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태풍의 영향으로 곳곳에 기왓장이 떨어져 있다. 큰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거목들이 옆으로 누워 있는 것도 보인다. 부지런한 이곳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집 앞 도로변을 깨끗하게 치워놓아 주행에 큰 지장은 없다.
20km를 달려 구루메에 도착했다. 백화점 서적코너에 들러 사고 싶었던 자전거 여행 책
을 드디어 구했다. 여행자들의 휴대성을 배려한 듯 책 크기가 국판(152×218mm)이다. 맨 앞장에는 규슈전도를 이용한 색인도가 나와 있어 찾기도 편하다.
인쇄도 선명한데다 소문대로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이 일품이다. 오늘 일정 해당 페이지의 길안내에 따라 코스를 정하고, 좀 이른 점심을 먹었다. 오늘 목표는 슈의 의견대로 일단 다치바나(立花)라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슈가 아내를 생각해 정한 목표치 40km다.
국도 3호선은 대형트럭이 많다
구루메부터는 국도 3호선을 탔다. 다른 코스도 고려해봤지만 우선 찾기 쉬운 큰길이고, 오늘 일정에 시간을 맞추자면 국도 3호선이 최적이었다.
국도 3호선은 규슈의 최북단 기타큐슈에서 시작하여 최남단 가고시마까지 규슈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길이라서 규슈의 대동맥이라 부른다. 길의 역사도 오래되고 그만큼 교통량도 많은 곳이다. 특히 대형트럭의 이동이 많다.
오전의 지방도보다 길이 넓어 편했지만 차량 통행이 잦아서 신경이 쓰인다. 제법 낭만적이었던 지방도 210호선과 다른 상황. 이곳은 줄을 잇는 대형트럭의 굉음을 옆구리에 끼고 달려야 하는 위험한 길이다.
앞서가는 아내는 용감하다. 20인치 바퀴의 이스케이프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이미 대형트럭의 엔진소리에 이골이 난 듯 흔들림도 없다. 국도 3호선 주행이 아내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
힘들면 쉬어가며, 때로는 비어 있는 버스승강장에서 눕기도 하며, 오후 4시경에 다치바나에 도착했다.
주 노선인 국도 3호선에서 빠져나와 진입로를 따라 마을에 들어섰다. 전형적인 일본의 촌락이다. 마을 안쪽에 신사를 끼고 있고 골목마다 오래된 건물들이 보인다. 출발 전 다치바나 정도에서 묵는 게 좋겠다는 슈의 조언대로 이곳에서 우선 텐트를 칠 장소를 찾았다.
마침 동네 가운데 오래된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야구놀이를 하고 있다. 바닥도 고슬고슬하고 공중변소가 있는데다가 비가 오면 피할 수 있는 시설까지 있다. 공원 옆에 사는 분에게 이곳에 텐트를 쳐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모기가 좀 많을 거라고 걱정한다.
좀 이르긴 하지만 이곳에 자리를 정하자고 하자, 아내는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더 가면서 더 좋은 곳을 찾아 보잔다. 일본까지 왔으니 최소한 온천욕 정도는 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려면 이 넓은 땅에 우리가 텐트 칠 장소가 없겠느냐며 호기를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바쁜 길에 주위를 구경할 여유도 잊은 채 오로지 적당한 텐트자리를 찾아 달리기에만 몰두했다. 가도 가도 텐트를 칠만 한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덧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준비해 온 안전 깜박이까지 배낭 뒤에 켜놓은 상황이다.
대형트럭들은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위협적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간다. 길가에 학교 한군데를 발견하고 올라갔다. 입구에 있는 수영장 부근이 콘크리트 바닥이라서 깨끗하다. 직원인 듯한 사람이 지나가기에 허락을 구했다. 자기는 퇴근하는 중이고 조금 있다가 경비원들이 올 텐데 허락하지 않을 거란다.
마음은 급해졌다. 학교 앞 농기구 수리센터 주차장이라도 사용해 보려고 문을 두드렸다. 마음씨 곱게 생긴 여자 분이 나온다. 사정을 얘기하자 괜찮다며 남편한테 이야기해 보자고 한다. 남편이 나왔다. 아내도 아내지만 남편은 더 호인처럼 보이는 얼굴이다.
그는 이곳에 텐트를 펴는 것은 좋은데 국도변이라 밤새 시끄러워 한숨도 잘 수 없을 거란다. 좀 더 가서 고개를 넘으면 텐트 치기 좋은 미치노에끼(道の驛) 라는 곳이 있다고 소개해 준다.
이미 어두워진 길을 다시 출발했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 아까 공원에 머물었어야 하는 건데. 일본까지 건너와 이게 무슨 고생이람. 한참을 더 달렸으나 고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끔찍했던 초보텐트 첫 밤의 추억
아직도 목적지는 먼 모양이다. 차를 타면 금방이겠지만 자전거는 시간이 걸린다. 개울 건너로 어슴푸레하게 공원 같은 곳이 보여 다가가 살펴보니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인가. 할 수 없다. 고개를 넘지 않았으니 그가 소개해준 곳은 아니지만, 우선 급한 대로 그곳에 잠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부랴부랴 공원 한구석에 텐트를 쳐놓고 짐을 들여놓은 다음 근처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가게가 있어 도시락을 하나를 샀다. 어두컴컴한 텐트 안에서 도시락을 펼쳤으나 짜고 맛이 없다. 오니기리(양념을 섞어 경단모양으로 빚은 밥) 하나를 먹다가 그만뒀다. 아내나 나나 피곤한데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멋모르고 푹신한 잔디 위를 골라서 텐트를 친 탓에 습기가 많다. 몸에 닿는 침낭의 느낌이 축축하여 기분 나쁘다. 게다가 텐트주변에는 모기까지 득실거려 밖에 드나들기도 불편하다. 잠자리에 누우니 건너편 국도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크게 들리고.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서 잠시 쉬는 틈도 없다. 이거 오늘 밤 잠은 다 잤구나.
텐트 첫날부터 최악의 상황이다. 멀리 외등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주위는 어둡고 어두워진 밖을 내다보면 아내는 불안한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의 하나가 일본이라며 여자 혼자도 여행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해줬지만, 말하는 사람도 텐트 안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습기가 많아 불편한 잠자리에다가 밤새 건너편 국도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차라리 처음에 텐트를 치려고 했던 동네공원에 설치했더라면 이런 고생은 없었을 것을….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지난 일이다.
가급적 텐트를 칠 장소를 일찍 정하는 게 좋다는 여행 도사들의 인터넷 조언이 그때만큼 절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어떻게 그 밤을 보냈는지 모른다. 자다가 깨다가 잠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비몽사몽 간에 바깥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미련없이 일찍 자리를 뜨기로 하고 공원구석의 수돗가로 가서 세수를 했다. 귀가 유난히 밝은 아내는 나보다 형편이 더 안 좋다. 제대로 쉬지 못해 꺼칠한 얼굴이다.
서둘러 여장을 챙겼다. 아침 안개가 자욱한 걸 보니 한낮에 꽤 덥게 생겼다. 짐을 챙겨놓고 살펴보니 밤새 고생은 했어도 주변 경치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다. 자전거에 짐을 모두 실어놓고 사진을 여러 컷 찍었다.
처음 길을 나서면서부터 다짜고짜 고개가 시작됐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오르막길. 아내는 힘들고 배까지 고프다고 투덜대기 시작한다. (그녀는 어려서 젖배를 골은 적이 있어 배고픈 것을 잘 참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간간이 몇 채의 오래된 집들이 보일 뿐 식당 같은 것은 보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