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해임안은 일사천리 처리하면서...

[심층취재] 역사청산 법안 13건 국회에서 "쿨쿨"

등록 2003.09.04 18:39수정 2003.09.0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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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6대 국회는 또 다시 '역사청산' 과제를 묻어버릴 것인가. 3일 열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범국민추진위 기자회견 모습.

16대 국회는 또 다시 '역사청산' 과제를 묻어버릴 것인가. 3일 열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범국민추진위 기자회견 모습. ⓒ 오마이뉴스 김영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여순사건, 일제 강제동원, 거창 양민학살사건, 그리고 친일파 진상규명….

은폐된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모두 물거품 될 위기에 놓였다. 여야의원들이 수십명씩 공동으로 역사의 진상규명과 관련된 의안들을 상정해 놓고도, 정작 법안 처리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부터 시작된 2003년 정기국회는 16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다. 국회법에 따라 이번 정기국회가 끝나면 내년 임시국회에서 법안 처리를 하지 않는 이상 16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의안들은 자동 폐기된다. 하지만 이속에는 민족의 뼈아픈 과거와 역사청산에 관련된 법안들이 십여개나 포함돼 있다. 대한민국 국회는 민족의 '역사 청산'에 정말 관심이 없는 것일까?

일부 세력 눈치 때문에 법안처리 소극적

과거 역사청산과 관련된 법안들을 처리하는 소관 상임위는 행정자치위원회(위원장 박종우 민주당 의원)다. 2003년 9월 4일 현재 행자위에 계류중인 법안은 모두 129개. 이 중 '역사청산'과 관련된 법안은 모두 13개(입법청원 2개 제외)다. (아래 박스기사 참조)

이 법률안들은 멀리 동학혁명에서부터 가까운 민주화운동 시절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사실들을 규명하고, 정부가 그에 걸맞는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관한 법률안(2건)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법률안(3건) ▲거창 양민학살 관련 법률안(2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에 관한 법률안 ▲동학농민군의 명예회복 관련법률안 ▲여순 사건 진상규명에 관한 법률안 ▲함평 민간인 학살 관련 법률안 등이 있다.


이 법안들 중에는 16대 국회가 출범하던 2000년에 제출된 것들도 있다. 3년전 제출돼 상임위까지 배정된 법안이 16대 국회의 임기가 끝나는 지금까지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현직 국회의원들이 해당 법안의 처리를 매우 '껄끄러워' 하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행자위 소위에 들어가 보면 이런 법안을 처리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냥 의원들끼리 둘러앉아 '이건 다음으로 넘기지'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럼 또 다음 상임위로, 곧바로 다음 국회로 넘어가게 되는거죠."


지난 3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통과를 위한 범국민추진위(이하 범국민추진위) 구성'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희선(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회장) 민주당 의원은 역사청산과 관련된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가 의원들의 '무책임함'에 있다고 밝혔다.

제대로 법안을 검토해 보지도 않은 채 다음 상임위로, 회기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의원들이 "일부 세력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김 의원과 재야 인사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친일파 진상규명과 관련, 범국민추진위가 3일 결성된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김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154명은 지난 8월 14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9월 4일 현재까지 상임위 배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통상 법안이 제출되면 15일 이내 상임위를 배정 받는 관례로 비춰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는 '친일행위 진상규명' 법안이 상임위에 배정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파를 찾아내 처벌하자는 것도 아니고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진상규명만 하자는 것인데도, 유관 상임위나 의장단에서는 법안을 맡거나 처리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죠."

이 때문에 김 의원은 3일 범국민추진위를 구성하는 자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안을 행자위로 넘기지 않겠다"고 밝혔다. 소관 상임위인 행자위로 넘기게 되면, 또 언제 법안이 처리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김 의원과 범국민추진위는 대신 "국회의장과 여야총무 협의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이 법안을 다루고 이번 정기국회에서 꼭 처리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a 과거 역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과 피해자들은 이미 몇십년을 기다렸다. 지난 3일, 국회는 김두관 장관 해임건의안을 불과 1시간만에 처리하는 신속함을 보였지만, 역사청산 문제에는 너무나도 소극적이다. 사진은 지난 8월 13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국적포기서 제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피해자.

과거 역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과 피해자들은 이미 몇십년을 기다렸다. 지난 3일, 국회는 김두관 장관 해임건의안을 불과 1시간만에 처리하는 신속함을 보였지만, 역사청산 문제에는 너무나도 소극적이다. 사진은 지난 8월 13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국적포기서 제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피해자.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정부, 유족들에게 이중삼중 상처 주지 말아야 할 것"

김 의원과 범국민추진위의 경우,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친일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안을 국회의원 과반수가 넘는 154명이 공동발의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법안은 국회본회의에 상정되기만 하면 그대로 통과된다.

그러나 공동발의한 의원 숫자도 믿을 만한 근거는 못 된다. 지난 15대 국회에서는 의원 255명이 서명한 '부패방지법'이 임기내 처리되지 못해 그대로 폐기된 전례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민주당 행자위 간사인 전갑길 의원은 이처럼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에 대해 "여야 의원들의 합의점 도출이 어렵고 행자위 소속 의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전 의원은 "우선 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간 합의점 도출이 어려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며 "민주당 의원들은 모두 법안 처리에 찬성하고 있지만 한나라당 의원들의 경우 상이군경 유족 등과의 형평성, 피해보상의 경우 막대한 예산이 들어갈 것을 우려해 법안 처리를 꺼리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소관 상임위인 행자위에만 있지 않아 보인다. 전 의원은 "행자위 소속 의원들의 전문성 부족도 하나의 원인"이라며 "이 때문에 행자위는 이 같은 역사청산 법안을 행자위 차원에서 다루지 말고 국회 내 특위를 구성해 전문성 있는 의원들이 다루자고 몇 차례 건의했다"고 전했다.

전 의원에 따르면, 이 같은 행자위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법안은 다시 상임위로 돌아왔다는 것. 이는 행자위 소속 의원 뿐 아니라 국회의원 대부분이 역사청산 법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국회의원들은 이렇게 '역사청산'과 관련한 법안 처리를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사건과 관련된 유족들은 적잖은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창수 새사회시민연대 대표는 "행자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인식이 굉장히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과거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도 국회의원들은 지금 유족들을 '2등 국민'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국회가 특정집단의 반발도 우려하는 듯 하지만 4·3사건도 특별법을 만들었는데 (반발이) 없었다"며 "빨리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의 처리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정남기(60)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 역시 "우리는 국가적 보상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며 "최소한이라도 특별법에 명시된 대로 신원이 확실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이 세 분들의 명예만이라도 회복해주길 간곡히 바란다"고 말했다.

14·15·16대 국회에 모두 법안을 제출했으나 아직까지 본회의 상정조차 되지 못한 '함평 민간인학살사건' 유족들은 국회의 무관심에 울분을 토로했다.

정근욱(54) 함평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14·15·16대 국회에 모두 발의했으나 14·15대엔 국회 회기 만료로 처리를 안했고, 현 16대 국회도 행자위에 계류된 상태인데 불투명하다"며 "이는 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이런 일로 희생자들에게 이중삼중의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3일 느티나무카페에서 범국민추진위가 구성될 때, 국회에서는 김두관 행자부장관의 해임건의안이 일사천리로 진행돼 불과 1시간만에 처리됐다.

반세기를 기다려 온 유족들은 명예회복만이라도 언제 될지 모른채 기다리고 있는데, 국회 다수당은 국민들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은 의안을 신속히 강행 처리하는 모습. 16대 국회는, 과연 '진상규명'을 통해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행자위 계류중인 주요 법률안

▲ 3일 오후 김두관 행자장관 해임건의안은 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채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동학농민혁명군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안
- 발의: 2002. 10. 21. 김태식 의원 대표 발의(국회의원 163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국무총리 소속 동학농민혁명군명예회복심의위원회 설치/ 특별시, 각 광역시·도별 동학농민혁명군명예회복실무위원회 설치/동학농민혁명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

▲여수·순천10·19사건진상규명및사상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안
- 발의: 2001. 4. 김충조 의원 대표 발의(국회의원 33명 찬성)
- 주요골자: 국무총리 소속하 여수·순천10·19사건진상규명및사상자명예회복위원회 설치/전남도지사 소속 여수·순천10·19사건진상규명및사상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위령사업 예산지원 및 부상자 치료비, 생활지원비 지급/임기 2년(1년 연장 가능)/보고서 작성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안
- 발의: 2001. 9. 김원웅 의원 대표 발의(국회의원 47명 공동발의, 1명 찬성)
- 주요골자: 대통령 소속 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설치/직속 사무처 설치/위령사업 및 피해자와 유족 보상/임기 2년(6개월 2회 연장 가능)/보고서 작성

▲6·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안
- 발의: 2001. 6. 배기운 의원 대표 발의(국회의원 17명 공동발의, 22명 찬성)
- 주요골자: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 설치/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소속 6·25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설치/위령사업 예산지원 및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지급/임기 3년(2년 연장 가능)/보고서 작성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안
- 발의: 2001. 10. 김원웅 의원 대표 발의(국회의원 69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대통령 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설치/시·도지사 소속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실무위원회 설치/위령사업/임기 2년(6개월 2회 연장 가능)/보고서 작성

▲함평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안
- 발의: 2000. 8. 이낙연 의원 발의(국회의원 31명 찬성)
- 주요골자: 국무총리 소속 함평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설치/전남도지사 소속 함평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설치/위령사업 및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지급/임기 2년/보고서 작성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 발의: 2001. 4. 20. 김덕규 의원 대표발의(국회의원 50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1969년 8월 7일 3선개헌 발의일 이후로 돼 있는 '민주화운동 적용시기'를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을 전후한 세대까지 앞당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 발의: 2001. 11. 24. 이창복 의원 대표발의(국회의원 54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1969년 8월 7일 3선개헌 발의일 이후로 돼 있는 '민주화운동 적용시기'를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쿠데타' 시기까지 앞당김/대상자 범위 확대, 보상금, 생활지원금 외 위로금 지급/대통령 소속 위원회 구성 및 상임제 마련/6·10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 발의: 2001. 11. 9. 김영춘 의원 대표발의(국회의원 35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민주화운동 관련 현행 신체·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재산상의 피해보상까지 확대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개정법률안
- 발의: 2002. 8. 30. 김성순 의원 대표발의(국회의원 20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명칭 변경('명예회복'→'명예회복 및 보상')/국무총리 소속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설치/시·도지사 소속 실무위원회 설치/지원금 지금, 성금 모금, 비영리사업지원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개정법률안
- 발의: 2000. 12. 1. 이강두 의원 대표발의(국회의원 30명 공동발의)
- 주요골자: 국무총리 소속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및보상지원위원회 설치/보상금 지급, 성금 모금, 추모운동 재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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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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