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 재판 당시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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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의 인품과 실력, 활약상은 많이 알려졌지만, 그와 함께 농지개혁안을 마련했던 인물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강정택과 강진국을 잠깐 소개하고자 한다.
강정택은 대구고보(현 경북중·고)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들도 들어가기 어려웠던 제일고, 도쿄제대를 졸업한 천재였다. 가난했던 그가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시부사와 에이이치와 그 손자 시부사와 게이조의 후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두 사람은 모두 일본 재계의 거물이었다. 특히 시부사와 게이조는 전전에는 도쿄저축은행 회장, 경성전기 대표, 일본은행 총재 등을 역임했으며, 전후에는 초대 대장성 대신을 맡아서 재벌개혁을 주도했다).
강정택은 1930년에 도쿄제대 농학부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결정에는 가난한 조국의 농촌을 살려내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1933년 도쿄제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바로 같은 학과 부수(副手)로 임명되어 연구를 계속했고 1939년에는 마침내 조수로 임명되었다(당시 일본 대학 조수란 오늘날 한국 대학의 전임 교수). 그는 부수 시절인 1935~1939년 자신의 고향인 울산 달리를 중심으로 행해진 농촌 위생 조사와 농촌생활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43년 3월 도쿄제대 조수직을 사임한 이후 조선으로 귀국했는데, 그때도 도쿄제대의 발령으로 3년간 '조선 농촌 경제사정에 관한 사항 조사' 프로젝트를 위탁받아 진행했다.
해방 후 강정택은 경성제대가 이름을 바꾼 서울대학교의 법문학부 경제학과 교수(농업정책 담당)로 임용되었다. '국대안 파동' 때문에 경제학과 교수 6명이 함께 퇴진하고 학과가 폐지되는 바람에 강정택의 서울대 교수직은 반년여 만에 끝이 났지만, 그가 당시 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농지개혁을 준비하던 시기에 한국의 농촌 현실에 대해 강정택만큼 밝은 사람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한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농업문제연구위원회 총책임위원을 맡기도 했고, 좌우합작위원회가 '합작 7원칙'을 마련할 때 토지개혁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강정택의 비범함을 알고 있던 조봉암은 한 달도 안 된 남봉순 차관서리를 퇴진시키고 그 자리에 강정택을 앉혀 농지개혁을 지휘하도록 했다. 처음 조봉암의 요청을 받았을 때 강정택은 강하게 고사하며 고향 울산으로 피신해버렸지만, 조봉암은 삼고초려 끝에 겨우 그를 농림부 차관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농지국장 강진국은 어떤 사람일까? 강진국은 부산 동래 출생으로 일본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의 농촌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투신했다. 1930년대에 사회개량주의 입장의 농촌문고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중간파 노선을 취했던 조선산업건설협의회에서 주요 실무를 담당했으며, 입법의원 산업노동위원회 산하 조선산업재건협회에서 상무를 맡아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유상매수·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중간파의 대안을 숙지하고 있었다.
강진국은 농지국장에 임명된 후 농지개혁 준비 작업으로 무려 두 달 동안 직접 농촌 현지를 돌며 농촌 상황을 파악하고 농민들의 여론을 청취했다. 이런 고된 작업을 거친 다음 강진국은 1949년 11월 자신의 집에서 세 과장과 함께 이틀 밤을 꼬박 새워 농지개혁법 초안을 만들었고, 그것을 다시 강정택 차관과 이틀 동안 재검토·수정했다.
농지개혁법 초안의 특징
1950년 2월에 최종 통과되는 농지개혁법의 초안(농림부안)은 강정택과 강진국의 주도 아래 작성되었다. 농림부안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농지의 몰수를 매수가 아니라 '징수'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농지를 제값을 주고 매수하지도, 무상으로 몰수하지도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유상매수·유상분배 방식과 무상몰수·무상분배 방식의 중간 입장을 채택한 것이다. 초대 농림부 농지개혁 팀은 제3의 방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둘째, 지주 보상액을 평년작 생산량의 150%(3년 거치 후 10년간 균분 보상)로 규정했다. 지주 보상액 수준의 결정은 농지개혁법 제정 과정에서 최대의 논란거리였다. 지주세력은 보상액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농민의 이해를 대변했던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은 이를 낮추기 위해 애를 썼다. 최종적으로 농지개혁법 개정 법률에서 확정된 지주 보상액은 농림부안과 동일한 150%였다. 지주세력이 포진하고 있던 국회 산업위원회는 처음 국회안을 만들 때는 지주 보상액을 300%로, 그리고 나중에 개정 법률안을 만들 때는 240%로 결정했다. 하지만 지주들의 이런 노력은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최종적으로 지주 보상액의 수준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혁신적 성향을 가진 국회 내 소장파 의원들의 활약 덕분이기도 했지만, 초대 농림부 농지개혁 팀이 만든 농림부안이 강력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지 가격이 일제 강점기에는 평년작 생산량의 500% 정도, 해방 후에는 300% 정도였음에 비추어, 평년작 생산량의 150%라는 수준은 보상 가격으로는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토지를 지주로부터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방식의 토지개혁에서 최대 난제는 토지 확보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초대 농림부 농지개혁 팀은 이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셋째, 농민의 지가 상환액은 더 낮추어서 120%(매년 20%씩 6년간 상환)로 하고 상환 기간 중에는 국세 등을 면제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다. 이 120% 조항은 1949년 6월 공포된 농지개혁법에서는 125%로 조정되었다가, 정부 재정 부담을 이유로 농지개혁법 개정 법률에서 150%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리고 상환 기간 중에 국세 등을 면제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던 조항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에 의해 제안되었지만 부결되고 말았다.
위에서 확인되는 농림부안의 친농민적·반지주적 성격은 실제 법률의 제정 과정에서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핵심은 살아남았고, 그 덕분에 단기간에 '대지주의 나라'를 '소농의 나라'로 변모시키는 엄청난 개혁이 저렴한 사회적 비용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성과를 내게 되는 농지개혁법의 성립에는 조봉암의 확고한 의지(그는 농림부장관을 그만둔 후에도 국회에서 소장파 의원들을 이끌며 지주층의 방해를 막아내고 제대로 된 개혁안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와 강정택·강진국의 뛰어난 현실인식·경험·능력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첨언할 것은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농지개혁의 주역 조봉암을 간첩 혐의를 씌워 사형시켜 버렸다는 점이다. 조봉암의 엄청난 기여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악행이었다(조봉암 사건에 대해서는 2011년 대법원 재심이 이뤄져서, 52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니 어떻게 농지개혁의 실질적인 공로를 이승만에게 돌릴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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