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아래 국가와 재벌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국가주도의 주종관계였다. 하지만 이 관계가 역전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7일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최장집(62. 고려대 정치외교학. 사진) 교수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졌다. 그동안 각종 논문 등을 통해 참여정부의 경제복지정책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온 그였다.
25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창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도 그의 이같은 기조는 그대로 유지됐다. 무엇보다 민주정부 아래에서 변화된 경제사회정책에 대한 그의 비판의 날은 날카로왔다.
그는 "민주화 이후 시장 지상주의 가치가 군림하게 됐고, 성장과 시장주의 중심에 재벌과 국가의 동맹이 위치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재벌이 중심이 되고 하위파트너로서 국가의 정책이 그(재벌)에 봉사하는 내용이 된다고 비판했다.
이는 결국 국가의 역할과 성격 자체를 변모시키고, 모델이 되는 재벌기업이 국가의 역할과 기능 등을 정의해주게 된다는 것이다. 또 재벌이 국가가 해야할 정책을 제공해주고 관료 행정의 규칙과 규범의 모델을 제공해줌으로써, 국가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모시킨다고 주장했다.
"삼성을 일컫는 말인가" - "굳이 말 안해도 누구나 다 안는 것"
최 교수는 이날 강연에 앞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재벌'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재벌이 중심이 된다고 했는데, 삼성을 일컫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짤막하게 답한 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강연 중에 삼성을 언급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며 포괄적인 의미의 재벌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그는 강연중에 국가와 재벌관계를 언급하면서 별도로 삼성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장 지상주의 아래에서 재벌과 국가간 힘의 균형이 깨졌지만, 재벌 가운데에도 특정재벌의 힘이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같은 입장은 최 교수의 최근 논문 '사회적 시민권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논문을 통해 "노무현 정부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정책의 틀을 발전시킨 것도 아니었고, '2만불 성장시대'라는 정책목표의 선택과 아울러 집권엘리트-경제관료-삼성그룹 간의 결합이 만들어지면서 개혁적 정책의 공간은 크게 축소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 노무현정부가 정서적 급진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스타일과 함께 실제 내용에서는 보수적인 경제정책의 기묘한 결합을 보이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경제사회정책, 권위정부보다 더 성장중심적"
최 교수의 이날 강연 가운데 민주정부에 대한 경제사회정책에 대한 비판은 현 정부 입장에선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그는 "권위주의 정부보다 더 성장중심적이고, 그럼으로써 재벌중심과 노동배제적인 정책들"이라고 진단하고, 세계 주요국가들보다 더 신자유주의적 워싱턴 컨세서스를 따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장근본주의를 따르는 경제독트린과 정책 라인을 취해왔다고 덧붙였다.
특히 최 교수는 민주정부들이 취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를 외부적 압력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정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 전체에 심각한 부정적 효과를 야기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가 밝힌 부정적인 효과는 재벌중심적 성장지상주의와 함께 중소기업과 노동배제적 정책이 복원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노동과 사회보장, 복지정책이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빈부격차 심화, 사회해체가 가속화됐다"고 진단했다.
"민주정부-재벌기업 동맹 하에서 노동운동 여지 매우 좁다"
최근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해서도 "과거에는 '정치인 때리기', '386 때리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노동 때리기'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때리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최 교수는 말했다.
그는 노동운동은 부도덕하거나 폭력의 상징처럼 언론을 통해 묘사되고 일반에게 인식된다면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와 같은 세계적 브랜드의 자랑스런 이미지의 반대편에는 어두운 그늘에서 이들의 발목을 잡는 하찮은 무리처럼 (노동운동이) 인지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또 기업이 노동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개혁적인 것으로 상징돼던 민주정부의 태도와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민주정부의 지도자들이나 노동행정 및 정책 결정자들이 기업계의 입장이나 견해와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민주정부-재벌기업 동맹의 환경 하에서 노동운동이 자리잡을 여지는 매우 좁다"고 진단한 이유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서도 최 교수는 "정부는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문제보다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유연화의 방향을 완결짓고자 하는 정책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정부 의도속에 노조가 이성적 협상의 파트너로 이미지 개선 효과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현재의 얻을 것을 포기하고 판을 깨느냐 하는 선택의 딜레마에 (노조가) 놓이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는 바로 민주정부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면서 "이 문제의 근원은 정부의 노동정책, 사회정책, 경제정책에 있으며 민주정부가 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무능과 잘못된 정책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최 교수는 "노동의 위기로 나타나는 현상이 먼저 민주정부에 있다고 해서 노조, 노동운동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면서 "도덕적인 접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서는 오늘의 노동문제를 이해하고 풀어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