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코노시마라는 섬에 가기위해 선착장을 찾았다. 해변도로를 달리다보니 갑자기 오늘 저녁 묵을 곳이 걱정이다. 모든 일정이 꼭 텐트여야 한다는 계획은 아니었지만 몇 군데 텐트경험을 더 해보고 싶었다. 텐트는 우리에게 일상을 빠져나오는 상징같은 존재였으니까.
마침 지나가는 경찰차가 있어 이곳 해변공원에 텐트를 쳐도 되느냐고 물었다. 자기들이 좋다 나쁘다 얘기할 수 없는 입장이란다. 안된다는 말보다는 낫다. 시간이 많으니 섬에는 내일 들어가기로 하고 오늘은 느긋하게 해변에 텐트를 치고 묵기로 결정했다.
해변이라서 바닷바람이 심하다. 해변의 낭만도 좋지만 좀더 안락한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내가 봐둔 곳이 있다고 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해변 조금 안쪽에 고급맨션이 세워진 부지가 나타났다. 한눈에 깨끗하고 좋은 곳이다. 한쪽 안내판에는 이곳은 맨션허가를 조건으로 만들어진 공원이므로 일반에 공개된 곳이라고 써있다. 후쿠오카 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어서 전망도 좋다. 이곳으로 결정하고 텐트를 펼쳤다.
일상 탈출 공간 텐트
아무리 주변경치가 좋은 곳이라도 사방이 툭 터진 곳은 잠자리로 불안하다. 이곳은 경관은 좋은데 주거공간으로 아늑한 맛이 없다. 텐트 칠 곳이 없어 난감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젠 별걸 다 따진다.
텐트 경험이 없는 아내는 여전히 바깥이 불안해 잠을 설치고 있다. 일상탈출을 위한 경험이니 이 정도는 견뎌야지 어쩌겠나.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귀가 밝은 아내가 밖에 인기척이 있다며 흔들어 깨운다.
여자가 그렇게 불안하다고 호들갑을 떨더니 뭔가 올 것이 왔나보다 싶었다. 어두울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인데. 좀 뒤가 켕기기는 하지만 별 수있나.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 한 사람이 서있다. 자세히 보니 경비원 복장을 한 사람이다.
순찰을 돌다가 텐트를 보고 왔단다. 이곳은 텐트 금지구역인데 밤도 늦었고 하니 그냥 자다가 아침 일찍 떠나라는 것이다. 분명 일반에 공개한다는 안내를 보고 왔는데 텐트는 예외인가 보다.
한번 잠이 깨고 나니 다시 잠도 오지 않는다. 일상탈출 경험도 이만하면 됐고 텐트는 이제 그만 졸업하고 싶어진다. 날이 밝으면 어디 호텔이라도 찾아봐야겠다고 뒤척이고 있는데 먼동이 터온다.
불그레한 아침하늘 사이로 후쿠오카 타워가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다. 해변타워로는 일본에서 제일 높다는 곳이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을 새벽 산책삼아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주위가 밝으면 이렇게 낭만적인 풍경을 만드는 텐트가 어두워지면 왜 그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지.
오늘은 노코노시마에 가기로 한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들어가 맛있는 해산물로 아침을 먹기로 하고 짐을 정리해 선착장으로 향한다. 사람과 자전거를 포함해서 왕복요금이 천엔 정도.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일본의 공공요금치고는 싸다. 마침 떠나는 배가 있어 서둘러 섬을 향해 출발했다.
섬까지는 가까웠다. 눈앞에 보이는 섬이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스쳐가는 바닷물의 포말도 싱그럽고 뱃전에서 맞는 바닷바람도 왠지 휴가기분을 느끼게 해서 좋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니 바로 하선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우선 식당부터 찾아야 한다.
섬에만 가면 해산물이 풍부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줄 알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작은 섬이라서 어디에도 아침을 하는 곳이 없다. 식당 몇 곳이 있지만 점심때나 돼야 영업을 시작한단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후쿠오카에서 도시락이라도 준비해 올 걸. 풍부한 해산물은 고사하고 당장 아침조차 굶게 생겼다.
한적한 섬 노코노시마
일단 마을 공민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난 다음 아침 밥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내는 넓은 장애인용 화장실을 이용해 머리까지 감고 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더니 어느새 자전거 전문여행자가 된 건가. 상황적응 능력은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배워야할 판이다.
아침밥 레벨을 좀 낮췄다. 풍부한 해산물이 아니라도 좋으니 그저 굶지만 않았으면. 가까운 파출소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작은 사무실에 순경 한사람이 앉아 있다. 사정을 이야기했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도시락을 취급할 텐데 가게를 열었을지 모르겠단다. 찾아가니 주인인 듯 한 중년여성이 자판기에 음료수 캔을 넣고 있다.
도시락이 있냐고 물으니까 잠시 기다려 보란다. 음료수를 다 넣고 나서 비로소 가게를 연다. 다행히 도시락 몇 개가 있다. 가게 앞 퇴색한 나무테이블에 도시락 두개를 나란히 차려놓고 아내와 마주앉아 아침을 먹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하다. 갑자기 우리가 별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천천히 섬을 돌았다. 흐르는 시간조차 정지한 듯 한적한 섬이다. 휴가철이 끝난 때라서 그런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가게주인의 설명에 의하면 한창 때는 주민이 천명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이젠 모두 도시로 떠나고 몇 백명 남지 않았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은 대개 노인들이란다.
동네 가운데 신사가 한곳 눈에 들어왔다. 주변이 오래된 집들인데 신사만 홀로 화사한 것이 묘한 느낌이다. 일본은 어디를 가나 신사가 있다. 신사는 이사람 들에게 기독교국가의 교회처럼 생활의 일부다. 태고적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믿음의 상징이다.
선착장근처 공원에서 텐트를 펼쳐놓고 바람을 쐬며 쉬었다. 뒹굴거리니 무료해진다. 한가함을 찾아 들어온 섬이건만 결국 그 한가함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새로운 구경거리를 찾아 다시 후쿠오카로 나가기로 했다. 모처럼 일본까지 해외여행을 왔는데 한가함을 즐긴다는 게 왠지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후쿠오카에 나와 해변도로를 따라 도심으로 향했다. 해변 벤치에 먹물로 풍경화를 그리는 중년 여성이 둘 앉아 있다.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화장지로 먹물을 묻혀 바르기도 하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풍경이 편안해 보여 자전거를 세워놓고 한참을 구경했다.
인사를 하고 우리 소개를 하니 그동안 그린 화집을 꺼내서 보여준다. 하나같이 잘 그린 그림들이다. 시간이 나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그리는 도구는 갈대를 깎은 펜이라고 알려준다. 전문가 솜씨라며 칭찬을 했더니 대학 때 잠깐 배운 거라며 겸손해한다. 역시 예술은 인류 공통의 언어. 말이 필요없는 분야다. 그녀의 그림에서 왠지 모르게 기분좋은 여유가 풍겨왔다.
자전거가 좋은 점이 사람들에게 위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스스럼없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매개물이 자전거다. 차를 타고 가서 말을 걸었다면 그녀와 그렇게 쉽게 말이 통했을까. 그들이 마음을 열고 이것저것 얘기해 줄 수 있었을까.
아마 달랐을 것이다. 자전거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친근하게 만들어 버리는 마력 같은게 있다. 그것이 자전거여행의 큰 장점이다. 여행하는 동안 여러 곳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이 우연인 것 같지만 실은 자전거 여행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들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