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