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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이 부엌을 함께 쓴다는 것은 단순한 공유 이상의 깊은의미가 있는 것 같다
주부들이 부엌을 함께 쓴다는 것은 단순한 공유 이상의 깊은의미가 있는 것 같다 ⓒ 유신준
잠시 후에 일을 마무리하고 들어온 식구들이 아내가 쪄낸 만두 앞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잘 익은 만두다. 일본에도 만두는 있지만 한국의 김치만두는 처음이란다. 식구들이 하나씩 먹어보더니 맛있다며 반색을 한다. 만들어 쪄내기가 바쁘게 김치 만두가 동이 나 버렸다.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은 딸 교코조차도 만두를 맛있게 잘 먹는다. 음식만큼 좋은 선물이 없구나. 들고 올 때는 무거워서 짐이 되었던 김치를 이곳까지 잘 가져왔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태풍 때문에 시기를 잘못 선택해 온 것 같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김치만두로 그 미안함을 조금 던 것 같다.

만두를 만들어 먹은 후 여행일정 대로 다카야마씨 댁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절대만류. 심하면 태풍에 떠밀려 가 죽을 수도 있다며 절대로 나가면 안 된단다. 할 수 없이 태풍예보방송을 보며 가족들과 쉬었다. 불행히도 이 지역이 밀려오는 태풍13호 진로의 정면에 놓여 있다.

옛날 기억이 나서 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의 집 앞에는 전에 없던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슈의 설명에 따르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쓸데없는 공원이란다. 국민은 가난해도 나라가 부자니 예산이 풍부하여 쓸데없는 시설만 늘려간다는 것. 그것이 경제대국 일본의 비극이라는 것. 대학생이라 그런지 현실인식이 상당히 비판적이다.

바람이 점점 거세진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거봉을 이용해 만드는 와인공장을 견학하러 나갔는데 태풍 때문에 공장이 문을 닫아서 그냥 돌아왔다. 점점 다가오는 태풍 때문에 세상이 모두 바짝 긴장하고 있는 중이다.

태풍 한가운데서 열린 한일 국제오목경기

저녁을 메밀소바로 간단히 때우고 온가족이 태풍대비에 들어갔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공민관으로 대피한 사람도 있단다. 거실에는 만일에 대비해 헬멧과 양초가 준비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결국 정전이 되어 버렸다. 다카야마씨가 식탁위에 양초를 켜놓더니 이것도 나중에는 좋은 추억거리가 될 거라며 웃는다. 그는 항상 낙천적이어서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태풍 한가운데서 바둑판 양쪽에 촛불을 켜놓고 한일대국이 벌어졌다
태풍 한가운데서 바둑판 양쪽에 촛불을 켜놓고 한일대국이 벌어졌다 ⓒ 유신준
밖에서는 바람소리가 점점 요란해진다. 그 때문에 온 집안이 긴장하고 있는 상황인데 맏아들 슈가 갑자기 바둑판을 가져왔다. 뜬금없이 오목을 두잔다. 태풍 한가운데서 바둑판 양쪽에 촛불을 켜놓고 기묘한 한일대국이 벌어졌다. 손님대접 때문인지 먼저 두란다. 흠, 나도 만만치 않을텐데. 바둑판 가운데 쪽에 빈곳이 없을 정도로 팽팽한 대국이 펼쳐졌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내 공격이 계속되고 판이 넓어지면서 이곳저곳 위험 요소가 눈에 띈다. 조금이라도 공격을 늦추면 내가 손을 들어야 할 판. 밖에서는 태풍 때문에 난리인데 안에서는 바둑판에 몰입되어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결국 계속되는 내 공격을 막지 못하고 슈가 손을 들었다.

슈가 절박한 상황에 바둑판을 꺼내든 건 어쩌면 긴장된 상황을 뛰어넘기 위한 지혜였을 것이다. 식구들이 바둑판에 몰입하면서 이상하게도 태풍 생각을 잊었다. 사람을 바꿔가며 연거푸 몇 판을 두는 동안 두려움도 사라지고 기분이 나아졌다. 밤 11시쯤 정전이 풀리면서 동해쪽으로 태풍이 모두 빠져 나갔다는 보도를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바깥바람은 아직 세차다.

다시 구마모토를 향해 출발

새벽녘에 눈을 뜨니 거짓말처럼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다까야마씨 가족은 아직 기척이 없다. 일어나자마자 바깥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뜰 앞에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 이외에는 별 피해가 없다. 부인 유우꼬씨가 그렇게 염려했던 포도밭 시설들이 멀쩡하다.

생각보다 태풍 피해가 적어 다행이다
생각보다 태풍 피해가 적어 다행이다 ⓒ 유신준
감나무 농장쪽을 살펴보니 잔가지가 부러진 것 이외에 큰 피해가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떠나기로 한날. 피해라도 있었으면 떠나는 마음이 무거웠을텐데 홀가분하게 떠나라는 하늘의 배려같다.

우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유우꼬씨가 나왔다. 포도밭이 괜찮다고 하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반가워한다. 잠은 깨었지만 바깥을 살펴보는 일이 두려워 그냥 누워 있었다고 한다. 아침을 먹으며 슈가 우리 덕분에 태풍이 그냥 지나간 것 같다고 한마디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더니 모두 웃는다.

오전 동안은 태풍 뒷정리라도 좀 해주고 떠나려 했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며 튼튼한 아들이 집에 있으니 걱정 말고 출발하란다. 보리차를 끓여서 물병을 채워주기도 하고 든든히 먹고 가라며 간식까지 내왔다. 아쉬운 마음을 남겨두고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다까야마씨 댁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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