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3시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이마트 탄현점 앞에서 고 황승원군 등 사고 희생자 유가족들과 서울시립대 학생들이 신세계 이마트쪽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열고 있다. 2011.7.10
김시연
죽어서도…
제대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나설 만큼 절박했던 황승원의 시련은 죽어서도 계속되었다. 원청업체인 트레인코리아와 이마트는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이마트는 "우리는 냉방 설비를 구입했을 뿐이고, 고장이 나서 애프터서비스를 신청했을 뿐"이라고 했다. 트레인코리아는 미국 본사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면서도 사고가 작업 중 과실로 일어났다며 하청업체 오륜이엔지에 책임을 전가했다.
그사이 황승원의 장례는 40여 일이나 지연됐다. 사고의 책임 소재를 가려줄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유족, 이마트, 트레인코리아 사이에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탓이었다. 사고의 진상규명과 이마트 등 관련 기업의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하며 발인을 미룬 유족들은 결국 기다리다 못해 장례를 치렀다.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서고 국회의원들이 진상규명과 책임 보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시간을 오래 끈 경찰은 보잘것없는 결론을 내놓았다. 사건을 담당한 경기도 일산경찰서는 황승원의 발인이 있기 3일 전, 트레인코리아의 안전관리자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하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수사 결과 현장의 작업환경 관리 책임은 트레인코리아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며 "하청업체이자 황씨가 소속돼 있던 냉동설비 보수업체 '오륜이엔지'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적용되지만, 대표가 사망해 공소권이 없다"고 밝혔다.
열악한 기계실 작업 환경에 대해 이마트에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환기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창문만이라도 활짝 열 수 있었다면 인부들이 질식사하지 않지 않았겠냐는 의문에는 답이 없었다.
이마트는 처벌을 피해 갔다. 다만 고용노동부가 이마트에 특별감독을 실시해 다른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탄현점 지점장과 이마트 법인에 각각 1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한 게 전부다.
황승원이 죽고 1주일이 지나지 않은 2011년 7월 8일 서울시립대는 황승원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죽어서야 그렇게 원하던 대학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아마 황승원은 대학만 졸업하면, 괜찮은 직장을 얻어 어머니를 호강시키고 여동생을 넉넉하게 공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터다. 날마다 지하실 작업장으로 내려가면서 그런 희망을 품었을 터다. 그는 어머니에게 "나이를 먹으면 자식이 자존심"이라며 "5년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22살 황승원에게는 그 5년이 허락되지 않았다.
구의역에서 진 또 하나의 청춘
황승원이 죽고 5년이 지난 2016년 5월 28일 또 다른 비정규직(파견노동) 청년 노동자 김군이 죽었다. 이날 오후 4시 58분에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스크린도어가 오작동했다. 1분 뒤 서울메트로 본부에 있는 전자 운영실이 외주업체인 은성PSD에 수리를 요청했다.
김군은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체인 은성PSD 소속 비정규직 근로자였다. 연락을 받은 김군은 오후 5시 52분 승강장에 도착했다. 그는 스크린도어를 열고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차단벽의 선로 쪽 좁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김군을 보지 못한 듯 열차는 그대로 승강장으로 진입했다. 김군은 들어오는 열차와 차단벽 사이에 끼여 숨졌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김군은 만 20세 생일 하루 전날 사망했다. 가족이 모여 생일을 축하해주기로 했다. 그는 특성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15년 10월에 은성PSD에 실습생 신분으로 취직했고 이듬해 봄에 직원이 되었다.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친구들보다 취직이 늦어 마음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입사가 결정되자 기뻐한, 평범한 청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대학에 진학하려는 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접 받고 살 수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고 한 달에 100만 원을 적금에 쏟았다. 144만 원의 월급에서 적금과 기본 생활비를 빼면 남은 돈은 30만 원 안팎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였지만 김군은 많지 않은 용돈 중 일부를 동생에게 건네는 책임감 강한 맏이였다.
김군은 늘 '파김치'가 되어 퇴근했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게 낫겠다며 먼지 범벅이 된 채 씻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사 온 빵과 우유는 비닐봉지에 든 그대로 잠든 김군 근처에 놓여 있기 일쑤였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군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직장생활은 원래 다 힘든 거지? 3개월 지나면 더 괜찮아지고, 1년 지나면 더 괜찮아지는 거지?" 어머니는 괜찮아질 거라고 대답한 걸 후회했다.
5월 28일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된 날이었다. 서울메트로와 은성PSD가 맺은 계약에 따르면 은성PSD는 고장 신고 접수 1시간 이내에 사고 현장에 도착해야 했다. 1시간 안에 도착해서 해당 역무원에게 '작업확인서 사인'을 받지 못하면 회사가 배상금을 물었다. 따라서 은성PSD 직원은 오후 5시 58분까지 구의역 현장에 도착해야 했다. 당시 작업이 가능한 정비직원은 김군뿐이었다. 작업지시를 받은 김군은 혼자서 고장 현장에 출동했다.
그사이 오후 5시 20분, 을지로4가역에서 또 다른 스크린도어 고장 신고가 들어왔다. 김군은 구의역 수리를 마친 후에, 시간제한 규정에 따라 6시 20분까지 을지로4가역에 도착해야 했다. 안전 수칙에 따르면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은 2인 1조로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구의역에서 을지로4가역까지 지하철로 약 20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직원을 기다렸다 작업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 결국 김군은 혼자 수리를 진행했다.
5시 54분에 김군은 94지점 스크린도어를 수동 개방한 다음 장애물 검지 센서 청소작업을 하였다. 당시 장애물 검지 센서는 적외선 센서로, 스크린도어 뒤쪽 양옆 차단벽에 달려있었다. 따라서 고장이 나면 스크린도어를 개방한 다음 승강장에서 선로 쪽으로 몸을 내밀고 수리해야 했다. 김군이 그렇게 수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제2350 열차가 구의역에 진입했다. 55분, 김군은 진입하던 열차와 스크린도어 옆의 차단벽 사이에 끼여 숨졌다.
수리하던 구의역 94지점 스크린도어 뒤쪽에서 김군이 꼼짝없이 생을 마감하고, 그 앞에는 김군의 공구 가방이 덜렁 남겨졌다. 가방 안에는 기름때 묻은 장갑과 마스크, 스패너와 드라이버 따위의 공구 등과 포장을 뜯지 않은 농심 육개장 사발면 한 개와 나무젓가락이 들어 있었다. 짬이 날 때 먹으려고 공구 가방 안에 넣어둔 육개장 사발면은 포장을 뜯지 못한 채로 그대로 김군의 유품이 되었다. 김군의 어머니는 "컵라면(육개장 사발면)이라도 배불리 먹고 갔으면 한이라도 없지"라며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