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30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인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사저 앞에서 열린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다음에 혹시 여러분들이 정치인들 오면 선거를 하실 때에는 절대 악수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인물에도 휘둘리지 마시고요. 인물, 악수 다 제쳐 놓고 정책을 물어보십시오. 정책이 보통사람의 정책이냐. 보통사람을 위한 정책이냐. 부자를 위한 정책이냐. 꼭 좀 물어보세요."
누가 한 말일까. 정치인을 싫어하는 어떤 교수가 한 말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생전에 봉하의 자택으로 찾아온 시민들과 만남을 갖는 가운데 한 말이다. 퇴임한 대통령이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당연한 이야기를 내뱉은 게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중에 대한민국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려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모색했으며, 답을 찾은 다음에는 그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임기 말까지 분투한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장기 국정과제를 다루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활용했는지는 최근 이정우 교수(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가 <한겨레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참여정부 천일야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정우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노 대통령은 밑에서 다 결정된 것을 최종 추인하는 국무회의를 총리에게 맡기고 장기 결석하는 한편, 토론이 있는 국정과제 회의를 좋아해 64회나 참석해 중요한 결정을 해나갔다. 동북아 경제 중심, 균형발전, 신행정수도, 전자정부, 정부 혁신, 보육 확대, 아동 빈곤 해소, 근로장려세제 등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이 모두 여기서 결정되고 실행에 옮겨졌다. 바야흐로 위원회의 전성시대였다(<한겨레신문> 2024년 3월 18일 자).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선물 보따리를 지역에 풀어놓느라 여념이 없는 국민의힘(국힘이라 약칭) 쪽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지만, 노무현의 후예를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어떨까(조국 대표는 3월 13일 <시민언론 민들레>와의 인터뷰에서 "(조국혁신당은) 한편으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이 유언처럼 말했던 진보의 미래, 즉 유러피언 드림을 계승하고 있고"라며 노무현의 후예임을 밝힌 바 있다). 대한민국호의 미래를 좌우할 정책 비전을 제시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곳저곳에서 국힘 식의 포퓰리즘 정책을 공약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정책공약을 제시하는 데는 무관심한 채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데 몰두하고 있을까.
윤석열 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워낙 나쁘고 펼치는 경제정책 또한 나라의 토대를 허무는 것들 일색이므로 야당이 공세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잘못 가는 정부 정책을 조금이나마 바로 잡아서 국민이 피해를 덜 보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대한민국호의 항로를 바르게 잡을 수 있는 정책 비전과 정책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가 아닌가이다. 이 문제의 중요성은 조국 대표도 여러 번 강조한 바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복안을 가지고 있으리라 기대할 만하다.
아직은 소박한 조국혁신당의 홈페이지
필자는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두 정당이 총선을 앞두고 어떤 정책공약을 발표했는지 살펴보았다. 우선, 조국혁신당의 홈페이지는 아직 무척 소박하다. 당헌과 강령을 소개하고 있을 뿐, 정책공약은 전혀 올려놓고 있지 않다. 조국 대표의 발언과 SNS 글을 통해 공약이라 할 만한 것들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당 차원에서 발표한 정책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신생 정당이라서 정책공약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국 대표의 개인기에만 의존해서 당 차원의 정책공약 마련을 게을리한다면, 조국혁신당의 바람도 순식간에 잦아들 수 있다.
단, 조국혁신당 홈페이지상의 강령을 보면, 대한민국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추상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검찰 개혁을 위해 행동한다', '지속가능한 성장과 민생경제의 회복을 위해 행동한다', '기획재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행동한다', '담대한 저출산 대책을 추진하기 위해 행동한다', '지방에 대한 재정 지출을 확대하여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행동한다', '과학정책은 과학자들이 주도하도록 하기 위해 행동한다', '평화공존의 남북관계를 확립하고, 분단극복과 평화번영을 위해 행동한다'). 이 8가지는 대한민국호의 미래를 좌우할 정책 비전에 해당하고 그 방향도 필자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 8가지가 매우 간략하고 추상적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방안을 담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조국혁신당은 8가지의 정책 비전을 실현할 대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서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민비조' 전술(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이나 비례대표 후보 선정보다도 더 중요할지 모른다.
'소확행'에 머문 더불어민주당의 총선공약
더불어민주당의 홈페이지는 조국혁신당보다 훨씬 풍성하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 실정을 그래프와 표를 활용하여 소상하게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선공약도 21가지나 발표했다. 월 3만 원 청년패스, 간병비 건강보험 적용, 온 동네 초등돌봄, 월 20만 원 대학교 기숙사 건설, 경로당 주 5일 점심 제공, 저출산 종합대책 마련,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원, 고금리 부담 완화, 주 4.5일제 도입, 소방관 보호, 농산물 가격안정제 도입 등 중산층과 서민층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알짜배기 정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내용이 괜찮고 실효성이 있는 공약을 21가지나 마련해 두고 있으니 신뢰가 갈 만한데, 어딘가 찝찝하다. 경제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이 공약들은 대부분 미시정책의 범주에 속한다. 21개 가운데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RE100 국가를 실현하겠다는 것 정도가 거시정책에 해당한다. 큰 그림 없이 소소한 공약만 내놓고 있으니, 더불어민주당이 과연 대한민국호를 어디로 이끌지가 명확하지 않다.
조세제도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지, '부동산공화국'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 갈수록 심해지는 불평등 문제와 지역 불균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재벌 체제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 여성·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의 처지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관료 사회의 무사 안일 분위기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등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과제가 존재함에도, 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정우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장기 국정과제에 해당하는데, 두 야당이 이를 소홀히 하면서 노무현의 후예를 자처할 수는 없다.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전략은 지난 대선에서의 '소확행' 공약 전략을 연상시킨다.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는 담대하고 굵직한 공약으로 승부를 걸기보다는 50여 개의 자잘한 공약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소확행 공약도 그중 하나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의 최대 과제는 국민 앞에 대한민국호의 미래 청사진을 대담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저항과 반대에 직면하고 그 때문에 잃는 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얻는 것은 그보다 더 많고 놀라울 테니, 그것은 바로 국민의 전폭적인 신뢰다. 2002년 대선에서 열세에 몰려서 패배가 기정사실화되었던 노무현 후보가 마지막에 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국민 다수가 노 후보야말로 정말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줄 인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국민의 신뢰는 그만큼 중요하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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