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 들녘 걸으면 다리보다 가슴이 아프다

[기고] 박인자 한국생협연합회 진주생협 이사장

등록 2005.10.20 16:23수정 2005.10.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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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산물을 살리기 위해 제주부터 서울까지 걸어올라오는 '소달구지 대장정'이 지난 1일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상정된 '쌀협상 비준동의안'은 농민의 한숨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박인자 한국생협연합회 진주생협 이사장이 '우리쌀 살리기'에 소비자가 나설 것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a 10일 오후 여의도공원 문화광장에서 열린 '이경해 열사 정신계승·WTO반대·우리쌀 지키기 2005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한 농민이 이어지는 발언을 들으며 시름에 찬 표정을 하고 있다.

10일 오후 여의도공원 문화광장에서 열린 '이경해 열사 정신계승·WTO반대·우리쌀 지키기 2005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한 농민이 이어지는 발언을 들으며 시름에 찬 표정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나이 먹어야 철이 든다'는 말에 '하루에 먹은 밥그릇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순진하게도 그 때는 나이에다가 세 끼 밥그릇을 곱해가며 누가 더 철이 들었는지 따지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 들어 몇 번이나 그 말을 되새기게 됩니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는 동안 내가 먹은 밥그릇이 얼마인지, 밥 먹은 값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결혼을 준비할 때 가장 두려운 일 중 하나가 밥을 해서 먹는 일이었습니다. 천방지축으로 자라며 쌀을 씻어 밥을 해 먹어본 적 없이 살다가 하루 세 끼를 내 손으로 해서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먹여야 한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 땐 온통 머릿속을 걱정스럽게 한 일이었습니다.

철없던 걱정은 약한 아이를 기르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먹는 대로 간다'는 어른들의 말은 우리 세대에도 정말 맞는 말이지만, 그 본뜻은 이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뭐든지 잘 먹고 많이 먹는 아이가 튼튼하다'는 말이 이제는 '안전하지 못한 음식을 먹은 아이들이 아토피나 소아비만 등 질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이 된 것입니다.

안전한 음식을 먹은 아이가 튼튼하다

'모성만큼 강한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철없는 엄마들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고통을 무심하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엄마들은 생협을 통해 안전한 먹거리로 밥상을 바꾸고, 식품안전법은 어떻게 돼야 하는지 공부도 하고, 농산물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고생하시는 농부들의 터전도 찾아다니며 우리 아이가 아프고 세상이 온통 썩어들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의 고통이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깨달음도 이미 늦었다는 듯이 올해는 WTO(세계무역기구) 쌀 협상이 합의됐고 10년 넘게 싸워온 농민들은 어느 해보다도 처절하고 아득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땅을 살리는 건 고사하고 남의 나라 쌀을 사먹기 위해 그동안 지켜온 곡식들을 포기하게 하는 상황, 참으로 안타깝다 못해 분노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생협 조합원들은 아이들과 함께 계절마다 자연을 체험하고 사라져가는 이웃을 느껴보는 의미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볕좋은 봄에는 바구니 들고 쑥을 캐러 가고, 여름이면 캠프를 열어 아이들 스스로 바른 음식을 찾는 훈련도 하며, 날씨가 시원해지면 가을걷이하는 생산자들과 손발을 맞춰 어설픈 수확의 기쁨도 누려봅니다.

그런데 올 가을엔 풍년을 기뻐할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합니다. 쌀의 위기는 길거리에서 싸우는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소비자와 국민의 위기이기 때문이지요. 안전한 밥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땅과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소비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쌀이 무너지면 우리 땅에서 나는 다른 모든 농작물도 위태로워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쌀을 제외하면 우리 농산물의 자급율은 5%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우리 농산물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 당연해졌고 우리 것을 찾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이 됐습니다. 정말 소비자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시골 구석구석까지 중국산·칠레산·미국산 농산물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우리 농산물 찾기 어렵다. 쌀마저 사라진다면...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밥상은 값싼 외국 농산물 투성이로 변했지만 농민들은 우리 것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국의 소비자들도 의지를 모으자는 의미에서 10월 30일 여의도에서 소비자 1만인대회가 열립니다. 이미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의 행사가 성사되기를 바라며 추수할 논밭을 두고 소달구지를 끌고 국토순례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땅끝 해남에서 여의도까지 1000리 넘는 길을 걸으며 '우리 쌀을 지키자'고 국민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시작은 생산자 분들이 했지만 지금은 순례단이 지나가는 지역에서 소비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걷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엄마를 따라 달구지를 따라 걷는 아이들은 그저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며 무슨 축제라도 하는 줄 압니다. 그러다가 발이 터지도록 걷고 또 걷는 순례단에게 묻습니다. '우리 쌀을 지키려면 밥을 많이 먹으면 되지, 다리 아프게 자꾸 왜 걷기만 하느냐'구요.

함께 걷는 소비자들은 그간 막연하게 지니고 있던 불안감을 한 걸음씩 내딛는 동안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 있습니다. 풍년이 든 들녘은 넉넉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우리가 걷는 이유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절규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쌀을 먹이고 싶어도 없어서 못 먹일 앞날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a '우리쌀 지키기, 우리밀 살리기'를 위한 소달구지 대장정단이 경남 고령군 고령읍내로 향하는 모습.

'우리쌀 지키기, 우리밀 살리기'를 위한 소달구지 대장정단이 경남 고령군 고령읍내로 향하는 모습. ⓒ 추진본부 제공

"우리 쌀 지키려면 밥을 먹어야지, 왜 걷나요?"

순례단은 지난 15일 경북 성주에서 중간보고 행사를 했습니다. 농민들과 소비자들은 한숨이 절로 나오는 현실을 잠시 잊은 채 수확 농산물 전시회도 하고 비빔밥도 같이 먹고 소달구지와 사진도 찍으며 막걸리 한 잔에 노래도 불렀습니다.

행사를 마치기 전 생산자 자격으로 참석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일어서시려다 말고 다시 무릎을 꿇고 앉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순례단과 소비자들에게 '너무 고맙다'고 인사하셨습니다. 농촌을 지키려고 소비자와 순례단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시면서. 눈물이 나서 얼굴을 들 수 없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이라도 미약한 소비자들의 힘을 모아 우리 쌀을 지켜내야 합니다. 농업의 미래는 곧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의 미래이기 때문이지요. 할아버지와 마주한 사람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쌀이 생명이자 주권이라면 쌀을 지켜내는 일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순서가 없습니다. 소달구지가 가는 길마다 쌀을 지키려는 국민들의 마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는 30일 1만인대회가 우리 땅을 지키려고 싸워온 농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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