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 돌홈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듯, 선조들의 뛰어난 과학적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추연만
견훤이 쳐들어온 때는 음력 11월 한 겨울인데,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 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궐과 가까운 안압지와 같은 연회장소를 두고 굳이 남산자락 포석정에 놀이판을 벌인 것은 의문이 든다는 것.
이에 최근 고고학 성과에 따라 '포석정을 남산 성지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주 남산은 140여 곳 절터와 500여 개 불상과 탑들이 들어선 곳으로 그 자체가 '신라의 성지'란 해석이다. 최근 나정에 박혁거세 설화와 연관된 우물터와 제사시설이 발굴된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한편으론 고려에게 도움을 구하고 자신은 포석정에서 호국신(남산신)께 신라의 안위를 빌며 견훤에게 끝가지 저항하다 죽었다는 새로운 해석. 문헌에 나오는 '유포석정'이란 문구는 지금까지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고 해석되었으나 <유>자를 놀았다(유)가 아니라 갔다(유)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석정은 신라인들이 호국제사를 지낸 성지였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 신이 왕에게 춤을 추었는데 왕이 손수 신의 춤을 흉내냈다는 기록도 있어 포석정은 호국제사와 연관이 깊은 시설이란 해석을 낳게 한다.
또한 경주문화재연구소가 1999년 포석정 주변 발굴 결과, 제사시설로 추정되는 건축유적과 통일신라 이전의 유물을 발견함으로써 포석정은 통일신라 이전부터 호국 성지 역할을 한 것이란 추정을 뒷받침했다.
나아가 1995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에도 포석정과 연관된 '포사(鮑祀)' '포석사(鮑石祀. 사(祀)는 제사를 뜻함)'란 말이 나와, 포석정이 사당의 기능을 했다는 해석이 더욱 설득력이 높아졌다. 또 포석사에 중요한 인물의 화상이 있었고 진골 이상 고위 신분이 결혼식을 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