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노조 37일 '산개투쟁'의 원동력?

[현장 인터뷰] 장기파업에서 잃은 것과 얻은 것

등록 2002.04.03 12:43수정 2002.04.06 19:27
0
원고료로 응원
▲종묘공원에서 만난 발전노조원 오승봉 씨 ⓒ임경환
발전노조 지도부로부터 37일 간의 '산개투쟁'을 마치고 가정과 직장으로 복귀명령을 받은 발전 노조원들. 1000여 명의 조합원들은 '복구명령'이 떨어지기 하루 전인 4월2일 종묘공원에서 열린 '총파업 결의대회' 무대 오른쪽에 모였다. 지도부가 '노정 합의안'에 대한 의견을 묻겠다고 소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주최의 이날 행사에서 쩌렁쩌렁한 투쟁가가 울려퍼졌지만 이들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 보였다. 가족과의 상봉의 기쁨보다는 '이산의 고통'을 감수한 투쟁치고는 노정 합의 결과가 불만족스럽다는 반응이다. 이로 인해 노조원들의 얼굴에선 분노와 회한이 교차하는 듯한 일그러진 표정이 역력했다.

기자는 2일 오후 5시, 종묘공원에서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에 참석한 남동발전 삼천포 화력지부 오승봉 씨(37)를 만나 그간 투쟁 과정에서 겪었던 심경의 변화 등 속내를 들어봤다.

- 이번 협상안에 대해 만족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부 제시안 가운데 '노조는 지난달 8일자 중앙노동위원회 중재재정을 존중해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에서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표현이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면 아예 얘기를 안 하겠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 37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우리 팀은 16명으로 구성됐고, 팀별로 움직였다. 잠자리는 찜질방이나 여관에서 해결하고 거기서 파업에 대해 분임토임하면서 보냈다. 파업이 장기화되니까 경비에 대한 압박감이 늘어나서 나중에는 민주노총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잠자리를 해결했다."

- 산개투쟁을 하면서 경찰에게 연행된 적은 있는가.
"연행된 적은 없다. 주위 사람 얘기로는 경찰에게 잡히면 복귀확약서를 쓰라고 강요를 한다고 했다. 만약 복귀확약서를 쓰지 않으면 24시간 꼼짝없이 경찰서에 붙들려 있어야 한다. 또 경찰에게 잡히면 회사로 이송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는 회사가 노조탈퇴서를 쓸 것을 종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 앞으로 회사에 복귀하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색할 것 같은데.
"앞으로 직속 상관을 형님이나 아버지처럼 따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전에는 상관이 시키면 양심에 맞지 않는 일도 하곤 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인간적인 신뢰가 없어졌다고 표현하면 맞을 것 같다. 또 파업 도중에 복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파업 도중에 복귀해서 자기 친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늦게 들어오면 짤리니까 빨리 들어오라'고 복귀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복귀한 사람이 회사에 우리들의 위치를 가르쳐주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오씨는 남동발전 삼천포 화력지부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파업기간 중에 가족의 소식은 전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가족을 자주 볼 수 없던 탓이다.
▲발전노조원들이 2일 오후 '합의안'을 들여다 보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산개투쟁 도중 가족은 몇 번 보았나.
"딱 한 번 봤다. 처음 파업에 돌입했을 때가 2월 25일이었다. 그때는 추워서 겨울 잠바를 입고 서울에 올라왔다. 나중에는 더워서 더 이상 겨울잠바를 입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옷갈아 입으려고 부산에서 가족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발전노조는 지난해 7월에 출범한 신생노조다. 발전노조가 산개투쟁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파업의 성공을 예측한 사람은 드물었다. 오씨도 처음 파업에 참가할 때는 3∼4일이면 끝나겠지라고 생각했단다.


- 산개투쟁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요인이라면.

"파업을 통해서 스스로 의식화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전력에 있었을 때는 한번도 파업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투쟁가도 못 불렀다. 그런데 파업이 시작되면서 왜 우리가 파업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또 노동자의 위치도 새삼 느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저 스스로 의식화가 됐다. 두 번째 이유는 조합원들의 분노가 컸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3일은 조합원들이 잊지 못하는 날이다. 그때 당시 전력노조위원장이었던 오경호 씨가 4500명이 모인 삼성동 강당에서 계속 정부와 협상중이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끝나고 두 시간 후에 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 조합원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또 발전 자회사 내에 새로운 노조 집행부가 생겼는데 회사는 노조 사무실도 주지 않고 전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조 집행부를 협상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합원들이 알게 된 거다.

그때 조합원들 사이에 울분같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허영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오늘 열린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발전노조 파업을 통해 국민의 80%가 발전소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여론을 만들어낸 것이 무엇보다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오 씨가 이번 파업을 통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24시간 맞교대로 근무하는 직원들이 생각났다. 정말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일을 했다. 전에는 이것이 불합리한 것인지 모르고 아무 소리 안하고 일해왔는데 이제는 맞교대 근무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느꼈다. 우선 이번 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대책위원회의 활동이 컸다. 사실 집에서 지원 안 해주면 시위 오래 못한다. 게다가 아침·저녁으로 시위하고, 홍보물 나눠주고, 서명운동 진행하는 등 힘든 일은 솔직히 가대위 분들이 다 했다. 어떤 사람은 파업 승리 못하고 오면 이혼이라는 말을 자기 부인한테 들었다고 했다."

인터뷰하는 사이 오 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오씨 형의 전화였다. 방송에서 파업타결 소식을 듣고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오씨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산개파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핵심요소(?)라고 하면서 말을 맺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같다. 인터넷이 가능하니까 어디에 있든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지침을 확인하고 가족 게시판에 써 있는 글을 보면서 힘을 얻을 수도 있었다. 또 멀리 떨어져 있어도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면 금방 모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인터뷰가 끝나고 오씨는 경찰의 연행을 피하기 위해 기자와 함께 종각역까지 동행했다. 오씨는 영등포 쪽으로 이동한다는 말을 남기고 또 다시 산개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