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큰아들은 의대 3학년이고, 작은 아들은 '신의 아들'이 아니어서 군대에 가 있어요. 공군에 자원 입대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의 입사 동기였던 이 선생과 우연찮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가운데 당시 유치원에 다녔던 이 선생의 두 아들이 궁금했다. 이메일로 보내온 아이들의 근황에서 이선생은 그렇게 적고 있었다. '신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의 아들이어서...'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엔 아들의 종류가 둘로 나뉘게 되었다. '신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
내게는 바로 '사람의 아들'인 오빠가 둘 있었다. 나랑 두 살, 네 살 터울인 오빠들. 그 아래로 나와 여동생이 있었다. 이렇게 2남 2녀를 둔 나의 부모님은 조용한 어느 도청 소재지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게 무슨 말인가. 세금 내라고 하면 내고, 군대 가라고 하면 가고, 예비군 훈련받으러 오라고 하면 가고, 과외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고, 예식장에 화환 몇 개 이상 내걸지 말라고 하면 들어온 화환도 안 보이게 감춰버리고... 이렇게 국가의 지시에 따르는 삶을 사셨다는 거다.
두 오빠들 역시 그런 소시민의 자식인지라 아무런 불평 없이 군대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교련을 이수한 뒤라 6개월이 단축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현역 입영대상자로 1급갑 판정을 받은 큰오빠는 1979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7월 9일 입대를 하였고, 작은 오빠 역시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시 공무원으로 7개월여 근무를 하다 큰오빠에 이어 같은 해 9월 7일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두 오빠들의 입대 날짜가 월(月)과 일(日)만 바뀌어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군대에 갔다.
오빠들이 없는 집엔 나와 여동생, 부모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집이 좀 쓸쓸했지만 이미 집을 떠나 서울 생활을 한 오빠들이었던지라 오빠들의 부재가 그리 큰 섭섭함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이따금씩 내려오던 오빠들을 몇 년 뒤에나 볼 수 있다는 게 좀 아쉬울 뿐이었다.
고지식한 나의 부모님 역시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진짜 사나이라면 모두 다 가야 하는 게 군대'라는 생각을 하고 계셨던 듯 크게 서운해하시지는 않았다. 국군의 방송에서 가끔 이런 노래도 들으셨을 테니까.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은 국방부의 시계가 좀더 빠르게 가기만을 기다리며 허전함을 달래고 계셨을 것이다. 세월이 묘약인 군대 생활. 2년 3개월만 지나면 사랑하는 아들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군 미필자의 딱지를 뗀 자랑스러운 두 아들들은 넥타이에 양복을 입은 월급쟁이로 복귀할 것이고, 참한 색시를 만나 결혼도 하고 떡두꺼비같은 손주도 보게 될 것이라는 소박한 꿈을 꾸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 세월만 지나면 이 꿈은 이루어질 거야. 쏜 화살 같이 빨리 가는 게 시간이니까.'
이렇게 오빠 둘이 군대에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형제분 중 가장 세련되고 사회성이 뛰어난 부산 이모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하모, 언니야. 어찌 피 같은 아들 둘을 군대에 다 보내노. 하나쯤은 돈주고 빼 뿌리라. 둘 다 보내고 허전해서 어찌 살라꼬."
하지만 나의 부모님에게는 돈을 주고 군대에서 자식을 빼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런 돈도 없으셨겠지만 그 따위 해괴망칙한(?) 일이란 아예 그분들 머리 속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가.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 사적인 얘기를 덧붙이는 걸 용서해 주시길...
지방행정직 사무관으로 만기 정년퇴직을 하신 아버지는 젊은 시절엔 6.25참전 용사로 활약을 하신 분이었다. 지리산 토벌 작전에도 참여하셨는데 그 부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분이 바로 아버지였다. 대학을 마치고 군에 가셨던 아버지는 제대 후 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찰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원치 않게 도중 하차를 하게 되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공무원들 가운데 군 미필자를 가려내 옷을 벗기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병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던 아버지는 군 미필자로 분류가 되어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때 어머니가 흘린 눈물과 한숨을 큰오빠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후 아버지는 야인생활을 하다 다시 일반 행정직 공무원으로 복귀하셨다. 말이 복귀이지,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경찰 간부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말단으로 시작된 어려운 공무원 생활이었다. 하지만 공무원의 표상이기도 한 청렴과 성실을 바탕으로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셨다.
우리 4남매 역시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이었는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12년을 개근하여 모두 다 개근상을 받았다. 네 자식 모두 그랬으니 48년 동안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각 한번 안 하고 성실하게 학교를 다닌 지독한(?) 4남매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배경의 우리 집에서 돈을 주고 아들을 군대에서 빼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두 오빠들의 군 생활은 평탄해 보였다. 특히 큰오빠는 이모가 계신 부산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부모님의 시름을 좀 덜었다. 작은 오빠가 서해안의 한적한 곳에 있게 되어 그게 좀 걱정이긴 했지만...
1980년 10월 8일, 운명의 바로 그 날. 내가 살던 곳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도심 곳곳에 태극기가 출렁였고 갖가지 깃발들이 축제를 알리는 가운데 도시 전체가 거대한 꽃밭으로 단장이 되어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가 개막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청 과장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모처럼 즐거운 나들이를 하게 되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나가셨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안 계신 집을 지키며 게으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 강아지, 복실이가 갑자기 짖어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온 게 아니고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려댔기 때문이다. 몇 시 쯤이었던가. 아마 8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한ㅅㄱ 일병 댁이죠."
(아, 그리운 나의 오빠, 한ㅅㄱ 일병이여!)
전화기 속의 투박한 목소리는 전화를 받는 내게 누구냐고 물어왔다. 한 일병이 작은 오빠가 된다고, 내가 그의 여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단박에 내 이름이 '한.나.영'이냐고 물어왔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그 목소리는 작은 오빠가 근무하는 육군 00부대의 아무개대위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아버지를 찾았다. 안 계시다고 하니 이번에는 어머니를 찾는 것이었다. 두 분 다 안 계시다고 하니 어딜 가셨느냐고 물었다.
"오늘 이곳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리거든요. 부모님 모두 개막식에 가셨는데요."
집 밖에선 큰 축제임을 알리는 요란스러운 팡파레와 행진곡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 뭐라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놀라지 마세요. 한 일병이 안전사고로 죽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
망치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작은 오빠가 어떻게 되었다고? 큰오빠는 그럼 무사한 거야? 도대체 군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전 사고란 게 뭐야? 안전 수칙을 안 지켜서 작은 오빠가 죽은 거야? 전화를 받으며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울음도 안 나왔다.
전화를 받고 한동안 멍하게 있던 나는, 방금 들었던 말이 '작은 오빠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비장한 '선언'인 것을 알고는 그만 '어'하며 짐승 같은 울음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수화기 속의 목소리는 연신 놀라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서 가서 부모님께 알려서 그곳으로 오시도록 했다. 부대의 위치는 부모님께 연락이 되면 다시 통화를 하자며 그 목소리는 건조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얼마 동안 방에서 통곡을 하던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택시를 탔다.
"종합경기장이요."
택시 안에서도 나는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운전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힐끗힐끗 보더니 무슨 일이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 오빠가 죽었어요. 군대 간 작은 오빠가요."
경기장 주변은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어 택시가 접근할 수도 없었다. 좀 멀찌감치서 내린 나는 거의 미친 사람 마냥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경기장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서 아버지를 찾지? 우리 아버지를...'
경기장 입구에 포진해 있는 근엄한 경찰들에게 다가가 황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의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데요.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안내 방송을 해야 할 텐데요."
퉁퉁 부은 눈에선 연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의 애처로운 모습을 본 경찰은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고 했다. 곧 개막식이 시작되고 대통령이 입장하게 될 테니 개막식이 끝나면 방송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며 나는 절규했다.
"오빠가 죽었단 말예요. 방금 전에... 군대 간 작은 오빠가요."
나의 처절한 목소리에 적이 당황한 경찰은 다른 경찰을 부르더니 방송할 내용을 내게 불러달라고 했다.
"경원동에서 오신 한00씨는 집에서 급한 일이 있다고 하니 동문 0번 출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경원동에서 오신..."
내 귀에도 선명하게 들리는 '급한 일!' 그 급한 일이 바로 자식이 죽은 일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경찰은 나에게 동문 0번 출구 앞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는 고요함 가운데 흘러나온 방송이었으니 아버지가 놓칠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급한 일이 군에 간 작은 오빠의 죽음이라고 상상이나 하셨겠는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 흘러갔다. 그때 동문 앞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중년 부부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닦을 생각도 못하는 나를 향해 놀란 표정의 아버지가 급하게 달려오셨다.
"무슨 일이냐?" "오빠가 죽었대요. 작은 오빠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나는 더욱 큰 소리로 울먹였다.
"작은 오빠가 안전사고로 죽었대요. 방금 전에 전화가 왔어요."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일 이분도 안 되었을 것이다. 뒤늦게야 작은 오빠의 죽음을 깨달은 어머니, 선 채로 통곡을 하셨고 아버지는 급하게 택시를 잡으러 가셨다. 나는 어머니의 팔을 부축하고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택시 안에서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계속 눈을 감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이고'를 외치며 택시 안이 떠나가라 우셨다. 택시에서 내려 30m도 안 되는 집 앞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발길은 천근 만근 무겁기만 했다.
집에 오신 아버지는 그 '목소리'가 남긴 번호로 전화를 한 뒤 부대 위치를 확인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확실하게 인지하신 아버지, 캐비닛에서 작은 오빠의 사진을 주섬주섬 챙기곤 기차 시간을 점검하셨다.
방에 들어와 집이 떠나가라 통곡하시는 어머니, 그 옆에서 훌쩍훌쩍 우는 나. 울음을 안 보이던 냉정한 아버지였지만 아마도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이다. 귀한 아들인데... 아, 장성한 아들을 이렇게 잃을 수도 있구나.
아버지는 대문 밖으로 나가면서 어머니더러는 그냥 집에 있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 자식 죽은 것, 내 눈으로 확인해야지 이대로는 못 산다'고 고래고래 외치며 통곡하는 어머니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작은 오빠, 한 일병은 한 줌의 재가 되어 금강에 뿌려졌다. 1m 74cm의 장성한 아들은 보잘 것 없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맑은 금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작은 오빠의 유해를 금강에 뿌리면서 부모님은 목놓아 크게 우셨을 것이다. 이제 어디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죽은 자식을 당신 가슴에 묻고 고약한 이 세상을 살아갈 일이 참으로 끔찍하셨을 것이다. 당신들 목숨 다하는 날까지...
어머니는 그 후 기력을 잃고 많이 편찮으셨다. 귀에서 소리가 난다는 이명(耳鳴)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기도 했다. 병원에선 갑작스러운 충격 때문에 생긴 병이라며 처방을 내려주었지만 약을 오래 복용했어도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이명은 쉬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 갑작스레 생긴 충격이지.'
'어찌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 키운 자식을 먼저 앞세워 보낼 수도 있는 상황을 어찌 꿈에서라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작은 오빠가 떠난 1980년 이후의 시월은 우리 가족에겐 공포의 시월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우리 집을 휘감았고 식구들 모두 말이 없었다. 특히 그날, 10월 8일은 끔찍한 고문의 날이었다. 아니 시월 자체가 우리 가족에겐 두려움이었다.
출근하시는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집에 계시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가슴이 미어지는 통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직장을 다니던 나나 학교를 다니던 여동생에게도 시월은 바로 폭풍 전 '고요의 시간' 같은 끔찍함이었다. 술도 못하시던 아버지가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실 때면 이 저주의 시월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 죽음 같은 공포의 시월을 달력에서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 시월이, 우리 가족에게는 '공황(恐慌)의 시월'이었다. 모든 감정이 죽어버리고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리는.
작은 오빠의 죽음에 대해 공무원인 아버지는 한동안 침묵하셨다. 군에서 말한 '자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항하지도 않은 채 그저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침묵하실 뿐이었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지방 사무관으로 정년 퇴임을 하신 뒤로는 부지런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오빠의 죽음에 대해 실오라기 하나라도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찾아서...
국방부 장관에게 여러 번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고, 의문사 진상위원회에 작은 오빠의 죽음에 관한 기록도 보내곤 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위해 그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숱한 노력을 하셨지만 한 번 내려진 결정이 뒤바뀌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갈망했던 명예회복 역시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게 허사였다. 그렇게 뛰어다니던 나의 아버지, 이제는 안 계신다. 가슴에 묻어두었던 작은 아들을 따라 2년 전 하늘나라로 가셨다.
시답잖은 우리 집 얘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쓰느냐. 다시 입에 담기도 싫은, 기억하기도 싫은 군대 얘기를 왜 쓰고 있느냐. 바로 '신의 아들'이라는 '정연, 수연' 형제들 때문이다. 내 집안의 사촌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두 형제의 이름만은 분명하게 기억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떻게 했기에 소위, 명가 출신이라는 그 집 아들들은 측은하고 불쌍한 '체중 미달'로 군대를 '못' 갔을까. '안' 간 게 아니고 말이다. 가고 싶어도 '못' 간 군대였단 말인가.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둘 다 말이다. 아마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그 아들도 그렇게 부실한 아들이었을까.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제 자식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군대도 못 보냈으니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것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병적 기록부는 다 멀쩡하게 있는데 왜 그 집 것은 말썽인가. 고쳐지고 다시 씌어지고. '한인옥씨로부터 돈을 건네 받았느니, 하늘이 두 쪽 나도 결백하다느니'하는 상반된 발언 중에 어느 게 진실일까, 뭐가 거짓일까.
이회창씨 두 아들의 병역 비리에 관한 진실이 과연 있기는 한 건가. 정말이지, 이젠 신물이 난다. 알고 싶지도 않다. 이제 와서 그걸 밝혀낸다 해도, 밝혀질 리도 없겠지만 정말 비리가 있어서 대쪽 이회창씨 말대로 대통령 후보사퇴를 하게 되는 전대미문의 희극이 벌어진다고 해도, 나의 죽은 오빠가 다시 살아 돌아올 리도 만무하고 이미 건전한(?) 사회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늙은(?) 정연, 수연씨를 다시 군대에 보낼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다. 높은 신분일수록 도덕적인 의무 역시 높게 따라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고귀한 성골, 진골들이여! 노블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천민의 희생과 헌신 위에 서서 무임승차하지 마시라.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국민의 4대 의무는 헌법 제2장에 규정되어 있는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그리고 '근로의 의무'이다. 국가의 존속을 위한 최소한의 의무로 국민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인 것이다. 충직한 종이 되어 국민을 섬기겠다고 나선 자가 기본적인 국민의 의무도 이행하지 않으면서 어찌 국가의 존속을 책임지겠다고 말한단 말인가. 도대체 가당한 말이냐는 것이다.
정치란 게 무엇인가. 나는 소박하게 생각한다. 바로 국민의 눈물과 한숨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국민의 마음이 춥지 않도록, 가슴이 멍들지 않도록 따뜻한 온기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다. 국민들 앞에선 큰 목소리로 '정의'와 '불편부당'을 외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남몰래 '부정'과 '불공정' '편법'을 저지른다면 그런 자를 어떻게 지도자로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국민 개병제를 무시하는 '귀족'의 행태를 보면서 그런 자를 지도자로 세울 수 있겠는가. 더구나 마을의 이장이나 구의원 정도의 지도자도 아니고 국가 최고의 지도자로 군 통수권자에 올라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로 시작되는 대통령 선서를 할 사람이 말이다.
선량한 국민을 우롱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들이 더 이상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으면 좋겠다. 뼈대 있는 가문이라고 '가문의 영광'을 내세우며 기본적인 국민의 의무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터진 입으로 공허하게 외치는 '국민과 함께'가 아니라 그의 몸이 따르는 '국민과 함께'여야 한다. 그래야만 저들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지도자로 나서겠다는 사람은 바로 국민의 의무를 '법'인 줄 알고 지키는 선량한 백성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오지 않게 할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희망과 비전의 땅으로 나아갈 거라는 확신이 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때 우리 사회에 유행했던 '몽땅 도둑놈'이라는 <민나 도로보데스>라는 말이 있었다. 지도자는 그같은 냉소주의에 일침을 가할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땅을 욕하며 이민을 가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할 사람이어야 한다.
속이 문드러진 백성들의 탄식이 더 이상 메아리 되어 울리지 않게 할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척박한 이곳 대한민국에, 인력(人力)만이 유일한 자원인 이 땅에 인재들이 몰려들고 조국을 위해 더 많은 자식들을 즐거움으로 낳는 어머니들이 많아지는 그런 '소망의 땅'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정말 그런 지도자가 있을까. 그런 지도자를 뽑을 수 있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