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삼성맨'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

삼성상용차 퇴출 1년, 인생이 뒤바뀐 사람들

등록 2001.11.05 23:35수정 2001.11.07 12:14
0
원고료로 응원
'불매운동' '리콜요구 폭증' '한 가장의 자살' '최초의 삼성 노조 설립'.

지난해 11월 3일 시장에서의 퇴출이 결정돼 공중분해한 삼성상용차, 그로 인한 1년간의 궤적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지만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왔고, 아직도 그 충격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새로운 일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다. 퇴출 1년을 맞는 삼성상용차 주변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춰보았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나 봅니다" - 삼성그룹노동조합 정지찬 위원장

지난 8월 1일 대구 남구청에서 노동조합 설립 신고증을 받은 삼성그룹노동조합(이하 삼성노조)은 '삼성 그룹 역사' 이래 최초의 노동조합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설립된 노조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조가 설립됐을 당시 남구청의 설립 신고증 교부에 대한 이견이 첨예하게 대두됐었다. 당시 남구청의 상급 기관인 대구시와 삼성은 남구청이 노조 설립 신고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삼성노조를 신고한 한 이들이 '삼성상용차에서 자진으로 사직한 직원'이라는 이유로 설립 무효라고 주장했다.

결국 삼성노조는 지난 9월 12일 대구시가 남구청이 교부한 삼성노조 설립 신고필증을 취소 처분함으로써 삼성노조는 최대 위기를 맞았고, 현재 노조 측은 법원에 대구시의 직권취소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놓은 상태이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삼성노조의 이같은 어려움을 대변하듯 삼성노조위원장인 정지찬(31) 위원장 역시 건설현장에서 어렵사리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정 위원장은 삼성상용차에 근무할 당시 생산2파트 프레스공정에서 일했다. 정 위원장은 상용차의 퇴출 결정 이후 상용차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 보장을 요구하며 마지막까지 전배를 반대하고 비대위 활동을 벌였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정 위원장에게 삼성상용차 퇴출 1주년을 맞는 심경을 물어봤다.


"얼마 전 만난 삼성그룹 관계자가 저보고 하는 말이 '안타깝고, 비통하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제 마음은 더 착잡합니다. 상용차 퇴출 이후를 돌이켜보면 함께 동고동락해왔던 동료들이 하나둘 회사와 비대위를 떠나면서 관계가 헝클어졌던 그 경험들을 생각하면 답답했죠. 처음에는 참 많이 미워하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관계가 생각나더군요."

대구시의 직권 취소 결정이 내려진 뒤 노조의 풍경도 많이 변화됐다. 노조 설립 당시 노조원은 16명이었지만 이제는 11명만 남았다.


"노조를 설립하고 나서 힘들었던 것은 삼성이 노조원들의 재산을 가압류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주택을 가압류당하는 바람에 어려워졌죠.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충분하게 어려운 점을 토로하면서 의견을 나눈 상태에서 나간 것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도 동감하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더 큰 어려움도 헤치고 살았는데 현재 상황이 최악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정 위원장은 오히려 앞으로 긴 호흡을 두고 고민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지금 당장은 약간 소강 상태에 들어갔지만 앞으로 장기전을 위해서라면 생계를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삼성이 웬만한 상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로비력'하면 다들 인정해주고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 상대와 싸움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죠.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최근까지 정 위원장은 퇴직금으로 생활을 꾸려오다가 결국 매형이 일하고 있는 건설업체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안티삼성' 맨이 된 이유는? - 삼성상용차 피해자 전국모임 공동대표 백학용 씨
ⓒ오마이뉴스 이승욱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계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백학용(41) 씨. 그가 '삼성상용차 피해자 전국모임'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얻게 된 것은 지난해 6월 구입했던 삼성상용차 1톤 트럭 <야무진>이 화근이었다. 지난 4일 만난 백 씨는 삼성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 비난으로 말문을 열었다.

"삼성상용차가 퇴출을 하면서 한마디 통보라도 했다면 이렇게 분하지 않습니다. 퇴출되더라도 구입한 트럭은 어떻게 보장해준다든지, 아니면 상황이 어렵다고 양해를 구하든지…. 그런데 아무런 말없이 할부금을 미뤘다고 독촉전화만 오더군요."

백 씨는 삼성상용차의 퇴출이 결정 난 이후 A/S보장, 부품공급 등의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할부금을 쉽게 내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사실 백씨의 말대로 삼성상용차에 대한 A/S와 부품공급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됐고 특히 최근 차량에서 중대결함 가능성이 발견됐다.

지난 2일 녹색소비자연대는 올 6월 삼성상용차의 1톤 트럭에 대한 리콜을 촉구하는 공문을 건설교통부에 보냈고, 최근 그 결과를 통보 받았다고 밝혔다. 건교부는 공문을 통해 "정비기록을 분석한 결과 제작 결함일 가능성이 크지만 설계도면과 정비 이력서를 확보할 수 없어서 정밀조사가 어렵다"고 밝혔다.

특히 건교부는 "삼성상용차가 파산한 상태에서 리콜 조처를 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난색을 표했고, 삼성 또한 이와 동일한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삼성상용차의 결함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현재 삼성상용차 퇴출 이후인 12월까지 판매한 1톤 트럭은 전국에 2만여 대에 이른다고 한다.

백 씨는 "삼성이 상용차가 퇴출하는 시점에서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는데 농협을 이용해 <야무진>을 농민들에게 대출까지 해줘 판매했던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백 씨가 타던 트럭은 정비업소에 맡겨져 있다. 최근 정씨의 차량이 추돌 사고로 파손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비소에 맡겨진 차량은 기약이 없이 늘 '주차상태'라고 백씨는 하소연했다.

"트럭 부품 중에 백미러는 보통 1만2천 원 정도면 살 수 있는데 삼성상용차 제품은 4, 5만원을 줘도 구할 수가 없고 설사 고친다고해도 폐차 부품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안전사고 위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품공급 문제와 A/S 문제 외에도 중고차량 가격이 현저히 내려간 상태에서 중고차를 팔 수도 없는 막막한 상황이라는 것이 삼성상용차 운전자들의 주장이다.

백 씨는 "퇴출 이후 삼성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분을 삭일 수가 없다"며 "기왕 시작한 일, 삼성처럼 부도덕한 기업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안티삼성' 운동을 할 것입니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40대 가장의 자살과 가족들의 고통-고 이상수 씨의 아내 김명숙 씨

지난 7월 22일자 연합뉴스에는 '실직비관 40대 투신 자살'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가 실렸다.

22일 오후 대구시 달서구 모 아파트 앞 화단에 이 아파트 7층에 사는 이모(41. 전삼성상용차 설비과장)씨가 숨져 있는 것을 경비원 유모(69)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씨가 지난 4월 실직한 이후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 왔다는 이씨 가족의 말로 미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이 기사에 밝혀진 피해자 이모 씨는 지난해 삼성상용차 퇴출 결정이 난 후 삼성상용차에서 삼성그룹내 모 계열사로 옮긴 후 지난 4월 30일자(퇴직원엔 4월 14일)로 퇴직한 이상수(41) 씨로 알려졌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뒤 약 6개월 후인 지난달 말 고 이상수 씨의 아내 김명숙(41) 씨는 삼성그룹노동조합 홈페이지(ww.samsungunion.ce.ro)에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남겼다.

"너무나 억울하고 온몸이 떨려 분노를 참을 길이 없어 글을 올린다. 남편이 (다른 계열사로) 전배를 가면서 1차로 전직된 인원들에 대하여 다른 근로자들이 배신자라고 비난을 받아 동료들 사이에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씨의 퇴직원에는 퇴직사유가 '신병(불면증 및 시력 저하) 및 업무 추진력 부족'이 이유로 적혀 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도대체 이 씨의 죽음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최근 대구에서 충남으로 이사를 간 김 씨와 어렵게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김 씨는 대화를 시작하기 무섭게 '너무 억울하다'는 말로 운을 뗐다.

김 씨에 따르면 남편 이 씨는 지난해 삼성상용차의 퇴출 이후 회사의 권유로 상용차에서 희망퇴직 후 다른 계열사로 전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 씨는 계열사에서 차장으로 일을 시작했고 이 씨와 가족들은 상용차 퇴출로 인한 불안감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긴 것은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난 3월경부터라고 한다. 당시 회사가 천안에 있었던 터라 주말에만 집에 돌아왔던 이 씨의 몸이 상당히 나빠졌던 것이다.

"시력이 나빠지고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하더군요. 그때야 그게 우울증인지 뭔지 아무 것도 몰랐죠. 그래서 이곳저곳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신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김 씨가 전하는 남편은 우울증에 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울증은 평소 배구, 족구 등 다양한 운동을 좋아하고 사교성이 좋았던 이 씨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김 씨는 남편의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계열사로 옮긴 후 받았던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김 씨는 "남편에게 물었더니 상관인 상무와 전무 사이의 알력 다툼 때문에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놓고 게다가 상용차에서 옮겨간 탓인지 부하 직원들도 협조를 거의 해주지 않는다면서 답답해 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남편이 죽고 난 후 같이 근무했던 동료 중 한 명이 유족에게 건넨 말은 김 씨에게 이씨가 자살한 원인을 확신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 동료는 유족에게 "직장 내에서 이씨에게 상관이 서류를 내던지며 무안을 주고, 이 씨의 제안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씨는 회사를 퇴직하고 말았다. 당시 남편은 "더 이상 회사에 남아 있으면 죽을 것 같다"는 하소연을 했다고 김 씨는 전했다. 하지만 그런 남편은 회사를 퇴직하고 난 후에 불면증과 시력저하 등은 치료가 어느 정도 됐지만 마음은 치유를 하지 못했다. 일요일 오전 큰딸 노을(17) 양에게 '산책 갔다' 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집을 나간 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회사에서 떠난 그에게 여전히 마음의 상처를 남긴 것인가. 유서를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가 죽은 이유를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취재 도중 만난 옛 삼성상용차 직원은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삼성상용차에서 1,2차 전배 기회를 얻어 다른 계열사로 옮겨간 사람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고충을 겪게 된다. 다른 계열사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 역시 다른 곳에서 옮겨간 사람들이 1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열사에 있는 일부 동료들 역시 상용차 출신을 경계하는 것도 있다. 어차피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일이다."

'투신자살'- 결국 삼성상용차 퇴직자 이씨는 자살을 선택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어떤 이유에서든 이 씨는 세상을 떠났고 아내와 두 딸 그리고 막내아들(7)이 남았다. 인터뷰 내내 흐느끼던 김 씨는 '삼성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떨린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삼성상용차가 망하고 나서 우리 가족들도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큰딸은 아버지가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가족들은 생계 걱정에 답답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성에서 왜 남편이 죽었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인지…. 그리고 남편의 죽음을 억울하게 우롱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죽고 싶을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은 고 이상수 씨의 차녀인 아경(15)양이 인터넷에 올린 편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빠를 생각하며...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에 살고있는 이아경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빠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모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희 아빠 성함은 이자 상자 수자 입니다.

며칠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에 믿기지 않았습니다. 회사와 집 밖에 모르던 아빠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만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아빠 따라 죽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사실 지금도 아빠가 많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지금 저희 가족은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그 고통이 더 해 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15살입니다. 다들 사춘기라고 하는 모든 게 혼란스러운 나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너무 큰 아픔이 다가와 버렸습니다.

사실 더 걱정되는 것은 동생입니다. 이제 7살 된 어린아이가 너무 일찍 죽움에 대해 많은걸 알아 버렸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니. 이제 고등학교1학년입니다. 정신없이 공부해야 할 나이인데 언니도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마 제일 힘드신 것도 엄마일겁니다. 아직 어린 동생도 있는데 살아갈 길이 막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까지 안 계시니 엄마는 아마 우리가 보지 않는 사이에 울고, 또 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우리 앞에서는 강한 모습만 보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서만은 편히 계셔도 괜찮은데... 정말 사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들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으시더라도 희망 잃지 마시고 힘내세요. 항상 밝게 웃으시고... 항상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구요 힘들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
구요. 그럼 이만. 꼭 힘내세요.

2001년 8월 17일

덧붙이는 글 다음은 고 이상수 씨의 차녀인 아경(15)양이 인터넷에 올린 편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빠를 생각하며...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에 살고있는 이아경이라고 합니다.
저희 아빠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모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희 아빠 성함은 이자 상자 수자 입니다.

며칠 전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에 믿기지 않았습니다. 회사와 집 밖에 모르던 아빠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실 분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만 사실이라는 것을 알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아빠 따라 죽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사실 지금도 아빠가 많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지금 저희 가족은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그 고통이 더 해 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15살입니다. 다들 사춘기라고 하는 모든 게 혼란스러운 나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너무 큰 아픔이 다가와 버렸습니다.

사실 더 걱정되는 것은 동생입니다. 이제 7살 된 어린아이가 너무 일찍 죽움에 대해 많은걸 알아 버렸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니. 이제 고등학교1학년입니다. 정신없이 공부해야 할 나이인데 언니도 많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마 제일 힘드신 것도 엄마일겁니다. 아직 어린 동생도 있는데 살아갈 길이 막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빠까지 안 계시니 엄마는 아마 우리가 보지 않는 사이에 울고, 또 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우리 앞에서는 강한 모습만 보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앞에서만은 편히 계셔도 괜찮은데... 정말 사는 게 너무 힘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들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으시더라도 희망 잃지 마시고 힘내세요. 항상 밝게 웃으시고... 항상 행복한 마음으로 그리구요 힘들 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
구요. 그럼 이만. 꼭 힘내세요.

2001년 8월 17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경북 오마이뉴스(dg.ohmynews.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5. 5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