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사격장 존재 유무 논란

[개구리소년 현장취재] 50사단, '총기살해설' 제보자 고소

등록 2002.09.30 14:56수정 2002.10.14 17:4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4일 오전 경찰에서 언론사에 공개한 '산악수색요도'. 좌측 상세지도 중 빨간색 형광펜 부분이 유골 발견 지점. 그 밑(왼쪽)으로 '소총사격장'으로 표기된 부분이 선원지(원) 인근 사격장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 오른쪽 '소총사격장'(원은 망당지로 추정)은 군이 각개전투장으로 공개한 지점.
4일 오전 경찰에서 언론사에 공개한 '산악수색요도'. 좌측 상세지도 중 빨간색 형광펜 부분이 유골 발견 지점. 그 밑(왼쪽)으로 '소총사격장'으로 표기된 부분이 선원지(원) 인근 사격장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 오른쪽 '소총사격장'(원은 망당지로 추정)은 군이 각개전투장으로 공개한 지점.
<제20신:10월 5일 오전 10시>
" '비명소리' 들었다" 등 제보 확인 성과없어



4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수사본부’는 “와룡산 중턱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실종 직후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함 모(당시 11세)씨를 찾아 당시 제보사실에 대한 확인작업을 거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함씨를 조사한 결과 “당일 오전 10시쯤 동네 선배 등 5명과 함께 서제 부근에서 와룡산 정상으로 올라가다 비명소리를 들었다”면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일행과 함께 갔지만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내려왔다”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함씨가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곳이 유골 발견지점과 약 2km거리가 떨어져 있는 지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은 함씨가 당시 들었던 소리가 ‘악-’하는 비명소리였는지, 아니면 ‘야-호’라고 외치는 소리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당시 정황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 '개구리소년사건'과의 관련성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경찰은 이후 추가조사를 통해 함씨의 주장에 대한 사실성 여부와 개구리소년 실종과의 관련 여부를 따질 계획이다.


한편, 함씨의 제보와 함께 실종 당일 주민들이 ‘선원지’ 부근에서 낚시꾼 차림에 17~20세 가량으로 보이는 6~7명의 청년들을 봤다는 증언에 따라 당시 제작된 몽타주 등을 이용, 신원 및 관련성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벌써 11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 관련자들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제19신:10월 4일 오후 19시>
군 당국 "당시 항공사진에 제2사격장 없었다"
군사용 추정 지도엔 '제2사격장' 표기돼 '의문'



개구리소년 실종사건과 관련, '제2의 사격장'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자, 군 당국은 지난 3일 항공사진까지 제시해가며 '제2 사격장'에 대한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군사지도로 추정되는 한 지도에 제2사격장('소총사격장')으로 표시된 지점이 나타나 군 당국의 발표의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군 당국, 3일 항공사진 공개..."제2 사격장 없었다"

지난 3일 군 당국과 경찰은 개구리소년들이 실종하기 석달 전인 90년 12월에 유골 발견지점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을 공개했다. 이 항공사진을 공개한 군은 유골 발견지점에서 250여m 떨어진 '선원지'(현 성서고등학교 자리) 부근에 종합훈련장 내 사격장(0점, 반자동, 자동사격장)이 존재했다는 사실만 인정했을 뿐 별도의 사격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항공사진 공개 다음날인 오늘(4일) 경찰에서 나눠준 '산악수색요도'에 따르면 선원지 부근 '소총사격장'(Rifle range) 지점 외에 망당지(유골발견 현장에서 남쪽) 부근에도 '소총사격장' 표시가 기재돼 있다.

군사용 추정 지도, 제2의 사격장 표기

사진은 3일 군과 경찰이 공개한 유골 발견 지점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90년 12월)으로 아래쪽 흰색으로만 나타난 지점이 군이 '각개전투장'으로 확인한 지역.
사진은 3일 군과 경찰이 공개한 유골 발견 지점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90년 12월)으로 아래쪽 흰색으로만 나타난 지점이 군이 '각개전투장'으로 확인한 지역.
당초 군은 항공사진을 공개할 때 망당지 부근 '소총사격장' 표시 지점에는 군 관련 시설이 있었지만, 이 시설물을 '각개전투장' 자리라고만 밝혔다. 하지만 군은 50사단 사령부 부지와 종합훈련장(사격장), 각개전투장 등 항공사진에 촬영된 군 관련시설은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백지상태로 공개해 자세한 시설물을 확인할 순 없었다.

경찰은 최근 나머지 유류품과 흉기를 찾아내기 위해 유골 발견 인근에 방범순찰대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으며, 이 수색요도는 문제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색 범위를 표시한 것이다.

문제의 지도에는 '대구광역시'를 '대구직할시'로 표기해 이 지도가 직할시로 승격될 즈음인 81년도와 광역시로 개칭된 95년도 사이에 제작된 지도인 것으로 판단된다.

제2의 '소총사격장' 지점 표시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군에서 나온 지도를 쓴 것일 뿐 소총사격장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면서도 "만약 소총사격장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유골 발견 현장까지는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개구리소년과의 관련은 거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지도를 본 군 관계자는 "당시 촬영된 항공사진에는 주위에 민가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사격장이 있을 수는 없다"면서 "군에서 나온 지도도 아니며 신빙성도 떨어진다"고 일축했다.

반면 이 지도를 본 적이 있다는 산악구조대원은 "모 방송국 PD가 이 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면서 "지도에는 1/50000 축적과 '군사지도'라는 표시도 있었다"고 말했다. 1/50000 축적으로 계산해보면 유골 발견지점과 소총사격장 표시 지점은 대략 1km거리로 추정된다.

따라서 군이 사용된 지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면 실종 당시나 그 이전에라도 제2의 소총사격장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망당지 부근을 '각개전투장'이라고만 설명하고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망당지 부근 사격장 있었다" 증언 있어 의문

또 최근 제2사격장의 존재 여부가 관심을 모으면서 91년 실종사건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경찰 관계자에게서 "당초 군에서 확인한 선원지 사격장 위치가 아닌 망당지 부근에 사격장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 것도 실종 당시에도 망당지 부근에 '제2의 사격장'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인근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각개전투장과 사격장이 함께 위치하고 있었을 여지도 남기고 있다.

특히 지난 3일 경찰이 항공사진을 공개할 당시 '각개전투장'을 '0점사격장'으로 표기했다, 군 관계자의 항의를 받고 각개전투장으로 시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도 의혹을 짙게 한다.

한편 경찰은 4일 "항공사진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유골 부근에 '안산'(해발 약 45m)이 자리잡고 있어서 아이들이 서촌마을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사당 주변의) 5가구가 있었던 것도 이 집들이 동남방향으로 위치해 있어서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조난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찰은 유골 발견지점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을 계속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경찰은 유골 발견지점 인근 지역을 10개 구역으로 나눠 이 중 2개 구역에 대한 수색을 마친 상태다.

경찰은 이와 함께 지난 2일 발견된 은신처를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와 관련, 개구리소년 실종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사용자에 대한 신원확인 등을 위해 지문감식을 진행 중이다.

유골발견 현장에서 '구덩이'가 발견돼 경찰과 취재진을 긴장시켰다.
유골발견 현장에서 '구덩이'가 발견돼 경찰과 취재진을 긴장시켰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제18신:10월 4일 오전 11시>
50사단, `개구리소년' 총기살해설 제보자 고소


개구리소년들의 사인을 놓고 논란이 일고있는 가운데 육군 제50사단이 소년들의 '총기피살설'을 처음 제보한 사람을 검찰에 고소해 이번 사건이 민-군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낳고 있다.

50사단측은 4일 오전 '총기피살설' 제보자인 전직 구두닦이 출신 한 모(43.대구시 달서구 월암동)씨를 명예훼손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50사단측은 고소장에서 "한씨가 유포한 허위사실이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군 전체의 명예와 사기가 실추됐고 허위제보로 사단이 관련자 조사를 위해 다수의 인원을 동원하는 등 정상적인 부대임무 수행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피소사실을 알게된 한씨는 이날 오전 9시 30분께 수사본부가 차려진 대구 달서경찰서 성서파출소에 찾아가 자신의 신원을 노출시킨데 대해 경찰측에 격렬하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는 경찰에서 "익명을 전제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신고했을 뿐인데 경찰이 나이와 직업, 성씨 등 신원을 노출시켜 하루 아침에 거짓말쟁이가 됐다"고 항의했다.

<제17신:10월 3일 오후 1시 20분>
1인용 은신처 추정 구덩이 발견돼
유골 발견 지점 인근서..."대공혐의점 없어"


유골 발견 일주일째를 맞은 지난 2일 유골 발견 현장 부근에서 땅 아래에 묻혀 있는 1인용 '은신처'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발견돼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다.

2일 오후 5시 20분쯤 유골 발견 지점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200m 직선거리에서 수색작업을 벌이던 방범순찰대 소속 한 의경에 의해 인위적으로 땅속에 파 놓은 것으로 보이는 한 구덩이가 발견됐다.

경찰은 이날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던 개구리소년 조호연(당시 12세)군의 상의와 흉기 등을 찾기 위해 유골 발굴 현장 주변일대를 탐침봉으로 정밀수색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탐침봉으로 정밀수색 중 발견

구덩이에 경찰이 직접 들어가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구덩이에 경찰이 직접 들어가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이날 발견된 구덩이는 유골 발굴 현장으로 들어가는 세방골 입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분 여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이 구덩이는 다소 경사진 비탈면에 가로 1m, 세로 1.7m 규모로, 0.7m 깊이로 파여져 있었으며, 입구는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

또 구덩이 좌우 양쪽으로 선반을 만들 때 쓰이는 앵글이 박혀져 있었고 좌우 양면에 나무로 된 합판이 데여 있었다. 지표면과 비슷한 높이로 모기장, 돗자리, 스티로폼 순서로 덮어져 있었다. 또 그 위로는 낙엽 등으로 가려져 의도적으로 가린 흔적도 나타났다.

이 구덩이 안으로는 성인 한 사람이 누워있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확보돼 있었고, 밑으로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이와 함께 구덩이 안에서는 ▲가정에서 반찬 보관용으로 쓰이는 플라스틱 재질의 도시락통 여러 개 ▲97, 98, 99년 삼성 배구단의 3년 연속 우승 기념사진 ▲2000년 8월 4일자 <스포츠투데이> 신문 ▲99년 개업한 도서대여점의 도서목록표 ▲가방 등이 잘 정돈돼 있었다. 또 바깥쪽에는 부탄가스 깡통과 휴지조각 등이 담겨 있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묶여진 채 발견됐다.

구덩이가 발견된 후 5시간만인 이날 밤 10시, 군·경·국정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신문조가 현장을 감식했다. 현장조사를 마친 합동신문조 관계자는 "오늘 발견된 사람이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 움막(구덩이)은 대공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그 이유로 "움막 안에서 발견되는 제품이 국산용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물건이 99년 이후 제품으로 확인됐고, 북한 공작원이 은신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관계자는 "합동신문조에 의해 대공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이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수사본부가 인계 받아 (이 구덩이의 이용 목적 등을 밝히기 위한) 정밀검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합동신문조의 또 다른 한 관계자는 "소위 북 침투요원들이 만드는 '비트'는 L자형의 형태이고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없도록 관측이 용이한 지형에 만드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이번에 발견된 구덩이는 이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에 발견된 구덩이는 한 사람이 장기간 이용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아 하루, 이틀 정도 단시간에 이용하기 위해 만드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99년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따라서 이날 발견된 구덩이는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던 수배자들이 장기간 몸을 숨기기 위해 은신처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또 경찰은 구덩이 안에서 발견된 물건들로 보아 이날 발견된 구덩이가 적어도 99년 이후에야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이날 은신처로 보이는 구덩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를 취재하기 위해 현장을 찾으려는 언론사 기자들과 이를 막는 경찰간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미 6시쯤부터 현장 취재를 위해 세방골로 몰려든 기자들은 경찰이 "합동신문조가 모두 도착해야 현장을 공개할 수 있다"는 요청에 따라 밤 10시까지 현장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동신문조가 도착했지만 언론에 공개를 유보하고 나서 또다시 1시간 넘게 현장을 볼 수 없었다. 결국 이 과정에서 경찰과 기자들간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는가 하면, 몸싸움이 빚어졌다.

이에 대해 기자들은 "왜 현장조사 과정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느냐"면서 강력 항의했고, 경찰은 "합동신문조 관계자들이 현장조사 과정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혀와 출입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현장공개는 합동신문조의 조사가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뤄졌다.

왼쪽부터 고 김영규, 김종식, 박찬인, 우철원, 조호연군
왼쪽부터 고 김영규, 김종식, 박찬인, 우철원, 조호연군


<제16신:10월 2일 오전 8시>
"'개구리소년 총살설'등 신빙성 낮아"
'제2의 사격장' 존재여부 관심 쏠려


'총살설' 제보자, '거짓말' 판정..."들었던 사실만 말했을 뿐"

개구리 소년들, 명예졸업장 받게 되나
산악구조대원 "바위 밑 등에 숨는 게 상식"

◐...개구리 소년들의 모교인 대구 성서초등학교(달서구 이곡동. 교장 이승)가 최근 개구리 소년들의 학적부 처리와 관련해 명예졸업장을 주는 방안을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서초등학교 한 관계자는 "개구리소년들의 유골도 발견된 터라 아직도 처리되지 못하고 있던 학적부를 어떤 형태로든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2003년도 졸업식에 명예졸업장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성서초등학교는 지난 91년 3월 이 학교 학생인 개구리소년들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도 11년 동안 학적부를 파기하지 않고 아이들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성서초등학교는 이번에 발견된 유골이 개구리소년들의 것으로 확실시되자 지난 28일 방송조회를 통해 제자와 '선배'들의 명복을 비는 시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1일 오후 와룡산 속칭 세방골 유골 발굴 현장에는 산악구조 전문가인 최원식(대한산악연맹 산악구조대원)씨가 유골 발견 지점 등을 살펴봐 눈길을 끌었다.

최씨는 이날 유골 발견 지점의 지형을 둘러본 후 기자의 질문을 받고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체온 2˚c정도만 떨어지더라도 저체온 현상은 나타나며 여름에도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씨는 "만약 저체온 현상으로 사망했을 경우 서로 부둥켜안거나, 또는 사람의 체력에 따라 저체온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몸 상태가 좋은 사람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어린이의 경우에도 당시 비가 왔기 때문에 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바위 밑 등에 몸을 숨는 것이 상식"이라며 "지금처럼 골짜기 쪽으로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연사 추정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 이승욱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 6일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타살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간 경찰이 접수한 각종 제보들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돼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 1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수사본부'(본부장 조선호 차장)는 최근 <문화일보>를 통해 알려진 '개구리소년 암매장 제보'와 구두수선공 한모(43)씨가 제보한 '개구리소년 총살설' 등이 모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사실상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유골 발견 전날 <문화일보>에 직접 전화를 걸어 "개구리소년들이 한꺼번에 와룡산 부근 능선에 묻혀 있다"고 제보한 것으로 알려진 정모(40)씨를 현장으로 데려와 조사한 결과,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등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씨는 유골 발견 이후인 지난 30일 자진해서 문화일보 기자를 만나고 경찰에 출두한 바 있다.

경찰, '개구리소년 암매장 제보' '총살설' 등 "신빙성 낮다" 잠정 결론

또한 경찰은 "지난 7월 30-35세의 남자 1명이 찾아와 구두를 닦으면서 '군 생활 당시에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고 제보한 한씨에 대해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해 진실성 여부를 파헤쳤지만, '거짓말' 판정이 나왔다고 밝혔다.

경찰 한 관계자는 "거짓말 탐지기 결과를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지만, 거짓말로 판정이 내려짐에 따라 왜 한씨가 이런 제보를 하게 됐는지 그 의도를 집중 추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씨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라며 거짓말 탐지기 결과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현재까지 10여건의 제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신빙성이 떨어짐에 따라 지난 28일 수사본부를 확대개편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서자마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종당시 타살과 관련한 수사가 미비했고, 이미 11년의 세월이 지난 상황에서 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접수된 제보가 모두 신빙성이 떨어져 그만큼 어려움을 겪는 것. 경찰 한 고위관계자도 기자들을 만나 "11년이 지나 유골이 많이 상해 있어 법의학팀의 정밀 검사도 명백한 결과가 나오기 쉽지 않아 사건 해결에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선원지 사격장 외에 또 다른 사격장 있었다?

'제2의 사격장' 있었다면 위치는 어디?

유골 발견 장소에서 250m정도 떨어진 곳에 91년 당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사격장 외에 또 다른 장소에 (간이)사격장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 사격장의 존재여부와 함께 그 위치도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대구지역 일간지 <영남일보>는 지난 1일자 사회면에는 실종 당시 담당경찰들의 말을 인용해 "군부대 발표와 경찰이 기억하는 사격장 위치가 서로 달라 논란을 빚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영남일보>에 따르면 “실종 당시부터 사건을 전담했던 경찰이 기억하는 사격장 위치는 군부대측이 밝힌, 산 아래서 볼 때 유골 발굴 현장 왼쪽 저수지인 선원지 인근이 아니라 현장 아래쪽 망당지 부근으로 유탄이 날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수사 담당경찰의 말을 인용해 "한 경찰관은 '망당지 일대가 모두 현역이나 예비군들이 사용하던 군부대 사격장이었다'면서 '이곳에서 유골 발굴현장까지는 각도가 크게 빗나가지 않아 유탄이 날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런 보도 외에도 <오마이뉴스> 자체 취재 결과, 인근 주민들 중 일부가 "선원지에도 사격장이 있었지만 다른 못 부근에도 사격장이 더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주장에 따라 지형을 살펴보면 마을 주민들이 대략적으로 지목하는 곳은 당시 수사 경찰들과 마찬가지로 망당지 부근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당시 수사 경찰의 주장과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사건 당시 혹은 그 이전에라도 망당지 부근에서도 사격장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주민 일부는 "산이 가로 막고 있어 사고지점까지 총탄 등이 날아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는 등 부정적인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이승욱
한편, 유골 발굴 현장에서 250여m 거리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선원지 인근 군 사격장(0점, 반자동, 자동사격장)외에 '간이사격장'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간이사격장의 위치와 존재여부 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는 군 관련설로 의혹을 사고 있던 군 당국이 지난 1일 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도 일정정도 확인됐다.

이 자리에서 군 관계자는 "지난 71년 이전에는 간이사격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 이후는 확인을 해봐야 한다"고 말해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서는 주민들에게서 나오는 "선원지 옆 사격장 외에 또 다른 장소에 사격장이 있었다"는 증언과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군 사격장 이용과 관련해 인근 주민들이 "미군부대가 인근에 있었고, 미군이 사격장에서 자주 사격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지난 92년 50사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한 예비역병장(32)이 <오마이뉴스>에 제보한 "미군이 와룡산 사격장에 와 더러 사격을 하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는 주장과도 흡사하다.

또 실종 당일인 91년 3월 26일이 임시공휴일이었다는 점을 들어 한국군의 사격 훈련은 없었다는 군 관계자의 주장과는 달리, 주한미군의 사격훈련 여부와 관련해서는 "미군들이 사격장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건 당일 이용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해 의혹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한편, 지난 1일 경찰은 군 당국에 요청한 ▲사격일지 보존여부 ▲공식 및 비공식 사격여부 등 8개 해명 요구사항에 대한 답을 받았지만, 언론에 공개된 내용 외엔 별다른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6일째를 맞는 2일 수사본부는 유골 발견 지역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던 서촌마을 주민과 개구리소년들의 실종 당일 목격자 등을 불러 다시 조사를 벌일 계획이다.

<제16신:10월 1일 오후 2시>
다량 탄두 관련 군 당국 입장 발표
"부식 심해 91년 이전 사용 추정"


맨위 사진은 박격포탄의 탄피와 무더기로 발견된 탄두. 두번째 사진은 탄피가 달린 탄두. 세번째 사진은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탄두 2점. 맨아래 사진은 찌그러지고 녹이 슬어 있는 탄두. 유골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탄두 등은 부식이 심한 것과 원재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 등 부식정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맨위 사진은 박격포탄의 탄피와 무더기로 발견된 탄두. 두번째 사진은 탄피가 달린 탄두. 세번째 사진은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탄두 2점. 맨아래 사진은 찌그러지고 녹이 슬어 있는 탄두. 유골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탄두 등은 부식이 심한 것과 원재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 등 부식정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유골 발견 현장 일대에서 발견된 다량의 탄두와 관련해 군 당국의 공식입장이 나왔다.

육군 50사단은 탄약 전문부대에 확인한 결과, 현장에서 최근까지 발견된 탄두 6종, 145발은 M16, M1, 칼빈탄, LMG 30탄, 탄피 등인 것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군은 "발견된 탄두의 부식이 심한 상태로 보아 실종 당시인 91년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다 명확한 탄두 사용 시기 확인을 위해 경찰 협조하에 국과수에 의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다량의 탄두가 유골 발견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것과 관련해서는 3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군이 제기하는 첫번째 가능성은 군 사격장 부지 매입 연도가 56년, 71년, 81년인 점을 고려해 81년 이전까지 사격장 제한으로 사격장 부근(유골 발견 현장 포함)에서 간이 사격장을 설치하여 사격을 했을 것.

두번째 가능성은 81년 이전까지 완벽한 시설을 구비하기 이전 피탄지 일대에 안전·방호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 유탄이 광범위하게 퍼졌을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근무자 확인 결과, 사격장을 포함한 종합훈련장 외곽 울타리가 없어 청소년들이 사격장 주변 일대에서 주워 놀았을 가능성 등을 제기했다.

하지만 50사단은 "이런 가능성을 입장할 근거 자료는 보존 기한(사격일지 1년, 부대일지 3년) 초과로 확인할 방법이 없어, 과거 사단 근무 인원 등을 중심으로 탐문·확인 작업을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문제는 있다. 부식이 심하다는 주장하는 데 반해 145개의 탄두 및 탄환 등의 부식 상태는 그 정도가 모두 달라 부식이 심하지 않은 것도 발견된다.

또 군이 첫번째 가능성으로 제기한 '간이사격장'설치와 관련해 군은 지금까지 "유골 발견 현장은 부대용지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인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군의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50사단은 일부 언론의 '군이 경찰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는 보도와 관련해서는 "경찰과 긴밀한 협조체계를 유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보도가 나와 유감스럽다"면서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경찰수사에 협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軍, '총기살해 있을 수 없는 일'
육군 제50사단 기자회견

(대구=연합뉴스) 육군 제50사단은 1일 "총기살해 같은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었다 하더라도 10년 이상 은폐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단은 이날 개구리소년 추정 유골 발굴 현장 인근에서 탄두와 탄피 140여발이 발견되고 군과 관련한 각종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대구지방경찰청에서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말했다.

사단은 또 ▲지난 91년 당시 사격장의 위치와 규모 ▲사격장 개설 및 운영기간 ▲사선에서 유골 발굴 현장으로 유탄이 날아갈 가능성 ▲비공식 사격장의 존재 유무 ▲사격일지 보존 유무 등 경찰측이 의뢰한 8가지 질의사항에 대한 답변서를 대구지방경찰청에 제출했다.

사단은 특히 부대가 40여년간 용산동 일대에 주둔해 유골 발굴 현장을 비롯한 와룡산 곳곳에서 탄두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아 이날 오후부터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추가로 탄두 및 탄피 발굴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다음은 사단 작전참모 라정연 중령과 일문일답.

- 개구리소년 실종 당일인 지난 91년 3월 26일 부대내에서 사격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나.
"실종 당일은 지방자치단체 선거일로 임시공휴일이었고 당시 사격장 관리자였던 사단 주임원사도 훈련사격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 훈련사격이 아닌 개별적ㆍ비공식적 사격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나.
"후방지역에서 비공식적이거나 개별적인 사격은 없고 개별적으로 총기를 휴대하고 영내를 이탈했다면 무장탈영이 되기 때문에 그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 당시 사격장 관리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사격장 주변으로 철책은 없었지만 표식주와 경고 안내판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격을 할 때는 방송 또는 사이렌으로 주민들에게 알렸다. 또 사격장 주요 진입로에는 경계병들을 배치했다."

- 당시 미군이 사단 사격장을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건 당일 미군의 사격장 이용 여부는 확인했나.
"미군들이 사격장을 이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건 당일 이용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 유골발굴 현장 인근 지점에 간이사격장이 설치됐는지 확인됐나.
"지난 71년 이전에는 가능성이 있지만 그 이후는 앞으로 확인해 보겠다."

- 사격장 사선에서 유골 발굴 현장으로 총알이 바로 날아갔을 가능성은 있나.
"전혀없다."
/ 이덕기


<제15신:9월 30일 오후 19시 37분>
"사격장에 놀러간다는 말 들었다"
경찰, 개구리소년 친구 진술 확보


지난 28일 개구리소년의 친구인 오 아무개씨로부터 '개구리 소년들이 총알을 주으러 사격장에 갔을 것"이라는 제보를 접수한 데 이어 사격장에 가는 개구리 소년을 목격한 증언이 추가로 나왔다.

30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수사본부(본부장 조선호 차장)는 개구리 소년들의 친구인 이 아무개(22)씨로부터 "실종 당일 오전 9시경 개구리소년들이 사격장으로 놀러간다는 말을 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28일 경찰과 법의학팀이 공개한 유골 중 총알 관통 및 상처흔적이 있는 두개골을 법의학팀 관계자가 들고 있다. 두개골 오른쪽 아래에 3-4cm 크기의 구멍이 나 있고 반대편에는 1cm 가량이 구멍이 나 있다.
28일 경찰과 법의학팀이 공개한 유골 중 총알 관통 및 상처흔적이 있는 두개골을 법의학팀 관계자가 들고 있다. 두개골 오른쪽 아래에 3-4cm 크기의 구멍이 나 있고 반대편에는 1cm 가량이 구멍이 나 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또 인근 주민 박 아무개(34)씨는 "탄피줍기 위해 유해 발굴 현장에 간 적이 있었다"고 경찰에 증언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경찰은 "개구리 소년 총살 당했다"는 제보를 한 것으로 알려진 전직 구두닦이 한모(43. 무직)씨와 유골 발견 최초 제보자인 최환태 씨를 불러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한씨가 밝힌 제보내용이 최씨로부터 나온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유골 발견 전에 <문화일보>에 제보를 한 것으로 알려진 정모(40)씨를 서울경찰청에서 인계받아 대구 수사본부에서 확인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한편, '유골 발굴지의 탄피 등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오던 육군 50사단은 현재 당시 관계자들로부터 사격장 관리와 실종당일 사격훈련 여부 등을 조사하며 대책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군 관계자는 "아직 공식입장이 정리되지 않아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면서 "조만간 공식입장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14신:9월 30일 오후 6시>
"길 잃고 헤매다 자연사" 빈틈 많아
시간 갈수록 짙어지는 타살 의혹들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 5일째를 맞은 가운데 소년들의 사인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사인으로 가장 논란을 빚고 있는 부분은 '자연사', '타살' 등 크게 두 가지. 하지만 사건 초기 경찰의 '자연사' 추정과 관련한 반론들이 제기되는 데다, 두개골의 총알 관통이 의심되는 등 타살 의혹이 점차 짙어지고 있다.

유골 발견지점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 -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사 현장 부근과 근래 생긴 앞 도로까지 논과 밭이 많이 있었고 한다.
유골 발견지점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 -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사 현장 부근과 근래 생긴 앞 도로까지 논과 밭이 많이 있었고 한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서촌마을 주민에 따르면 사진 중 숲 바로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현재 개축 중인 사당. 당시에도 이 자리에 작은 사당이 있었고, 부근에 5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다. 서촌마을 가옥이 중심적으로 모인 곳은 이 사당과 뒤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 중간 지점.
서촌마을 주민에 따르면 사진 중 숲 바로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현재 개축 중인 사당. 당시에도 이 자리에 작은 사당이 있었고, 부근에 5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다. 서촌마을 가옥이 중심적으로 모인 곳은 이 사당과 뒤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 중간 지점.오마이뉴스 이승욱

경찰은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 최초 발견된 직후 "타살 흔적이 주위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저체온' 현상에 의한 자연사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자연사 추정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짚어보자. 일단 아이들의 연령대로 봤을 때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또한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들이 와룡산 일대를 자주 놀러다녔기 때문에 '길눈'이 어둡지 않다는 점이다.

"유골 발견지점에서 길 잃을 이유 없다" 마을주민 입모아

무엇보다 유골 발견 지점의 당시 지리적 환경이 '길을 잃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오마이뉴스> 자체 취재 과정에서도 확인됐다.

현장으로부터 남동쪽 약 500~600m 거리에 91년 당시 40여 가구가 살고 있었던 일명 '서촌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 이곳은 아파트와 단독주택 밀집지역으로 변했지만, 아직도 전통 기와집 10여 채가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서촌마을의 위치를 짐작케 했다. 그리고 또 이보다 더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서촌마을 살고있는 정영식(61. 달서구 용산동)씨는 "아이들이 발견된 지점에서 서촌마을 사이에 한 문중의 사당이 있었고, 그 주변에 5~6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씨가 증언한 사당은 현재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요즘은 개축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 사당은 유골 발견 지점과는 직선거리 100~200m로 매우 가까운 편이다.

과거 서촌마을 중심지. 현재도 10여가구의 한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산이 유골 발굴 현장.
과거 서촌마을 중심지. 현재도 10여가구의 한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빨간 벽돌 건물 뒤편으로 보이는 산이 유골 발굴 현장.오마이뉴스 이승욱

정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면 발견 지점과 마을 사이에는 논과 밭들이 자리가 잡고 있어서 시야가 충분히 확보됐을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만약 아이들이 그곳에서 길을 찾았다면, 마을을 보지 못했을 수 없고 마을 뒤편 고속도로 불빛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정씨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주민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발견지점 가까운 거리에 인가 있었다"

당시 발견 현장 주변 지리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는 박노석(52. 용산동)씨는 "서촌마을과 이곳(발견지점) 사이에는 대부분 낮은 산들이 이어져 마을까지 이어지는 모양이었고, 그 사이에는 뽕나무밭과 논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왜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마을을 찾아 올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의구심을 나타냈다.

또한 자연사를 사인으로 삼는 것에 문제점으로 나타나는 것은 11년이 지나도록 아이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경찰은 "애초 유골 발견지점이 수색집중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었다. 또 "자연사 이후 사체 위로 흙과 돌, 낙엽 등이 쌓이게 되면서 사체를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유골 발견지점도 마을주민들이 수색을 한 바가 있다"고 반박했다. 특히 유족들은 "일부 유족이 헬기를 타고 와룡산 일대를 살폈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현재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등이 즐비하고, 수고 5m 이상씩 자라나 있는 것에 비해 11년 전 당시에는 사람 키만한 나무들만이 산을 메우고 있었다는 게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인근 주민 이종원 (43. 당시 이곡동 거주) 씨는 "당시만해도 사격장에서 나오는 오발탄 등으로 인해 와룡산에 산불이 빈번히 일어나 민둥산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실종 이후 용산지구 개발을 위해 묘지를 대거 이장했다. 유골 발굴 현장 바로 위에도 묘지터가 발견된다.
실종 이후 용산지구 개발을 위해 묘지를 대거 이장했다. 유골 발굴 현장 바로 위에도 묘지터가 발견된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용산지구 개발을 앞두고 90년대 초반부터는 이 일대에서 묘소이장이 많았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유골이 발견 지점으로부터 산능선 쪽으로 5m거리에 있는 도아무개씨의 묘가 93년에 이장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장을 할 당시 인부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은 타살 후 암매장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사가 '빈틈'을 많이 보이고 있는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타살의혹에 대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타살의혹 대표적인 예는 1)사체 1구, 체육복 상·하의 상태 2)두개골 등 상처 의심 흔적 3)인근 사격장과의 관계 등이다.

무엇보다 발굴 이틀째에 발견된 유품 중에서 김영규군의 체육복 상·하의가 벗겨진 채 두 번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는 점은 타살의혹을 증폭시켰다. 김군의 상의는 배 부분이 머리 위로 벗겨지고 매듭이 묶여져 있던 곳에 두개골이 담겨 있었다. 하의는 무릎 아래 부분이 형태를 지니고 있었지만 유골은 없었다.

묶인 옷은 아이들 포박하는데 사용?

일단 법의학팀은 "본인이 묶을 수도, 남이 묶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정확한 원인규명은 정밀 검사 뒤로 미뤘다. 또 '저체온' 현상을 겪는 경우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범인이 아이들을 포박하는데 아이들의 옷가지를 이용했을 개연성을 낳고 있다.

뿐만 아니라 총알 관통 흔적과 두개골의 훼손이 사망 당시 외부충격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도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는 유골 발견 현장이 아니더라도 사격장에서 발사된 탄두 등에 의해 사격장 인근에서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골 발굴지점에서 뒤편 산등성이 너머엔 과거 사격장이 있었던 자리. 사진 오른쪽 아파트 단지가 과거 사격장 자리. 사격방향은 이곳에서 와룡산 산정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골 발굴지점에서 뒤편 산등성이 너머엔 과거 사격장이 있었던 자리. 사진 오른쪽 아파트 단지가 과거 사격장 자리. 사격방향은 이곳에서 와룡산 산정상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현재(29일)까지 발굴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탄두(찌그러진 형태 포함) 등은 90여 점에 이른다. 이는 군 당국에서 초기 "발견된 탄두 등이 군부대의 사격훈련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 것을 뒤집을 만하다. 애초 군 당국은 당시 사격장의 사격방향과 유골발굴 현장이 45°각도로 비껴 있었고, 150m 산등성이를 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최근 늘어나는 사격장 관련 제보

당초 개구리소년들이 "도롱뇽을 잡으러 간다"는 것과 달리 탄두·탄피 등을 줍기 위해 사격장 인근에까지 갔을 가정도 세울 수 있다. 최근 개구리소년의 같은 학교 친구인 오 아무개 (23)씨가 "총알 주으러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제보하는 등 최근 들어 부쩍 군과 관련한 증언·제보 등이 잇따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인근 주민 오창율(43)씨는 "사격이 시작되면 싸이렌이 울리고 경고 방송을 해 들어갈 엄두를 못 낸다"면서 "하지만 사격이 끝나고나서 탄피를 줍는다면 훈련장 표식을 넘어 들어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28일 경북대 의대에서 법의학팀에 의해 공개된 유골 및 유품. 사진은 김종식군이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점퍼 등이다.
28일 경북대 의대에서 법의학팀에 의해 공개된 유골 및 유품. 사진은 김종식군이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점퍼 등이다.오마이뉴스 이승욱
<13신:9월 30일 오후 3시>
경찰, "개구리 소년 총살됐다" 제보받고 수사중


11년만에 유골로 발견된 이른바 '개구리소년'들이 총살됐다는 언론보도가 잇따라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30일자 석간 <문화일보>는 지난 25일 문화일보 편집국에 "대구 와룡산에 개구리 소년들이 한꺼번에 묻혀 있다"며 첫 제보한 정모(40)씨를 단독으로 만나 정씨의 진술내용을 보도했다.

<문화일보> 보도에 따르면, 정씨는 "개구리소년들은 6공 정권 당시 강경대 김기설 사건 등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살해한 것"이라며 "'범인들에 대해 들은 얘기를 진술하겠다'며 경찰에 자진출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경찰에 따르면 제보자 정모씨는 실제 이 사건과 연관이 없고, 근거없는 추측 제보전화를 했던 것으로 조사결과 밝혀졌다.

한편 30일 <연합뉴스>는 "(성서초등생 실종사건) 수사본부에 따르면 구두닦이 일을 했던 한모(43. 무직. 대구 달서구 월암동)씨가 '지난 7월 30-35세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 생활 당시에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고 제보,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이 제보 내용과 관련해서는 "한씨는 이 남자가 '사격중 5명의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이중 1명이 숨지고 1명은 다쳤으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을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으로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러한 보도에 대해 수사본부는 불만을 나타냈다. <연합뉴스>의 보도 진위여부에 대해 묻자 수사본부 조선호 본부장은 "<연합뉴스>를 보고서야 내용을 알았다"라면서 수사 자체를 극구 부인하고, "언론이 오히려 경찰 수사에 방해가 된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한편 경찰은 유골발굴 초기 '자연사'를 추정했으나 발굴 도중에 여러가지 타살의 정황이 나타나면서 유족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고 수사본부를 확대하는 한편 전면 재조사에 돌입했다.

특히 경찰은 발견된 유골 5구 가운데 1구의 두개골 정수리 왼쪽 뒷부분이 함몰되고 얼굴 부분에 2개의 구멍이 나타난 점,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될 당시 사체 위에 장방형 돌이 눌려져 있던 점 등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이고 있다.

<12신:29일 오후 6시 20분>
경찰, "7대 의혹 중점적으로 수사할 것"


유골 발견 4일째인 29일,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을 맡고 있는 수사본부(본부장 조선호 대구시경 차장)은 향후 수사방향과 관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사인규명에 나설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앞으로 7대 의혹을 중점적으로 수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이 발표한 7대 의혹은 다음과 같다.

1)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였음에도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2) 아이들이 지형에 익숙하고 다섯명이나 되는 인원이 왜 길을 잃어버렸나.
3) 유골 발견 현장까지 아이들이 온 이유는 무엇인가.
4) 600m 거리에 고속도로가 있어 밤에도 불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주장.
5) 마지막 발굴된 유골(김영규 추정)에서 나타난 옷소매 등이 묶여진 이유는.
6) 발견 현장 주변으로 탄두 등이 다량 발견돼 유탄에 맞았을 가능성은 없나.
7) 왜 무거운 돌 밑에 유골 등이 깔려 있었나.


한편, 경찰은 이날 지금까지 의문을 낳고 있던 현장 발견 당시 사진을 언론과 유족에 공개했다. 현장에 출동한 파출소 직원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에는 유골 한점, 의류로 보이는 물체, 그리고 바로 옆과 위쪽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네모난 돌 등이 찍혀 있었다.

또 이날 오후 2시 30분에는 아시안게임 참석차 부산에 내려가던 이근식 행정자치부 장관과 조순용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발굴 현장을 찾았다. 이 장관 등은 이날 현장을 찾기에 앞서 수사본부(성서파출소)에 들러 수사 진행상황을 들었다.

이날 이 장관 등이 현장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족 대표인 김현도(김영규 아버지)씨가 "제가 말씀한 마디 올리겠다"고 운을 뗀 뒤 "처음에는 가출로 몰아 수색을 제대로 안하더니 이제는 자연사로 몰아붙이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수사과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사인규명을 위해 열심히 애써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장관 일행은 "사인규명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바쁜 일정 탓인지 만남을 가진지 약 3분만에 자리를 뜨고 말았다.

한편 이날 현장 발굴팀은 탄두 20여점과 함께 발굴 지점에서 근접한 거리에 비닐 재질의 빵봉투(콘티빵-단팥빵/ 30원 표시) 한 점을 발견해 정밀 감식에 들어갔다.

<11신:29일 오후 1시 00분>
발굴 두개골 일부 상처 의심부분 보여
91년 수색미비 이어 '자연사 추정' 구설수

- 28일 발굴 중 현장 주변 54개 탄두 등 추가 발견

개구리 소년 중 한 아이에게서 나온 장남간 인형이 주인을 잃은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개구리 소년 중 한 아이에게서 나온 장남간 인형이 주인을 잃은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28일 오후 7시, 발굴 유골이 옮겨져 있는 대구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중구 동인동)에서는 사인규명을 맡고 있는 법의학팀(단장 곽정식 교수)과 경찰이 수집된 유골과 유품 등을 유족과 언론에 공개했다.

50평 남짓한 실습실 중앙으로 5개의 테이블에는 각 소년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과 옷 등 유품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대부분의 유골 및 유품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옷가지의 비닐 재질의 부분은 전반적으로 벗겨져 있거나 색이 바래있어 11년 세월의 깊이를 보여줬다.

법의학팀 한 관계자에 따르면 “지금까지 중요한 단서가 될만한 유골 등은 거의 발굴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날 실습실을 찾은 유족들은 진열된 유골을 보자 가슴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흘려 아직도 가시지 않는 아픔을 내비쳤다. 한 유족은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며 한숨만 내쉬는가 하면, 또 다른 유족은 붉은 줄무늬 T셔츠를 보자 “이건 아들 옷이 맞다”고 말하기도 했다.

법의학팀 채종민 교수는 “발굴시 옷에 붙어 있던 유골을 분리하고, 착용했던 옷과 뼈의 크기 등 특징적인 것을 나눠 따로 정리해 둔 것”이라면서 “육안으로 살펴봤을 때는 아직까지 유골 등에서 특별한 상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또 타살여부, 사인규명 가능성에 대해서는 “검사중”, “알 수 없다”고 간단히 답했다.

유족 한 명이 아들의 양말로 보이는 유품 앞에서 말을 잊은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유족 한 명이 아들의 양말로 보이는 유품 앞에서 말을 잊은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러나 이날 공개된 유골 중 총알 관통이 의심되는 상처 등이 발견돼 이것이 타살로 인한 상처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발굴된 5점의 두개골 중 한 개가 좌우 양측(약 1cm, 4cm정도)에 구멍이 나 있었던 것. 이에 대해 법의학팀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총알을 맞은 두개골의 관통 부위에서 골절현상이 나타나고 탄알이 지나간 안쪽과 바깥쪽의 모양이 틀려지기 때문에 이 두개골에 나타난 구멍은 탄알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왜 구멍이 생긴 것인지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다.

또 같은 두개골에서 좌측상단 부분에서 발견된 약 2cm크기의 움푹 파이고 갈라진 흔적도 발견이 됐다.

이에 앞서 발굴 첫날 발견된 4개의 두개골 중 하나는 갈라지거나 떨어져나간 흔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법의학팀은 "두개골도 관절로 연결돼 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관절이 약해지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두개골의 훼손된 상처 흔적이 사망 전에 입은 상처로 밝혀질 경우 타살 증명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처로 의심되는 부분에 대해 법의학팀 관계자는 "(돌 등 부딪혀) 유골이 훼손됐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어 정밀 검사를 진행해 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법의학팀은 법치 의학적 검사 등을 완료한 상태로 현재는 사체가 옮겨졌을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는 곤충학 검사를 진행하고 있고, 방사선 촬영을 추가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의학팀은 최종 신원확인을 위한 종합판정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약 3-4주가 더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편 91년 '개구리 소년들'의 실종 직후 수색작업 미비 등 당시 경찰의 수사에 문제점이 지적된 가운데 이번에는 유골 발굴 당시 자연사로 추정한 경찰 당국의 ‘섣부른’ 발표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지난 26일 유골이 처음 발견된 직후부터 다음날 2차 발굴이 있을 때까지 경찰은 ‘저체온’ 현상에 의한 자연사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는 1차 발굴이 끝난 달서경찰서에서 작성한 수사상황 보고서에서도 나타난다.

이 보고서에서 경찰은 “실종 당시 두 끼를 거른 상태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비를 피하기 위해 유골이 발견된 지점에 모여 있다, 기온이 급히 떨어지므로 저체온 현상으로 사망 또는 암벽이 무너져 매몰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당시 경찰은 ‘단정적인’ 언급은 피하고 “국과수 등의 합동 감식이 있어야 정확한 사인이 판단될 것”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유골의 발굴이 모두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내린 사건추정이 ‘화근’이었다. 다음날 유족들은 “경찰이 사건 수사를 빨리 매듭짓기 위해 자연사로 추정하고 있다”면서 발끈했다.

타살의혹을 짙게 하고 있는 2번의 매듭으로 묶여진 채 발견된 한 소년의 체육복 하의를 경찰 관계자가 들어보이고 있다.
타살의혹을 짙게 하고 있는 2번의 매듭으로 묶여진 채 발견된 한 소년의 체육복 하의를 경찰 관계자가 들어보이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승욱
유족들의 반발은 지난 91년 실종 직후 수사 초기에 경찰이 ‘가출’로 가닥을 잡아갔던 과정을 상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와룡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작업은 사건 발생 7개월만인 같은 해 10월 중순경에야 이뤄졌다.

결국 장기 미제사건에 대한 해결에 급급한 나머지 자연사로 결론지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야했다. 유족들은 “최초 발견자가 유골이 큰 돌에 눌려져 있었다고 증언하고, 발견 지점에 대해 과거에 유족들이 찾아본 적이 있었던 점 등 의혹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면서 “그런데도 경찰이 저체온으로 인한 자연사로 추정하고 언론에 흘리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자연사 추정이 유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데다, 2차 유골 발굴 과정에서 실종자의 옷이 묶여진 채 발견되고 탄두 · 탄환이 다량 발견되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사인규명에 나설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했다.

28일 대구지방경찰청 조두원 수사과장은 “이번 사건이 국민적 관심사이기 때문에 11년 전 수사기록을 면밀히 재검토하고, 다양한 가정을 두고 전문가들의 세밀한 판단을 바탕으로 사인 규명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조 과장은 “당시 제보 중 허위 제보인 부분도 있고, 애매한 부분도 많다”면서 “허위라는게 확실치 않으면 면밀히 재수사 할 것”이라고 밝혀 경찰의 전면적인 재수사 의지가 어떻게 구체화될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28일 하루에만 탄두 54개 추가 발견
유족들, 초기 현장보존 · 1차 발굴 과정 의혹 제기

◐... 28일 대부분의 유골이 발굴된 상태이지만 대구 와룡산 현장에서는 3일째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특히 이날 발굴에서 또 다시 다량의 탄두 등이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경찰은 “유골 발견 지점으로부터 반경 150m 이내에서 모두 54개의 탄두 등이 추가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날 추가 발견된 탄두 등은 일부 찌그러져 있거나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이 중에는 지금까지 발견된 것보다 다소 큰 길이 약 10cm가량의 박격포용 탄피로 보이는 금속체도 포함돼 있었다.

탄두 등이 추가 발견됨에 따라 지난 27일 발견된 12개(유골 근접 2개 포함)와 함께 지금까지 유골 발견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탄두 등은 모두 66개로 늘어났다. 이는 이 주변에 다량의 탄두가 흩어져 있을 가능성을 높이는가 하면, 군 당국 측에서 주장하는 “현장에서 발견된 탄두와 군은 무관하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결과이다.

◐... 발견 3일째로 접어들면서 경찰의 현장 보존과 초기 유골 발굴이 이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고 있다.

이러한 의문은 최초 목격자의 신고 이후 경찰의 유골 수습과정이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데다 경찰 관계자들의 말도 엇갈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 또 유족들은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1차 유골 발굴이 마무리된 상태였다"면서 “왜 발견 초기부터 원상태 그대로의 현장을 보여주지 않았느냐”고 원성을 높이고 있다.

이에 따라 28일 경찰 관계자는 “현장 보존과 초기 유골 발굴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확인한 후 곧 설명하겠다”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발굴 전 현장 상태를 담은 사진을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이승욱


타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옷의 팔과 다리 부분이 묶여진 채 발견된 옷가지
타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옷의 팔과 다리 부분이 묶여진 채 발견된 옷가지오마이뉴스 이승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구경북 오마이뉴스(dg.ohmynews.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3. 3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4. 4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블랙리스트에 사상검증까지... 작가 한강에 가해진 정치적 탄압
  5. 5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이충재 칼럼] 농락당한 대통령 부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