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의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지지자 파티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상승하던 미국 진보주의자들의 꿈이 현기증을 내며 추락해버렸다. 바이든의 걸출한 IRA(인플레감축법) 성취에 이어 카멀라 해리스를 도구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한 발 더 내딛는 꿈 말이다.
미국 유학 전에 진보적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을 읽으며 우파의 나라 미국이 언젠가는 진보주의로 일 보 전진하리라 희망하던 나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이제 데이비스와 내가 꿈꾸던 사회민주주의를 향한 일 보 전진은커녕 오히려 파시즘(라이트) 시대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군사작전은 한국 민주당이 아니라 미국 민주당의 악몽이 되어버렸다.
1930년대 지구적 대격변의 시기에도 미국은 유럽과 달리 파시즘 대신에 뉴딜 자유주의를 선택했다. 하지만 2024년 미국 유권자는 히틀러와 푸틴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후보를 주저 없이 선택했다.
도대체 미국과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아주 짧은 1차 연구노트를 통해 향후 체계적 분석을 위한 가설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후 출구조사보다 더 정확한 데이터를 가지고 분석해야겠지만 일단 이번 대선에서 음미해 볼 현상들을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전국 유권자와 경합주에서 모두 도널드 트럼프가 우위를 차지했다.(전국 득표율 트럼프 50.5%, 해리스 48.0%)
- 대졸 이상과 고졸 이하 유권자들의 선택이 선명하게 갈렸다. 이제 인종이나 경제 지위보다 학력이 유권자 선택을 이해하는 결정적 변수가 되었다.(고졸은 56%가 트럼프, 대졸은 55%가 해리스 지지)
- 더 이상 청년층은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집토끼가 아니다. 2020년 바이든은 30대 미만 남성에서 11%포인트 이상 우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번 NBC 출구조사에서 트럼프는 30대 미만 남성에서 해리스를 2%포인트 차로 눌렀다. 심지어 청년 여성에서 바이든의 35%포인트 우위는 24%포인트로 줄어들었다.
- 민주당 승리의 기본 공식인 오바마 정치연합이 해체되고 흑인, 히스패닉 등의 남자들이 공화당으로 기울어졌다. 전체 득표율에서 흑인은 2020년에 비해 해리스에게 2% 덜 투표하고 특히 결정적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에서 2020년에 비해 16%나 덜 투표했다. 히스패닉은 더 놀랍게도 46%가 트럼프에게 투표했고 해리스는 2004년 이래 20년간 민주당 후보 중 최악의 득표율을 보였다.
- 민주당은 트럼피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폭넓은 정치연합(소위 반파시즘 전선)을 구성했지만 교외 백인 여성들이 기대한 만큼의 표를 던지지 않았다. 해리스팀이 히스패닉 남자 등에서 상실한 표를 상쇄하기 위해 크게 기대한 백인 교외 여성들 표에서도 트럼프가 해리스를 53 대 46으로 눌렀다.
- 트럼프는 민주당을 네오콘의 집결지로 비난하고 피스메이커 캠페인을 전개했다. 캠페인 기간 트럼프는 외교안보에서 강경 우파인 리즈 체니의 해리스 지지를 근거로 민주당이 전쟁광이라 비난했다.
- 트럼프는 수차례의 사법 위기를 모두 돌파했으며 집권하면 군대, 사법부 등을 복수의 도구로 활용하겠다고 공언했다. 민주당이 기대한 연방, 주 차원의 전방위적 사법 과정 중 가장 영향력이 약한 스토미 대니얼스 케이스만 유죄 평결을 받았고, 이를 포함해 판결이 모두 선거 이후로 연기되었다. 트럼프는 집권 후 첫날만은 독재자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위의 현상들은 종합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번 대선 초반부터 강연이나 방송에서 필자가 가설로 제기했던 테제들을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이후 이 거친 가설들은 체계적 데이터를 통해 정교하게 진화하거나 수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힌다.
전반적 시대정신은 트럼프 편이다
나는 이번 대선 초반부터 기본적으로 경제 및 '법과 질서'(law and order), 이 두 가지의 담론이 시대정신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주장해 왔다. 대선 초반 한국에서는 지식인들이 대부분 인플레에만 주목해 경제 선거라고 규정하곤 했는데 이는 반쪽만 진실이다.
바이든-해리스 행정부는 실제 복잡한 현실이 어떻든 간에 유권자의 인식에서는 줄곧 경제 무능과 무질서 세력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백악관 내부의 치열한 노력을 들여다보면 이건 너무나 단순한 평가이지만 정치는 인식이 전부다. 특히 안전이란 시대정신에서 이번 선거는 마치 1968년 닉슨이 법과 질서 담론으로 '침묵하는 다수'를 장악하고 존슨 대통령 대신에 나선 험프리 부통령을 누른 역사의 반복이다.
이 강력한 시대정신과 담론 헤게모니에서 크게 뒤지는 후보가 캠페인으로 역전하려면 판을 흔드는 탁월한 선거 전략과 메시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해리스 캠페인은 바이든 대통령의 늦은 사퇴로 인해 억울하지만 무능과 혼선으로 점철되었다.
구조적 조건뿐 아니라 캠페인도 중요하다
나는 소위 '인간 문어'로 칭송되는 앨런 릭트먼 아메리칸대 교수의 해리스 승리 예측에 대해 비판해 왔다. 그는 장단기 경제, 외교 성공과 실패 등을 비롯해 13가지 자신의 분석 틀을 통해 일찍부터 해리스가 승리할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나는 학계 일각의 이런 구조적 예측 모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들의 결정론적 생각과 달리 현실 정치는 캠페인의 동학이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한국에서도 릭트먼 교수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 미리 승리를 예측하고 자신의 예측력에 만족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캠페인이란 변수를 뺀 구조적 환경은 어디까지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줄 뿐 최종 결과를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1968년 닉슨의 승리도 사실은 오늘날 알려진 신화와 다르다. 당시 캠페인 내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부통령 험프리에게 며칠 더 시간이 있었다면 역전이 가능한 선거였다고 지적하곤 한다.
이번 선거에서 나는 트럼프의 수지 와일스 캠페인 매니저에게 주목하라고 방송에서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사실 이번 선거는 트럼프의 극단적 자기파괴 본능을 최대한 통제한 수지 와일스의 안정적 캠페인이 다국적 군대가 짧은 시간에 결합한 해리스의 무능한 캠페인을 누른 선거이다.
다수 유권자들은 변화를 원하는데 바이든 노선을 그저 계승하겠다는 후보가 승리하겠다는 발상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결국 문제는 시대정신을 이해하고 캠페인 조직에서 바이든 진영의 영향력을 견제하며 중심을 잡아주는 능력이 부족한 후보의 자질 문제이다.
학위 '분단'(균열)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