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따라가는 여정

[서평]한비야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등록 2004.07.05 12:26수정 2004.07.05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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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푸른숲
나는 걷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늦은 가을날 오후 빨갛고 노란 낙엽들이 수북히 쌓인 산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뜨겁지도 눈부시지도 않은 편안한 햇볕을 쬐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인적 드문 산길이나 시골길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차들이 휙휙 지나가는 도심의 한복판을 걷는 것도 나름대로 독특한 재미가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이렇게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을까에 대해 혼자 상상의 줄을 늘려 가는 것도 재미있고, 그냥 천천히 걸으며 간판 디자인이며 쇼윈도 안에 진열된 상품들을 두리번거리는 재미가 있다.


이런 일에 재미를 느끼는 까닭에 동료만 생기면 기꺼이 하루 종일 걷기를 즐기는 일도 마다 않는다. 몇 년 전, 한 사람의 직장동료와 하루종일 별 말 없이 걸었던, 황지에서 장성을 거쳐 철암을 지나 다시 황지로 들어오던 태백의 정겨웠던 길은 아직도 내 기억에 황홀하게 남아있다.

하루 종일 30킬로미터 남짓되는 길을 걸었더니 저녁 무렵, 나도 모르게 다리를 절뚝이지만, 자동차가 아닌 내 다리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던 그 길은 애틋함과 정겨움으로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 나만의 길이 되었다.

서서히 계절이 깊어가고 조금씩 가을이 가까이 다가오면, 채 가을이 오지도 않았는데도 가을이 너무 일찍 가버리면 어쩌나 조급해진다. 마치 두근거리게 보고싶던 님이 내게 오시자마자 다시 가버리면 어쩌나 걱정을 하는 것처럼 내 마음을 내가 다잡고 있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 가을이 되면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길을, 그게 힘들면 매일 매일 자동차를 타고 오가던 그런 길이라도 맘에 맞는 길동무 한 둘과 천천히 걷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그런데 짧은 가을날이 나도 모르게 어느 새 지나가버려 이런 낭만적인 호사를 하지 못하게 될까봐 괜히 자꾸 마음이 바빠지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했으니 한비야가 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란 책을 내가 얼마나 즐거운 마음, 그리고 부러운 마음으로 읽었는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걸어서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여행을 했다는 한비야씨가 마라톤 주자가 홈그라운드를 한 바퀴 도는 심정으로 우리 나라의 최남단인 땅끝 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의 800킬로에 해당하는 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쓴 여행기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굳이 어느 대목이 특히 재미있었다고 꼬집기가 힘들만큼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모든 부분이 다 인상적이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녀의 길동무로 동행이나 한 것처럼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퉁퉁 부은 두 다리의 통증이 뻑적지근하게 느껴지는 듯 하기도 하였다.

끝없이 이어진 길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혼자 여관방에 앉아 발바닥에 생긴 물집에 여러 가지 색깔의 실을 꿰며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하루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던 상념들을 떠올리며 일기를 쓰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까닭없이 외로워지면 정겨운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그녀, 지구를 걸어서 세 바퀴 반이나 걸었다고 해서 돌처럼 강인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도 감성적이고 여린 구석이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인간적인 부분이 그녀를 더욱 가깝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녀도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녀는 '지금보다 10년만 젊었어도, 아니 5년만 젊었어도', '여자라서, 여자니까'라는 생각을 하며 꿈을 잊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서른 다섯 살에 오로지 세계여행을 하기 위해 잘 나가던 직장생활을 과감히 그만두었던 그녀다.

표준적인 인생시간표에 맞게 자신의 인생을 짜 맞추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와 진도로 짜여진 주관적인 시간표가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꿈을 밀고 나갈 줄 알고 세상의 편견을 자유롭게 벗어 던질 줄 알며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줄 잘 알고 있는 그런 용기와 지혜를 가진 그런 사람이다.

오히려 '여자이기 때문에' 더 특별한 여행(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에게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고, 그분들의 기막힌 삶 이야기도 듣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여행기를 읽으며 그녀에 비해 지나치게 겁이 많고 조심성이 많은 나 자신의 태도에 조금 반성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처럼 혼자서 걷기 여행을 다닐 마음은 전혀 먹고 있지 못하는 나를 보아도 그녀가 굉장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전라도에서 충청도를 거쳐서 강원도를 지나가는 그녀의 여정은 어디다 다 아름답고 정겨운 우리 나라 산과 들의 풍경이었다. 그녀의 여행을 책으로나마 동행하는 동안 어디나 다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지명 이름을 입으로 소리내기도 하고 지도를 들추어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강원도 땅에 들어섰다는 표시로 그려놓은 이정표를 보니 강원도 전체가 다 내 고향인양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러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을 따지지 싶기도 하고. 청풍에서 벌어지는 벚꽃 축제 이야기도 바로 옆 마을에서 열리는 잔치 이야기가 전국 신문에 나오는 것처럼 신기했고, '하루 종일 아름다운 평창강을 따라 걷다'라고 쓴 일기장 제목을 보니 괜히 자랑스러워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빨리 맘에 맞는 길동무 하나 정해서 그녀가 걸어간 그 길 중에서 강원도 길만이라도 한 번 걸어야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어 보기도 했다.

한 걸음의 힘을 믿으며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통일전망대에 도착한 그녀는 철조망에 막혀 해가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여행을 끝내야했다. 그제서야 우리 나라의 분단이 몸으로 실감되면서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는 그녀. 그래, 몸으로 느낀 것이 진짜다. 우리가 그동안 학교나 텔레비전에서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분단의 슬픔이나 통일의 당위성은 모두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함경북도 온성지방의 사투리를 들어가며 그곳을 지나는 여행을 상상으로 적어가며 그녀는 여행기를 끝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도 한 가지 상상를 했다. 언젠가 통일이 되는 날, 그녀가 다시 한 번 해남에서 시작해 판문점을 지나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기나긴 여행길에 오르는 그런 상상을.

그리고 책을 덮으며 나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해 주말 도보여행을 제의해야하나, 아니면 지도부터 펴들고 길부터 찾아봐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행복하게 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개정판

한비야 지음,
푸른숲,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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