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15주기를 앞두고 19일 봉하마을 묘소에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윤성효
매년 5월 중순은 광주의 시간이고, 하순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시간이다. 내게는 노 대통령의 서거가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15주기다. 그동안 그를 기리는 사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그의 삶과 참여정부를 탐구한 책도 여러 권 나왔다. 국민의 평가도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에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로 훌륭한 대통령으로 크게 바뀌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진면목을 충분히 보여주는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에 노 대통령 15주기를 맞아 그간의 아쉬움을 해소하는 책이 나왔다.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의 <노무현과 함께한 1000일>(한겨레출판)이 바로 그것이다. 약 2년 반 동안 참여정부 정책의 방향타를 쥐고 있었던 핵심 인사의 회고록이라는 점만으로도 관심을 끌 만한데, 책 서술 방식이 특이해서 더 눈길을 끈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을 거의 망라하는 가운데 그 각각의 결정 과정을 날짜·시간·참석자·발언 등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책 내용을 서술한다. 거기에 자신의 평가와 소회를 담담하게 추가한다. 전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군데군데 비판적인 견해와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한다.
국내외에서 과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인사들의 회고록이 많이 나왔지만, 이 책처럼 소상하고도 생생하게 경험을 묘사한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떻게 이와 같은 서술이 가능했을까. 비밀은 이정우 교수가 청와대에서 일하는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썼다는 데 있다. 그의 일기는 하루를 간략하게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장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일종의 실록 같은 것이었다.
이정우 교수는 일기를 쓸 때 발언하는 인물의 토씨 하나까지 정확하게 적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록한 일기장이 10권이고, 그 외에 업무시간에 쓴 업무일지 노트가 20권 정도 더 있다고 한다. 스스로 작성한 방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마치 현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여러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었는지, 그 정책들에 대해 세상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그 반응들이 어떻게 피드백되었는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현대판 징비록'이요, 회고록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 이정우 교수가 묘사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 정책의 특징을 중요한 부분 위주로 소개해보자.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장기주의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상 최초의 장기주의 대통령이었다. "불경기 때문에 여론이 나쁜데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반짝 경기를 호전시킬 응급치료보다 근본적·장기적 경제정책에 관심을 두었다."(240쪽) 당시 습관처럼 부동산 경기부양책을 들고 오는 경제부총리가 있었으나 노 대통령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장 인기를 끌 단기 경기부양책을 마약 요법으로 여겼다.
참여정부 전에도 후에도 이런 대통령과 정치인은 없었다. 특히 여론조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모든 대통령과 대부분의 정치인은 마치 '지지율 집착증'에 걸린 듯 당장 인기를 끌 단기정책에 집착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말할 나위가 없고, 참여정부를 계승했다고 일컬어지는 문재인 정부조차 국가 장기과제를 제쳐두고 당장 지지율을 끌어올릴 단기정책을 펼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국가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중요한 정책이라도 저항을 초래하고 소란을 일으켜 지지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 같으면 외면했다.
이런 경향은 지난 대선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몇 년 동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기본소득 연계형 국토보유세' 정책을 사실상 포기한 채, 50여 개의 '소확행' 공약을 줄줄이 발표하며 여론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다. 기본소득 연계형 국토보유세가 저항과 소란을 유발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던 탓으로 짐작된다. 지난 총선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 장기과제에 해당하는 정책공약을 제시한 정당은 없었다(조국혁신당이 당 강령으로 그런 내용을 발표하기는 했으나 매우 추상적이어서 정책공약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국정과제위원회와 정부 부처가 종횡으로 엮이는 매트릭스 조직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장기과제를 제대로 만드는 것을 대통령의 최고 임무라고 믿고 거기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 일을 추진할 조직으로 12개의 국정과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들은 흔히 생각하는 자문위원회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정부조직의 울타리로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것이 통상의 자문위원회라면, 참여정부의 국정과제위원회는 실제로 중요한 정책을 만들어서 정부에 건네주었고 정부 부처는 그 정책들을 실행에 옮겼다.
대통령은 이미 밑에서 다 결정된 것을 최종 추인하는 국무회의를 총리에게 맡기고 국정과제위원회 회의에는 64회나 참석해 중요한 결정을 해나갔다고 한다. 동북아 경제 중심, 균형발전, 신행정수도, 전자정부, 정부 혁신, 보육 확대, 아동 빈곤 해소, 근로장려세제 등 참여정부의 중요 정책들이 바로 이들 위원회에서 결정되어 실행에 옮겨졌다. "12개의 위원회와 약 20개의 정부 부처가 종횡으로 엮이는 일종의 매트릭스 조직"(98쪽)을 만들어 국가 장기과제를 해결한다는 국정 운영 방식이었으니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