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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불거진 북한 핵파문 이후, "신속하고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개발을 폐기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해온 부시 행정부가 최근 들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주목을 끌고 있다.

더구나 부시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대북 에너지 지원 가능성도 암시해,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자세가 누그러진 것이 아닌가"하는 기대를 낳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부시 행정부의 입장을 유심히 살펴보면 기존의 입장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북한과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화는 하되, 협상은 없다"는 모호하면서도 일방적인 태도가 변하지 않고 있고,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불가침 조약 체결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7일 한-미-일 대북공조회의인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공동성명서에서 "미국 대표단은 북한이 국제사회에 한 약속을 어떻게 준수할 것인지에 관해 북한과 기꺼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고 밝히면서, 그러나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미국 대표단은 북한이 기존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 보상이나 대가를 제공하지는 않을 방침"이라고 선을 분명히 그은 바 있다.

즉, 북한과의 대화는 미국의 우려 사안을 해소하는 것을 의제로 하는 것이지, 북한의 우려 사안을 해소하는 협상은 "북한이 신속하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핵개발을 폐기"한 이후에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현 단계에서 중유 제공 재개 계획 없어"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대북한 강경 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린 배경은 "북한 핵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는 미국 안팎의 비난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동안 대화 불가 노선에서 한발 물러섬으로써, 여론의 화살을 피하고 이제 북한이 호응할 차례라는 선전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동시에 "대화는 하되, 협상은 아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북한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체면도 살리고자 하고 있다.

이로써 부시 행정부는 최근 국제사회는 물론 미국 내에서 일고 있는 '대북 협상론'에 대해서는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말해 이를 수용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미국의 힘을 보여달라"는 강경론에 대해서는 "북한과 협상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 불만을 달래려고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됐다.

미국 언론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제사회의 언론이 부시 행정부의 대화 용의를 대서특필하면서 "이제 공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온건해지고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르다. 온건해진 정치적 수사에 비해 정책적인 내용에는 거의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협상 개시의 전제조건, 불가침 조약 체결 의사, 북한 핵폐기에 따른 반대급부 제공 등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기존의 강경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3일(미국시간) 미 국무부 브리핑은 이러한 점에서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켈리 특사가 방한 중에 밝힌 "북한 핵문제 해결시 에너지 제공 의사"와 관련해, 리처드 바우처 대변인은 "켈리가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고 밝혔다. 즉,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폐기시 에너지 지원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먼저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핵개발을 폐기하면 다양한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중요한 것은, 북한이 신속하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폐기할지, IAEA의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원상복구할지의 여부"라며, 이러한 부분과 관련해 진전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즉, 북한이 이러한 점들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 해결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중유 제공 재개와 관련해, 앞서 언급한 전제조건, 즉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폐기와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가 이뤄지기 전에는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정리해보면, 부시 행정부의 태도는 첫째, 북한이 핵개발 포기 의사를 밝히면 그것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대화'를 할 용의가 있고, 둘째 북한이 요구하는 불가침 조약 체결은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셋째 본격적인 협상은 핵개발의 폐기가 이뤄진 다음에 가능하고, 넷째 중유 제공 재개를 비롯한 에너지 지원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고려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라늄 농축 문제 해소가 관건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기본적으로 대북정책을 둘러싼 미국 내의 혼란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온파 사이의 분열은 부시 행정부 출범 때부터 지속되어온 것으로,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도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이 북한 핵문제의 악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협상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하고, 또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제의 핵심은 역시, 부시 행정부가 가장 큰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신속하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폐기"하는 것이다. 영변 핵시설의 경우, 적어도 기술적으로 IAEA 사찰단이 복귀해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다시 설치하면 원상복구가 가능하다. 그러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그 실제도 불분명할뿐더러, 사찰과 검증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두고두고 갈등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구체적인 증거 제시 없이'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북한은 이에 대해 '모호하게' 부인하고 있어 정확한 사실 규명조차 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의혹을 제기한 미국측에서 먼저 국제사회에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고, 북한 역시 의혹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체가 불분명한 핵 프로그램을 폐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우라늄 농축 시설은 플루토늄 관련 시설과는 달리, 외부에서 포착하기도 힘들뿐더러, 농축 시설을 여러 곳에 분리·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찰과 검증이 대단히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찰과 검증이 시작되어도 북한 전역을 샅샅이 뒤지지 않는 한, 완전한 의혹 해소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앞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는 향후 북한 핵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둘러싼 의혹 해소와 북한이 이 프로그램을 갖고 있을 경우, 동결과 사찰, 그리고 검증 방안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는 노무현 당선자가 구상하고 있는 '중재안'에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 해결의 비전이 제시되지 않을 경우, 북핵 문제는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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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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