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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문화분야 취재 역시 사람 만나는 게 일의 절반이다. 아직은 순수와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예술가들이고 보니 취재가 술자리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 이 기사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대작(對酌)한 기록인 동시에 한국 문화계에 대한 기자의 인상기다.... 편집자 주


▲ 소설가 현기영.
ⓒ 민족문학작가회의
진달래와 개나리가 한창이었건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봄바다는 사나운 소리로 울어댔다.

태평양을 힘겹게 넘어온 바람이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는 제주도 귀덕 인근 해변. 잠녀(潛女)들이 잡아온 소라와 전복의 내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던 우리 일행은 무엇에 홀린 듯 바닷가로 걸어가 검은 현무암 위에서 새하얀 포말로 흩어지는 제주의 파도에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휘윙~ 휘윙"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람소리. 누군가의 울음 같은 그 바람의 비명을 듣고 있으니 이유 없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바다에 날개를 적신 나비'도 '풀 죽은 황녀(皇女)'도 보이지 않던 2002년 봄날이었다. 문득 제주도의 바다와 바람을 닮은 작가 현기영이 떠올랐다.

살아오며 제주도 출신 사람을 만나 교류한 적이 거의 없다. 몸과 마음 모두를 열어놓고 사는 천성 탓에 대한민국 경향각처의 사람들을 친구와 선후배로 사귀었지만, 이상하게도 제주도 사람만은 만난 적이 드물었다. 제주라는 섬에 매료돼 8년 사이에 5번이나 바다를 건너는 비행기와 배를 탔으니 기자의 제주사랑은 각별한데, 어째서 제주도 친구는 하나도 없었을까?

그 의문과 섭섭함을 달래준 것이 현기영(62)의 소설들이었다. 그가 쓴 <순이삼촌>과 <바람 타는 섬> <변방에 우짖는 새>(후에 배우 이정재와 심은하가 출연한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 제작됨)는 제주에 대해 무지했던 기자를 4·3항쟁의 아픈 역사와 해녀들의 항일투쟁,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노비 출신 혁명가 이재수의 몸부림과 만나게 해줬다.

최근에 공중파 책 소개 프로그램에 소개돼 붐을 일으킨 바 있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위의 책들과는 또다른 감흥의 제주를 만나게 했다. 학살의 체험과 그로 인한 정신분열의 나날들 속에서도 아름답기만 했던 섬소년들의 유년을 읽고 있노라면 현기영이 뛰어 놀던 1950년대 제주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코발트빛 하늘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현기영과 처음 대면하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01년 1월이다. 당시 기자는 신년을 맞아 문단 원로를 연쇄인터뷰 중이었다.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을 정리했고, 딴에는 철저한 준비를 한답시고 장문의 질문지까지 뽑아 그의 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건 뭔가? 현기영이 대뜸 던진 첫마디는 이 인터뷰가 취중에 진행될 것임을 예견케 했다.

"포도주가 있는데 한잔 먹으면서 하죠. 뭐 이건 술이 아니라 음료수니까. 허허…."

그렇게 포도주로 시작된 인터뷰는 집에 있던 맥주를 바닥내고, 인근 목로의 소주 2병까지 비우고서야 끝났다. 취하면 본분을 망각하는 버릇이 그날도 여지없이 도졌고, 술자리 아니 인터뷰 막판에 가서는 아버지뻘의 작가를 앞에 두고 횡설수설 했던 것도 같다.

그런 기자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빈 잔에 술을 채워주는 현기영의 눈빛. 예순 노인답지 않게 물기 촉촉한 그의 눈망울 속에 시인 이생진이 극찬한 제주 성산의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며칠 후 "기사 잘 봤다"며 전화를 걸어온 현기영의 음성에서는 제주항 밤바다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냄새가 났다. 눈빛과 목소리, 아니 머리칼과 새끼손가락마저도 제주를 닮은 사람.

올 봄 현기영이 문예진흥원장이 됐다. 공직사회 경력이라고는 고교 영어교사가 전부인 그가 수백억 예산을 집행하는 정부기관의 수장이 된다는 것에 우려를 보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별 잡음 없이 맡은 바 일을 묵묵히 처리해내고 있다. 온갖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수천 수만 년 한결같은 제주의 바다. 그 바다를 닮은 현기영이기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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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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