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4 20:14최종 업데이트 21.04.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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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16일 오전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오른 안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한 459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침몰했다. 2014.4.16해양경찰청 제공
 
신승희, 박지영, 최덕하, 최혜정.

2014년 4월 16일 그들이 죽었다.
 
안녕~ 오늘 제주도로 가는 승희예요. 내가 수학여행 가는 것 땜에 일주일간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승희 비위 맞추려고 애쓰고 챙겨줘서 정말정말 고마워요…. 재밌게 놀다 올 테니 혹시나 전화 없다고 걱정하거나 서운해하지마~♡ 3박4일 재밌게 놀다 올게! 그리고 갔다 오면 열공빡공 해야지. 나 없을 동안 셋이 재밌게 보내. 사랑해.
- 승희가(2014.4.15)

단원고 2학년 3반 고 신승희는 평소 부모에게 편지 쓰기를 좋아했다. 신승희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에도 부모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나왔다. 그는 편지에 '나 없는 동안 셋이 재밌게 보내'라고 썼다. 신승희의 어머니는 이 편지를 읽을 때 "승희 없는 동안"이 이렇게 길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

세월호 기울다

2014년 4월 15일 325명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은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날은 고교 시절 단 한 번뿐인 수학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이들이 타기로 한 여객선 세월호는 당초 오후 6시 30분 제주도를 향해 출발하기로 돼 있었지만, 안개가 심해 계속 출항이 지연됐다. 오후 9시께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세월호는 인천항을 떠났다.

세월호에는 단원고 학생과 교사 외에 일반 여행객과 승무원 등 총 476명이 탔다. 단원고 학생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온 탓에 교복 차림이 많았다. 배가 출항하자 학생들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학생들은 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밤 10시 무렵에는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옥상 갑판으로 올라가 조용한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올려다보며 학업과 일상에 지친 마음을 잠시나마 달랬다.
 
2016년 4월 15일 세월호에 승선하는 단원고 학생들. 희생된 학생들의 휴대폰을 포렌식 해서 나온 사진 중 하나다.윤솔지
 
4월 16일 아침이 밝았다. 학생들은 오전 7시 30분부터 아침 식사를 한 뒤 간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아이들은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으며 수다를 떨었고, 모자란 잠을 더 청하기도 했다.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물살이 거센 곳으로 손꼽히는 맹골수도를 빠져나간 뒤 항해사가 항로 변경을 시도했을 때였다.


8시 49분 갑자기 배가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쾅!' 하며 무언가 끼리 부딪히는 소리도 났다. 갑작스럽게 배가 쏠린 탓에 별안간 배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객실에서 짐과 사람이 함께 왼쪽으로 굴렀다. 소파, 자판기, 냉장고 등 큰 물건이 쓰러지며 그 밑에 사람이 깔렸다. 이 과정에서 무언가에 부딪혀 피를 흘리거나 골절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관련 자료]
4월 16일 세월호 죽은 자의 기록 산 자의 증언 중 '시간의 재구성'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ewoltimeline01.aspx)

'우왕좌왕' 골든타임 허비

사고 소식이 처음 전남소방본부에 전달된 것은 8시 52분이었다. 단원고 2학년 6반 고 최덕하 학생의 신고 전화에 의해서다. 최덕하가 119에 전화해 처음으로 한 말은 "살려 주세요"였다. 이어 그는 배가 침몰하는 것 같고, 배 이름은 세월호라는 것까지 소방본부에 전달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소방본부는 목포해경을 전화에 연결해 삼자 통화를 시도했다.
 
소방본부 : 신고자분 지금 해양경찰 나왔습니다. 바로 지금 통화 좀 하세요.
해경 : 여보세요. 목포 해양경찰입니다. 위치 말해주세요.
최덕하 : 네?
해경 : 위치. 경위(경도와 위도)도 말해주세요.
최덕하 : 네?
소방본부 : 경위도는 아니고요. 배 탑승하신 분. 배 탑승하신 분.
최덕하 : 핸드폰이요?
해경 : 여보세요. 여기 목포해경 상황실입니다. 지금 침몰 중이라는데 배 위치 말해주세요. 배 위치 지금 배가 어디 있습니까?
최덕하 : 위치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이곳….
해경 : 위치를 모르신다고요? 거기 GPS 경위도 안 나오나요. 경도하고 위도!
최덕하 : 여기 섬이 이렇게 보이긴 하는데.
해경 : 네?
최덕하 : 그걸 잘 모르겠어요.

소방본부가 신고자의 신원이 탑승자라고 말해줬음에도 불구하고 해경은 신고자를 선원으로 전제한 듯 최덕하를 상대로 경도와 위도를 묻는 말을 반복했다. 최덕하는 가장 먼저 사고를 알려 구조 작업 착수에 도움을 줬지만, 정작 자신은 구출되지 못하고 4월 23일 세월호 4층 선미 부분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최덕하의 첫 신고로부터 3분여가 지난 8시 55분 세월호도 제주VTS(해상교통관제센터)로 첫 구조 요청 신호를 보냈다. 당시 세월호가 멈춘 지점의 관할은 진도VTS였으나, 일등항해사 강원식은 당황하여 보다 멀리 떨어진 제주VTS에 연락했다. 이로 인해 가장 먼저 사고를 파악하고 해경 등에 구조 요청을 취해야 했을 진도VTS는 9시 7분이 되어서야 세월호와 첫 교신을 시작했다. 이때는 이미 목표해경 소속 경비정인 123정이 사고 지점을 향해 출동한 뒤였다. 곧이어 9시 10분 항공구조사 2명을 태운 목포 헬기(B-511)가 출발했다.
 
16일 오전 안산 단원고 수학여행 학생과 여행객 등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가운데 긴급 출동한 해경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2014.4.16해양경찰청 제공
 
9시 30분경 123정과 헬기 모두 세월호 근처에 도착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40~45도가량 기울어진 세월호를 보며 당연히 승객들이 바다로 뛰어내리거나 갑판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외관상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B-511 항공 구조사 박훈식
"저희가 생각할 때 당연히 밖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밖에 나와서 저희가 오기 전에 구조를 요하는 자세를 취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도착했을 때 전혀 그런 장면이 없어 당황했습니다."
"만약 선내에 다수 승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분명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내 진입을 시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선원 재판 8차, 증인 신문, 2014.8.13.)

- 123정 정장 김경일
"승객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퇴선 위치에 집결해 있거나 구명벌을 투하해서 해상에 다 내려와 있을 것이라고 가상하고 갔는데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너무 당황했습니다…저희들이 퇴선 방송을 했어야 되는데 퇴선 방송을 하지 못했습니다."(선원 재판 8차, 증인 신문, 2014.8.13.)

- 123정 해경 경사 이형래
"해상 사고가 발생하면 특히 이렇게 많은 인원이 승선해 있는 배이고 배가 저 정도로 기울었다면 기다리지 못하고 탈출을 하거나, 구명벌을 이용해서라도 해상에 뛰어들거나, 외부 갑판에 탈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선원 재판 10차, 증인 신문, 2014.8.20.)

구조대가 '출동'에만 몰두한 결과였다. 이들은 침몰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는 물론 선내에 승객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출동했다. 관련 정보가 없으니 상황에 맞는 구조 계획 또한 신속히 세울 수 없었을 테다. 구조 인력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는 20~30분 동안 세월호, 진도VTS, 해경 상황실, 구조대 간 의사소통이 모두 원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구조대는 바다에 뛰어들거나 우현 갑판으로 나오는 등 밖으로 탈출한 사람들만을 구조하는 데 그쳤다. 모두 우왕좌왕 당황한 사이 9시 54분 세월호는 64도 이상 기울며 좌현이 완전히 침수됐다.
 

"가만히 대기하라"

신승희가 선내에서 나오지 못한 이유가 있다.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대기하라"는 내용의 안내방송 때문이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은 사고가 발생한 지 한 시간가량이 지난 9시 50분까지도 반복됐다.
 
아빠 : 승희야 밖에 난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안에는 위험해
신승희 : 안 돼. 너무 심하게 기울어서 움직일 수가 없어. 더 위험해 움직이면
아빠 : 구조 중인 거 알지만 가능하면 밖으로 나와서
신승희 : 아니 아빠 지금 걸어갈 수 없어. 복도에 애들 다 있어서 그리고 너무 기울어져서
아빠 : 가능하면 빨리 구조돼야 해. 가라앉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내려간다고
승희 : 구조될 거야 꼭. 지금은 한 명 움직이면 다 움직여서 절대 안 돼

10시 무렵 신승희가 아버지와 주고받은 문자에 따르면 신승희는 가만히 있어야 안전하다는 안내방송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를 승에, 기쁠 희. 부모는 승희의 삶에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많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이름 지었다. 사고가 있기 전까지 승희 삶은 꼭 그랬다. 한 살 많은 언니가 있는 막내딸 신승희는 늘 활기찬 아이였다. 단원고에서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나중에 세무 공무원이 되는 게 꿈인 신승희는 부모에게 참 착한 아이였다. 그는 안산시에서 한 학교에 한 명씩 주는 성적우수 장학금으로 수학여행 며칠 전 부모에게 결혼 기념 여행을 보내드렸다. 안내방송을 충실히 따른 신승희는 4월 22일 주검으로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부 세월호 현장수습본부가 8일 공개한 세월호 선수쪽 A데크 내부 사진. 선실 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고, 천장 내부 배관 등이 어지럽게 매달려 있다.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우현, 바닥처럼 보이는 부분이 A데크 천장이다. 현장수습본부 공개 사진은 어두운 부분이 잘 식별되지 않아 암부 노출값 등을 보정했다. 2017.4.8세월호 현장수습본부
 
사고 발생 후 3층 안내데스크로 승객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하지만 안내데스크의 여객부 승무원들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조타실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다. 승무원 고 박지영이 계속해서 조타실로 무전을 쳤지만, 조타실은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또 다른 승무원 강혜성은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위험하니 가만히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조타실로부터 계속 지시가 없어 이들은 기다리라는 안내방송을 반복할 뿐이었다.

승객 대부분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안내방송에 착실히 따랐다. 단원고 학생들은 대부분 4층에 머물고 있었다.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4층 선실과 통로에 앉아서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배가 자꾸 기울어져 갔지만, 아이들은 어른을 믿었다.

이렇게 아까운 시간이 흘러갈 때 선장 이준석을 비롯한 선원들은 승객을 어떻게 탈출시킬지 염두에 두지 않고 "배가 기울어 움직일 수가 없다"라는 내용의 구조 요청만 반복했다. 9시 24~25분께 근처에 있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의 구조 기회도 놓쳐버렸다.
 
세월호 : 예, 저기 본선에 승객들을 탈출시키면 옆에서 구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둘라에이스호 : 라이프링이라도, 그 저 하여간 착용을 시켜서 탈출시키십시오.
세월호 : 지금 탈출을 시키면 구조가 바로 되겠습니까?
둘라에이스호 : 맨몸으로 하지 마시고, 라이프링이라도 그 하여간 착용을 시켜서 탈출을 시키십시오. 빨리!
진도VTS : 세월호, 진도연안VTS입니다. 지금 저희가 그쪽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저 선장님께서, 세월호 선장님께서 최종적으로 판단을 하셔 갖고 지금 승객 탈출을 시킬지 최대한 지금 빨리 결정을 해주십시오.
세월호 :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 바로 구조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인근 선박이 구조에 도움을 주겠다는데도 세월호(조타수 중 한 명인 박경남)는 "탈출하면 바로 구조가 되느냐"는 똑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진도VTS는 "선장이 결정하라"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둘라에이스호 선장 문예식에 따르면 당시 둘라에이스호는 세월호에 탄 인원 전부를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어쩌면 많은 승객을 구할 수 있었던 순간에 누구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정작 선원들은 구조대가 도착하자 재빠르게 탈출했다. 9시 38분경 기관부 선원 7명이 승객을 내버려 둔 채 123정을 타고 세월호를 탈출했다. 지켜보던 조타실 선원들과 선장 이준석도 곧이어 9시 46분 세월호를 탈출했다.
 
'속옷 차림' 탈출, 이준석 세월호 선장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목포해경 소속 경비정 123정(100t급)의 한 직원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이 영상에는 승무원들이 제복을 벗고 123정에 허겁지겁 오르는 장면이 담겨 있다. 심지어 이준석 선장은 속옷 차림으로 세월호를 떠나 123정에 오르기도 했다. 뒤편에는 123정에 타고 있던 이형래 경사가 심하게 기운 갑판에 올라 구명벌을 펼치려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해경 영상 갈무리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게"

도망간 선원과 달리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끝까지 남을 먼저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4층까지 물이 들이닥치자 여객부 승무원 박지영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 배 밖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박지영은 수영을 할 줄 모르면서도 학생들을 챙기느라 구명조끼를 입지 못했다.

당시 구조된 한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학생이 박지영에게 "언니는요?"라고 묻자 박지영은 "너희들 다 구하고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지영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당시 박지영은 고작 22살의 대학생이었다. 대학에 다니던 중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휴학하고 세월호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사고를 당했다.

단원고 교사들도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2학년 9반 담임 교사 최혜정은 침몰 당시 탈출하기 가장 쉬운 5층 객실에 있었지만, 아이들을 구하려고 4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2학년 1반 담임 교사 유니나도 마찬가지로 5층에 있었지만 "3층에 아이들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 밑으로 몸을 던졌다.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였다. 두 교사를 비롯해 세월호에서 숨진 단원고 교사는 11명이다. 이들은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탈출시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단원고 희생 교사 추모 교무실의 고 최혜정 선생님의 자리에 많은 꽃들이 놓여 있다. 2016.4.16이희훈
 
친구를 위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든 학생도 있다. 2학년 4반 정차웅은 배가 침몰하는 순간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넨 뒤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정차웅은 당일 발견돼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숨졌다. 단원고 학생 가운데 발생한 첫 희생자였다.

10시 17분 세월호는 108.1도로 전복됐다. 곧이어 우현까지 물에 잠기려는 찰나 우현 쪽 난간에서 40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마지막 탈출이었다. 이들이 탈출한 뒤 세월호는 순식간에 침몰했다. 10시 30분경 아직 300여 명의 승객이 남아있는 채로 세월호는 선수만 남기고 완전히 가라앉았다.

참사 그 후

세월호 침몰로 총 탑승 인원 476명 가운데 304명이 실종·사망했다. 가장 많은 인원이 탑승한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운데 특별히 어린 학생이 많았다는 사실에 전 국민이 애통해했다. 배를 버리고 탈출한 선장과 선원의 무책임한 행동과 해경 등 구조대의 미온적인 대처는 공분을 샀다.

참사 이후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청해진해운, 진도·제주VTS, 해경 상황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침몰 원인과 책임 규명 등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2014년 5월 선장 이준석 등 선원 15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은 2015년 11월 12일 이준석에 대해 "승객들이 익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견하면서도 퇴선 조치를 하지 않고 탈출한 건 살인행위와 같다"며 무기징역을, 나머지 선원 14명의 유기치사죄 등 혐의에 대해서도 징역 1년 6개월~12년을 확정했다. 같은 달 27일 부실구조 혐의로 기소된 123정장 김경일도 징역 3년을 확정 받았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2015.1.1~2016.9.30),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2017.7.7~2018.8.6)에 이어 2018년부터 사회적 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침몰 원인, 구조 방기 등 여러 의혹에 대한 규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2019년 11월에는 검찰 특별수사단이 꾸려져 세월호 의혹을 전면 재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약 7년에 걸친 수차례의 진상규명 활동에도 의혹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2014년 7월 어느 뜨거운 여름날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필자 중 이혜원은 단원고 희생자 유가족들의 도보 순례에 동참한 적이 있다. 고 김웅기 학생의 아버지 김학일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하염없이 걸었다. 햇볕에 검게 그은 얼굴 위로 땀을 쏟으며 묵묵히 걸어가던 그 아버지 모습이 아직 가슴 속 깊이 남아있다. 그가 평생 그 십자가를 내려놓지 못할 것이라고, 이혜원은 그때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사진 좌측)씨와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사진 우측)씨가 나란히 걷고 있다. 김종술

 

- 이혜원 :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4학년 재학. 아픈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두렵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항상 진실과 정의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 안치용 :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오준호, "세월호를 기록하다 침몰·구조·출항·선원, 150일간의 세월호 재판 기록", 미지북스, 2015년 4월 10일(초판 2쇄)
2. 4월 16일, 세월호 죽은 자의 기록 산 자의 증언(오마이뉴스), 사건의 재구성Ⅰ,Ⅱ
3. 세월호 72시간의 기록(다음)
4. 사월, 哀-세월호 최초 100시간의 기록(한겨레)
5.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1월 11일 생일인 3반 신승희를 기억합니다", 2021년 1월 11일
6.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12월 6일 생일인 4반 정차웅을 기억합니다", 2020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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