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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면 사라지는 과장님, 상상도 못했습니다

동료 간의 소통 창구가 되어준 산... 어느덧 10명이 모였네요

등록 2023.03.13 11:38수정 2023.03.1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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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퍽한 직장 생활에도 찾아보면 소소한 재미 거리가 분명 있다. 퇴사가 열풍이 되어버린 요즘, 어쩌면 그 재미 거리가 계속 회사를 다닐 큰 힘이 되어줄지 모른다. 여기에 18년 차 직장인의 재미를 전격 공개한다. [기자말]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모든 신경은 핸드폰 카톡으로 향했다. 드디어 카톡 알람이 울렸다.

"오늘 출동하십니까."


그 한마디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하는 분도 있었다. 평소엔 산에만 다녀오는데 이날은 2월 마지막 주라 특별히 라면 회동이 있었다. 보온병 담당을 맡았던 나는 전날 미리 세 개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회사에 일하러 가는지 산에 가기 위해 가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출근 후 점심시간이 되자 가방 안에 보온병을 챙기고, 컵라면 두 개를 넣었다. 특별히 옆자리 후배도 참석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신발을 갈아신고 회사 뒤편으로 나섰다. 이미 그곳엔 산에 갈 동료들이 나와 있었다. 얼굴에서 봄의 설렘이 느껴졌다.
 
봄 기운이 완연한 산 봄 기운이 완연한 산 길을 동료와 함께 오르다.
봄 기운이 완연한 산봄 기운이 완연한 산 길을 동료와 함께 오르다.신재호
 
간단히 점심 식사도 해야 했기에 가장 가까운 폭포 코스로 잡았다. 왕복 1시간이면 충분했다. 천천히 길을 따라나섰다. 이때부터 우리는 회사에서의 무거운 옷을 벗고 편한 마음으로 일상을 나눈다.

"저는 어제 산에 갈 생각에 잠을 다 설쳤습니다."
"저도요. 이건 뭐 어릴 때 소풍 가는 것보다도 더 좋네요."


이제 막 점심 산행에 동참한 두 직원은 아이처럼 설레 보였다. 그들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밝음이 전염되었다. 나 역시도 오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골치 아픈 보고서에서 잠시 벗어나 해방감을 느꼈다.

산은 여전히 겨울 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조금씩 봄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느 정도 오르니 눈앞에 녹색의 푸르름이 펼쳐졌다. 다들 멈춰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혔다.


점심시간에 산에 가다
 
점심 산행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다 매월 말이면 컵라면과 김밥을 챙겨서 산에 가서 먹는다.
점심 산행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다매월 말이면 컵라면과 김밥을 챙겨서 산에 가서 먹는다.신재호
 
폭포에 다다라서 바로 아래 넓적한 바위에 둘러앉았다. 가방을 열어 보온병과 라면을 꺼냈다. 물을 담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 중 가장 연배가 있는 김 과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처음 온 직원이 있어서 소개를 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점심에 산에 간 지 반년 정도가 되었거든요. 원래는 구내식당에서 일찍 점심을 먹고 와서 의자에서 낮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와 혈압도 지나치게 높고, 고지혈증까지 있어서 의사 선생님이 이대로 가다간 큰일 난다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말에 받은 건강검진에서는 수치가 모두 낮아서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총각 차 과장님도 말을 이었다. 점심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거의 매번 참여하고 있었다.


"저는 이제 한 달 된 초짜입니다. 여기 꾸준히 다닌 분들 모두 존경스럽네요. 거두절미하고 살기 위해 왔네요. 본사 발령 나고 매일 야근에 저녁엔 폭식했더니 살이 5kg이나 찐 거 있죠. 그래서 산에 가기 시작했는데 아직 살은 빠지지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한결 가볍습니다. 이번에 열심히 참여해서 살도 빼고, 장가도 가야겠습니다. 하하."

넉살 좋은 그의 말에 우리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라면이 다 익었다. 일회용 젓가락을 꺼내 면을 돌돌 말아 입에 쏙 넣었다. 입가에 맴도는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었다. 하긴 산에서 먹으면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다들 호호 불며 라면 먹기에 집중했다. 홍일점 이 과장님이 준비한 김밥도 함께 했다. 돌아가면서 한 마디를 했고, 우리 중에 유일한 30대이자 오늘 처음 참여한 박 대리가 말을 꺼냈다.

"오래간만에 운동했더니 다리가 뻐근하네요. 그래도 정말 좋네요. 옆자리에 있는 신 과장님이 점심 때만 되면 사라지길래 궁금했는데 산에 가셨더라고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부담도 되어 망설였는데 용기 내서 와 봤습니다. 최근에 발령 나고 아직 일도 서툴고, 적응이 잘 안 되어 답답했거든요. 이렇게 산에 와서 탁 트인 전경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니 살 것 같아요. 앞으로 막내로서 열심히 참여하겠습니다."

걷기만 해도 힘이 나는 산
 
녹음이 우거진 산 점심 산행에서 만난 녹음이 우거진 산
녹음이 우거진 산점심 산행에서 만난 녹음이 우거진 산신재호
    
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다. 후배 얼굴에 활짝 핀 미소 꽃을 바라보며 마음이 놓였다. 부서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박 대리는 초반에 밝은 모습과 달리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하긴 업무량이 많기로 소문난 곳에서 처음 근무하는 박 대리가 고전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느 순간 혼자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이길래 내가 먼저 산에 가자고 권했다. 처음엔 망설이더니 참여하는 직원 모두 부서도 다르고, 크게 연관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용기를 냈다.

사실 나 역시도 처음 점심 산행 가기로 한 이유는 선배의 권유였다. 처음 부서에 발령 나서 전에 해보지 않은 낯선 일에 무척 힘들었었다. 무엇보다도 무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땅끝까지 내려갔다.

밥맛도 없던 차에 점심때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회사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나니 힘이 났다. 그때부터 혼자 걷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옆 부서에 얼굴만 알던 선배가 다가와 점심때 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 어색할까 망설였지만, 평소 산을 좋아했기에 따라나섰다.

산에 가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사무실에서 말하기 힘든 고충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선배도 선배 나름의 고충을, 나도 내 나름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고된 회사 생활을 이겨냈다. 어느 순간 점심 때가 다가오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체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 활력을 다시 찾았다. 주변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인지했다.

1년 전 선배는 다른 곳으로 발령 나서 떠났다. 이제는 선배의 빈자리를 내가 채우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 둘 함께 하는 사람이 늘었고 고정적으로 참여하는 직원만 10명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개발한 코스도 다섯 개나 되어서 요일별로 새로운 곳을 가는 재미가 있었다.

어느덧 본사 근무도 3년이 넘었다. 주변에 힘들어 보이거나 어려움이 느껴지는 직원이 있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산에 가자고 권유했다. 다들 처음에 망설이지만 가고 나면 그 맛에 중독되어 계속 가게 되었다. 물론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있지만, 그건 이제 살 만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점심 산행의 철칙이 하나 있었으니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기였다. 개중에는 산행을 발판으로 따로 마음 맞는 사람과 가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땐 마치 독립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남은 쓰레기를 봉지에 담았다. 시간이 남아서 폭포까지 가서 시원한 물줄기를 눈에 담았다. 박 대리는 카메라를 꺼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점심 산행이 동호회로 이어지다

내려오는 길에 차 과장님이 새로운 계획을 전했다. 인원이 열 명이 되었으니 사내 동호회 최소 기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제안서를 작성해서 3월에 있는 신규 동호회 모집에 지원해 보겠다고 했다. 정식 동아리가 되면 지원금도 쏠쏠해서 간단한 등산용품도 살 수 있었다. 기존에 산악 동호회는 있어서 고민하다가 불쑥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우리가 관악산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관악산 탐험대는 어떨까요. 혹여나 길 잃을 만한 곳이 있으면 노란 띠도 묶고, 새로운 코스도 개발해서 나중에 사람들한테 알리는 거예요." 
"관악산 탐험대? 입에 착 붙네요. 좋습니다!"


모두가 동의해서 우리 동호회 이름은 관악산 탐험대로 정했다. 차 과장님의 기획 실력을 믿고 정식 동호회가 될 날을 기대해 보아야겠다. 날이 유난히 맑았다. 산 기운을 가득 받아서인지 사무실에 들어가는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1시간의 짧은 점심시간이지만, 하루를 살아내는 힘을 오롯이 받고 있다. 언젠가 퇴직을 앞둔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지나고 보니 회사에서 일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료들과 즐겁게 지낸 추억은 가슴에 남아 있다고.

나 역시도 언젠가 다른 곳으로 발령 나서 떠나겠지만 함께 산에 가며 나눈 오늘의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 한편에 묻어 둘 것이다.
     
점심 산행에서 만난 녹음이 우거진 산 점심 산행에서 만난 탁 트인 전경. 속이 다 뚫린다.
점심 산행에서 만난 녹음이 우거진 산점심 산행에서 만난 탁 트인 전경. 속이 다 뚫린다.신재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
##직장생활 ##점신 ##산행 ##동호회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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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상이 제 손을 빌어 찬란하게 변하는 순간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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