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1일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발간 기자회견에서 대표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한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뉴라이트로 지목한 인사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과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케인스의 예언을 떠올렸다. 8월 13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역사·역사교육 관련 기관 임원 중 최소 25개 자리를 뉴라이트 혹은 극우 성향 인사들이 차지했다고 한다. 실로 '역사전쟁'을 방불케 하는 전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광복회 및 독립운동 단체, 역사 관련 학회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친일적 행태를 중단할 것을 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윤석열 정부가 돌발적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행태의 배경에 뉴라이트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불장난이 아니라 한 사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해 추진하는 전략적 행위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지금까지 출몰한 뉴라이트 계열 단체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뉴라이트재단, 자유주의재단, 뉴라이트싱크넷, 한국현대사학회 등 다양하고 관련 인사들도 여럿이지만, 사상 면에서 핵심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필두로 한 '반일종족주의그룹'이다(<반일종족주의>는 이영훈, 김낙년, 주익종 등 6인이 2019년에 간행한 책으로, 국내에서 10만 권 이상, 일본어 번역서가 일본에서 4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듬해에 그들은 후속 작업으로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을 펴냈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 교과서포럼을 만들어 역사 교과서 개정 운동을 벌였고, 안병직, 이대근 등 그들의 스승 격인 인사들은 뉴라이트재단을 결성해 극우 성향의 정치 운동을 펼치면서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의 중심은 이영훈, 김낙년, 주익종 3인이다. 이들은 모두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제자로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함께 뉴라이트 사상을 연마했고, 특히 이영훈은 2016년 이승만학당을 설립하여 뉴라이트 사상 대중화와 이승만 띄우기에 몰두해 왔다. 주익종은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이영훈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승만학당은 설립 후 올해까지 매년 두 차례씩 3개월간 계속되는 오프라인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금까지 21기 교육을 마침으로써 최소 600명에게 면대면 뉴라이트 교육을 실시했다. 또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를 개설해 온라인 교육에도 열을 올렸는데 현재 구독자 수는 10만 5000명으로 적지 않은 숫자이고, 업로드한 동영상 수도 약 800개에 달한다.
케인스가 말한 '사상의 점진적 침투'를 위해 이보다 더 나은 전략이 있을까. 뉴라이트가 역사 관련 단체를 장악한 것은 물론이고 정권의 정책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이처럼 끈질긴 사상투쟁의 결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과거 행적과 언행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뉴라이트 본류에 속한 인물이 아니며 그가 하는 말 또한 독창적인 언사라고 보기 어렵다. 예컨대 그가 작년 12월에 했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진정한 광복"이라는 말은 이영훈의 오래된 건국절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해 제3자 변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강제동원이 명기되지 않음에도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허용한 것 등도 반일종족주의그룹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윤 정부는 식민지기의 강제동원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 변제책임을 지우면서 1965년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반일종족주의> 10장에서 주익종이 주장한 내용 그대로다. 사도광산 문제를 처리하면서 강제동원 명기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반일종족주의> 5~7장과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7, 8장의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다.
김형석보다 김낙년이 더 문제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