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제주의 빛바랜 시간 속으로

[자연의 속살을 찾아가는 사색여행2]

등록 2005.09.21 23:59수정 2005.09.2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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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화산회토(火山灰土)가 뒤덮인 제주는 자연으로부터 버림받은 땅이라 불렀다. 거친 돌밭과 극심한 가뭄, 세찬 바닷바람이 섬주민의 생존을 위협했기 때문. 이 절망의 땅에 찾아온 것은 지독한 가난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예로부터 역사적 변방으로 지목되어 귀양살이를 하는 유배지로 내몰렸겠는가.

제주인의 삶은 늘 자연 속에서 이루어졌다. 자연의 지배를 받다가도 자연에 맞서 싸우면서 삶의 운명을 개척해 왔다. 제주 섬마을에는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돌담과 초가, 생업도구에도 자연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역력하다. 만속놀이와 신앙생활, 노동요, 전설, 사투리에도 인간과 자연의 엉클어진 모습이 숙명처럼 나타나 있다.


a 돌담길의 끝에는 올레가 있고 그 끝에는 제주초가가 있다.

돌담길의 끝에는 올레가 있고 그 끝에는 제주초가가 있다. ⓒ 김동식

원주민의 체취가 곳곳에 묻어있는 곳

제주도 한라산 남동쪽 해안마을인 표선리에는 1890년대를 기본연대로 19세기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민속촌이 자리잡고 있다. 사라져가는 제주도 옛마을 모습과 전통가옥, 고유의 생활풍속이 원형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다.

초가마다 200년에서 300년 전의 시간이 머물고 있다. 원주민의 체취도 곳곳에 묻어 있다. 올레(가옥진입로) 밖으로 그 옛날 섬주민들의 애환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바람 많은 섬의 튼튼한 지킴이로 된서리를 맞던 돌담이 먼저 반긴다. 제주사람에게는 정겨움 보다는 고마움의 표상이다.

a 바같채 대문간에는 그 옛날 제주사람들의 질긴 삶이 남아 있다.

바같채 대문간에는 그 옛날 제주사람들의 질긴 삶이 남아 있다. ⓒ 김동식

밖거리(바깥채)에 있는 이문간(대문이 있는 공간)에는 반갑게도 '바지게'가 버티고 있다. 제주 어느 마을에도 없는 것이 여기에 있다. '바지게'로 외양간의 소거름이나 '통시'(제주의 화장실 겸 돼지우리)의 돼지거름을 나르던 지게다. 그것도 옛날에 자주 쓰던 도구가 아니었다.

밭농사의 체취가 배어 있는 멍석과 보리클(보리이삭을 분리하는 도구)이 시선을 끈다. 뒷뜰이나 우영(텃밭)에 심을 옥수수 종자가 수줍게 매달려 기약없는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옥수수는 보리나 콩과는 다르게 가족들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간식으로 먹는 여유와 휴식의 상징이다.


a 제주초가에는 화산섬의 흔적과 자연극복의 예지가 담겨 있다.

제주초가에는 화산섬의 흔적과 자연극복의 예지가 담겨 있다. ⓒ 김동식

제주전통가옥에도 화산섬의 흔적 뚜렷

안마당은 옛날의 모습 그대로이다. 금방이라도 밥짓던 어머니가 반갑게 부엌에서 나오고, 밭일 나갔던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절구, 단단히 동여맨 초가지붕, 흙과 돌로 쌓아올린 축담(초가외벽)에도 화산섬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구들(방)과 상방(마루), 고팡(광)에도 비바람과 추위를 이기려는 생활의 예지(叡智)가 생생하다. 이미 가을 조밭으로 변해버린 잃어버린 고향집이 왜 이렇게 눈에 선할까.


a 초가에 기댄 바지게와 돌절구

초가에 기댄 바지게와 돌절구 ⓒ 김동식

부엌 입구에는 물이 귀했던 시대의 상징인 물허벅이 '물팡'(물허벅을 올려놓는 돌받침대) 위에서 나른한 오후를 즐기고 있다. 대개 육지부에서는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지만 머리에 이지 않고 물구덕에 물허벅을 넣어 지고 다녔다. 바람이 많은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a 어머니와 누이들의 체온이 남아있는 부엌

어머니와 누이들의 체온이 남아있는 부엌 ⓒ 김동식

부엌 안에는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의 바쁜 하루를 말해주는 가재도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식구들의 가난을 조절하며 밥을 짓는 아낙네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래도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마다, 밭에 가려고 서두르는 동트는 새벽마다 희망의 불을 지피지 않았을까.

a 제주 특유의 화장실 겸 돼지우리 '통시'

제주 특유의 화장실 겸 돼지우리 '통시' ⓒ 김동식

제주 생활문화사의 한 단면인 '통시'를 볼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뒷간에서 일을 볼 때 파닥거리는 도새기(돼지) 때문에 혈압 오르던 옛날의 기억이 새롭다. 통시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다. 통시의 소멸은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통시 덕분에 돗걸름(돼지거름), 오줌 및 불치(재)를 사용하여 척박한 땅의 비옥도를 유지하는 농경방식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돼지사육의 풍습과 집안 경조사 때 이루어지던 돗추렴(돼지추렴)의 풍속도마저 사라졌다. 아쉬움과 씁쓸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a 돌담 너머로 보이는 어촌마을의 초가 모습

돌담 너머로 보이는 어촌마을의 초가 모습 ⓒ 김동식

자연의 도전과 섬사람들의 응전

옆집이 눈에 들어왔다. 집을 에워싼 돌담은 바닷물과 모진바람이 할퀴고 간 흔적이 역력하다. 미끈한 것이 튼실하기만 하다. 1년에 한 번씩 새단장을 하는 초가의 '축담'도 바닷돌로 쌓아 올렸다면 이 집은 어촌마을에서 옮겨 온 것이리라. 마당 한켠에는 무슨 곡식을 쌓아 놓았을까. 제주의 눌(낫가리)은 한 해 농사의 결실물이다. 저 멀리 언덕배기에는 연자방앗간이 부지런히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a 곡식을 탈곡·제분하던 추억의 연자방앗간

곡식을 탈곡·제분하던 추억의 연자방앗간 ⓒ 김동식

제주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가 제주의 자연환경과 결부되어 있다. 화산섬에서의 생존 자체가 자연과 어울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자연으로부터의 즐기차게 '도전'을 받으면서 자연속에서 살아갈 방법을 끊임없이 터득하는 제주인의 '응전'이 고립무원의 제주섬을 지탱시킨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제주민속촌에도 만추의 그림자가 기웃거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제주민속촌은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동부산업도로(97번)가 끝나는 부분인 표선 마을에 있으며 표선해수욕장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귀포시에서 출발할 경우 국도 12번 일주도로를 이용하여 효돈-위미-남원-표선마을 방면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주변 가볼만한 곳으로 서쪽으로는 신영제주영화박물관, 쇠소깍, 서귀포감귤박물관, 동쪽으로는 일출랜드, 성읍민속마을, 섭지코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주민속촌은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동부산업도로(97번)가 끝나는 부분인 표선 마을에 있으며 표선해수욕장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귀포시에서 출발할 경우 국도 12번 일주도로를 이용하여 효돈-위미-남원-표선마을 방면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주변 가볼만한 곳으로 서쪽으로는 신영제주영화박물관, 쇠소깍, 서귀포감귤박물관, 동쪽으로는 일출랜드, 성읍민속마을, 섭지코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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