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자전거에 짐을 싣고 부산역을 출발하려하니 빗발이 더 거세진다. 자전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다른 방법이 없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다 맞으며 달렸다. 10일간 규슈 자전거여행의 축하 세레머니치고는 하늘이 좀 짖궂다. 다행히 부산역에서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까지는 가까운 거리여서 10분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서둘러 도착하고 나니 오히려 시간이 조금 남는다. 짐을 내리고 미심쩍은 페니어 부분을 다시 손봤다. 왜 짐받이가 삐딱한가 자세히 살펴보니 서둘러 조립하느라 나사구멍을 잘못 찾아 끼운 거다.
수하물창구에 찾아가 자전거와 함께 짐3개를 맞기고 나니 겨우 한시름 놓인다. 어떤 여행이 고생스럽지 않겠는가마는 자전거여행은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여행길에서 고생도 즐겁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여행 내내 어려웠던 기억만 남을 수도 있다.
터미널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대기하고 있는 카멜리아에 6시 40분경 승선했다. 우리가 타고 갈 배 뉴 카멜리아는 부산항과 하카타항을 주6회 운항하는 2만톤급의 대형 여객선이다.
부산항에서는 밤 10시 반에 떠나 새벽 6시에 하카타에 닿고 돌아오는 편은 하카타에서 정오무렵 출발해 오후6시경 부산항에 도착한다. 승선 정원은 522명으로 표기돼 있지만 주말이 아니라서 그런지 배안이 좀 한산한 편이다. 곳곳에 빈방도 눈에 띄는 정도다.
카멜리아의 배안은 각층별로 특등실 1등실 2등실 등으로 나뉘고 각각 적용요금이 다르다. 자리를 찾으면서 1등실도 잠시 살펴봤는데 상하로 개인침대가 있는 대신 좀 좁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저렴한 2등실(다인실)인데 생각보다 널찍하고 깨끗하다. 혼자서 조용히 사색해야 할 공간이 필요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다인실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럿이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물론 다인실이 좋다.
창가에 자리를 정하고 선반에 짐을 넣었다. 짐을 정리하고 배안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1층과 2층은 컨테이너 화물실등이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3층에는 면세점, 레스토랑, 자판기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준비돼 있으며 앞쪽으로 2등실이 있다.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는 4층은 전망대와 라운지 그리고 배 앞뒤 쪽으로 1등실과 2등실이 배치돼 있다. 5층은 1등실과 특등실이다.
선실로 돌아왔다. 창밖으로는 바다 일 텐데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리에 누우니 배 기관소리가 조금씩 들리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다.(출발하자 이 소리가 거의 사라졌다) 선내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니 건너편에 일본여행이 처음이라는 여학생들이 모여 앉아있다. 들뜬 마음으로 재잘거리는 부산사투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기관소리는 심하지 않았지만 태풍의 간접영향인지 밤새 제법 흔들리는 느낌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떠보니 어스름한 새벽녘. 배는 이미 도착해서 항구 안으로 들어와 있어 멀리 후쿠오카 시내의 가로등이 보인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는 듯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지고 있다. 아내가 어쩔거냐며 걱정한다. 하늘이 하시는 일 어쩌겠는가.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건 내려서 생각하자고 말하고 태평하게 선상 목욕을 즐겼다.
배안에서 아침을 먹을까 하고 선상 레스토랑에도 들렀다. 메뉴를 살펴보니 500엔~800엔짜리 메뉴치고는 너무 간단한 것 같다. 우리 가족은 아침을 꼭꼭 챙겨먹는 편이라서 아침이 시원치 않으면 하루가 어렵다. 게다가 자전거여행은 잘 먹어야 한다는 조언은 익히 들은 터라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서 후쿠오카에서 마땅한 현지 식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입항시간이 다 되었는지 사람들이 줄을 서고 내릴 준비를 한다. 맡겨둔 자전거가 염려되어 승무원에게 물으니 줄의 맨 앞으로 안내해준다. 얼른 내려서 확인해보라는 배려다. 하카타항에 내려 간단한 입국심사를 마쳤다.
자전거는 다 괜찮은 것 같다. 세관검사대에서 자전거와 복장을 보고는 어디까지 여행할 계획이냐 물으며 잘 다녀오란다. 에스컬레이터로 아래층에 이동하니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린다. 우중에 드디어 후쿠오카 땅을 밟았다.
후쿠오카에서 종종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하카타’라는 지명은 2개 지역이 하나로 합쳐지는 바람에 남겨진 것이다. 원래 후쿠오카 성터가 있던 동쪽 지역이 후쿠오카, 상인의 지역인 서쪽 텐진과 하카타역 근처가 하카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후쿠오카라는 지명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도시를 이루게 되었던 것. 지금도 지역 곳곳에 하카타라는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후쿠오카 항구는 ‘하카타’항, 신칸센의 시발역이 되는 ‘하카타’역도 선택된 지명 후쿠오카를 제치고 공식명칭으로 쓰인다.
비 때문에 후쿠오카에서 하루 묵을까도 생각했지만 예정대로 출발하기로 했다. 비가 오면 어떤가. 비오는 날 자전거여행도 추억으로 남으리니. 출발할 때 준비해 온 커다란 비닐봉지를 비옷대용으로 쓰기로 했다. 졸지에 둘 다 우비소년이 되어 빗속을 출발했다.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모습이라서 남들 눈길이 좀 신경쓰이지만 비맞는 불편함보다 훨씬 낫다.
길가의 택시운전사들에게 길을 물어 지리를 확인하고는 한참을 달렸다. 역시 자전거의 나라답게 인도와 차도의 인접부분에 턱이 거의 없이 평평하다. 길바닥도 색상의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장식되어 달리는데 지루하지 않다.
비는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도로 사정은 자전거 주행에 최적의 조건이다. 그러나 도심주행은 역시 매연이 심각하다. 특히 빗길 오르막에서 내뿜는 대형트럭의 매연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마침 배고픈 참에 길가에 식당이 눈에 띄어 들렀다. 라멘집과 패스트푸드점, 전통 일식집 세 곳이 줄지어 서 있다. 메뉴를 비교한 결과 가장 안쪽의 일식집이 괜찮은 것 같아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쪽에 반찬을 진열해놓고 골라먹도록 한 시스템. 맛있어 보이는 반찬 몇가지를 골랐다.
밥은 손님이 원하는 대로 주인이 직접 퍼준다. 적은 것 중간 것 고봉밥이 있는데 양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역시 일본답다.아내는 중간 것 나는 고봉밥을 시켰다. 밖에 비가오거나 말거나 우리는 첫 아침밥을 양껏 맛있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