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나물로 아홉가지를 채웠다
김정아
사정이 이러니 안 할 수가 없었다. 검은콩, 강낭콩, 흰콩이 있었고, 팥도 있고, 기장도 있고, 찹쌀도 있고, 안 할 핑계를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부럼 삼아 호두와 땅콩만 좀 사 왔더니 보름 준비가 되고 말았다.
전날 밤, 남편에게 대보름을 다시금 소개를 해주고, 내일 하루 종일 9번 밥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껄껄 웃었다. 원래 오곡밥, 아홉 가지 나물을 하루동안 아홉 번에 걸쳐서 먹는 것이라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비비고 방에서 나오면, 벌써 나물과 오곡밥 다 지어놓으시고, 부스스한 우리에게 오곡밥을 퍼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물을 가짓수 맞춰서 꼭 만들던 것은 결국 어머니한테 온 것인데, 나중에 우리 딸도 이렇게 해 먹으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일요일인 대보름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서 게으른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9번 먹는 대신 3번만 먹자 했다. 어차피 아침은 안 먹으니까, 점심, 간식, 저녁 이렇게 먹자고...
전부 한주먹씩, 양은 얼마 안 되지만, 아홉 가지를 다 하려니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보니 남편이 돕지 않아도 되느냐고 계속 물어봤다. 그래서 김을 재서 구우라고 했다.
먹고 싶은 것 보다는, 한국인의 정서를 잊고 싶지 않은 것

▲ 오전 내내 종종거려서 겨우 한 접시 나오는 한식의 위용
김정아
이렇게 우리 집의 점심과 저녁은 같은 메뉴로 완성되었다. 종종거려 나물을 아홉 가지나 준비했는데 달랑 한 접시 나오는 상이라니! 백김치 썰고, 김 구워도 여전히 썰렁하니 남편 좋아하는 청국장 하나 끓여서 얹었다.
남편은 조심스레 하나씩 맛을 보며 차이를 느껴보려 애를 썼다. 일 년에 딱 한번 먹으니 매번 새로운 느낌인 것 같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고, 그렇게 해서 각기 다른 맛이 나는 아홉까지를 다 진열해 놓고 먹는 것은 그에게 상당히 이국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뭐가 제일 맛있냐는 말에, 하나를 딱 집어내지는 못했지만, 고유의 맛으로 각각 다 맛있다고 말했다. 오곡밥도 정말 속이 든든하다며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사실 서양인들이 먹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찰진 음식인데, 그래도 퍼준 밥을 남김없이 먹었다.
자기가 구운 김을 흐뭇해하며 싸 먹기도 하고, 백김치 잎으로 쌈으로 먹기도 했다. 아무렴, 복쌈을 먹어야지. 더위를 남편에게 팔기는 미안하니, 나한테 팔라고 가르쳐줬다. 나는 원래 더위 안 타는 사람이 좀 받아주자는 마음이었다.
사실 뭘 꼭 먹고 싶은 것보다는, 이걸 이렇게 요리조리 만들고, 함께 먹고, 함께 명절을 즐기는 것, 아마 그것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던 것 같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를 다시 느끼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남편도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흐뭇했던 것이고...
식사를 준비하는 중에 딸에게 전화가 왔길래, 보름이니 달 보고 빌라고 말해줬다. 딸은 음식 하는 소리가 맛있게 들린다며 메뉴를 묻는다. 미안해서 말 못 하겠다 했더니 막 웃는 딸. 미안하지 말라며, 맛있게 많이 드세요 하길래, 다음 방학 때 오면 꼭 해주마고 약속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자식이 꼭 걸린다.

▲ 한국 같으면 다양한 부럼도 한묶음 쉽게 살 수 있을텐데, 이 두가지로 만족하기로 했다
김정아
마지막에 달 보고 소원까지 빌어야 마무리가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 밤은 틀린 것 같다. 잔뜩 찌푸리더니 결국 비가 오네. 그래도 괜찮다. 부럼은 깨뜨렸으니... 흉내만 내는 명절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으니 좋다. 아마 내년에도 후년에도 갖은 엄살 다 부린 후에 또 한 상 차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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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거주하며, 많이 사랑하고, 때론 많이 무모한 황혼 청춘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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