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이는 볏가마, '활활' 타오르는 농심

[현장] 전국 농민단체 '쌀협상 비준안' 반대 열기 고조

등록 2005.10.17 22:40수정 2005.10.17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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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전농 등은 지난 15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쌀협상 비준안 국회 처리를 반대하며 '1000만석 나락 적재 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정부는 연내 처리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어 충돌이 일 것으로 보인다. 17일 삭발식을 거행하는 전농 부경연맹 회원들.

전농 등은 지난 15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쌀협상 비준안 국회 처리를 반대하며 '1000만석 나락 적재 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정부는 연내 처리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어 충돌이 일 것으로 보인다. 17일 삭발식을 거행하는 전농 부경연맹 회원들. ⓒ 오마이뉴스 윤성효

가을 수확을 끝낸 농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전국 곳곳에서 한해 동안 키워온 나락이 불타고, 군청·도청 앞마당에는 막 출하된 쌀가마들이 쌓이고 있다.

농민들은 올해도 '추곡수매제 폐지' 등 춤추는 농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쌀값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저버렸다. 설상가상으로 17대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쌀협상 비준동의안' 처리를 서두르고 있다. 2005년 10월, 자식처럼 키운 나락에서 타오르는 연기만큼이나 농민들의 가슴에도 불길이 일고 있다.

17일 전국 주요 농촌에서는 전국농민회총연합(의장 문경식) 등 농민단체가 기획한 '1000만석 나락 적재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년간 지은 쌀을 관청 앞마당에 내다놓는 농민들의 요구는 크게 한 가지. 지난 6월 7일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쌀 협상 비준동의안의 연내 처리를 유보해 달라는 것이다.

전농 등은 오는 12월 홍콩에서 열리는 WTO(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 협상 결과를 보고 비준안을 처리해도 늦지 않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각료회의 협상 결과가 나와봐야 쌀시장 개방 확대가 우리나라에 가져올 영향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는게 농민단체의 입장이다. 하지만 정부가 쌀협상 비준동의안의 연내 처리 입장을 계속 고수하면서 농민들도 극한 투쟁에 돌입했다.

관청 앞마당에서 불타는 쌀가마니... 전국 적재쌀 10만가마 이상 추정

'쌀협상 비준동의안' 주요 내용

1. 우리나라에 부여된 쌀에 대한 특별대우를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간 추가 연장.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최소시장접근 물량은 현행 20만5528톤에서 2014년에는 40만8700톤이 되도록 매년 균등하게 증가시킴.

2. 현행 최소시장접근 물량인 20만5228톤에 대하여는 중국, 미국, 호주, 태국에 국별 쿼터로 할당. 향후 증가되는 최소시장접근 물량은 최혜국대우 원칙에 따라 국별 쿼터로 운영.

3. 특별대우 이행기간 중에는 각 연도의 개시시기에 특별대우의 적용을 중단할 수 있음.

4. 밥쌀용으로 우리나라에 시판되는 수입쌀의 물량은 2005년 10% 이상에서 출발해 2010년도에는 30% 이상까지 되도록 단계적으로 균등하게 증가시킴.
이날 하루 동안 전국 23개 시·군·도청 앞에는 모두 3만7000가마(전농 추산)의 쌀이 쌓였다. 전남 해남군에서만 1만5000여 가마가 길거리에 야적됐고, 영광·광주·화순에서는 각각 3000가마의 쌀이 면사무소 앞에 버려졌다. 지난 15일 이미 '나락 적재 투쟁'에 돌입한 전남·북 일부 지역까지 합치면 전국적으로 10만 가마가 넘는 쌀이 적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농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쌀가마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날 한농연 소속 농민들은 경남 마산에서 채 수확되지도 않은 논 400평을 불태웠다. 경북 김제시와 충남 논산에서도 성난 농민들이 왕겨와 쌀가마에 불을 붙였다. 전농 경남도연맹 회원들은 삭발과 천막 농성까지 벌이며 쌀협상 비준동의안 처리 반대에 나섰다.

농민단체는 이번달 말까지 '1000만석 나락 적재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전농은 오는 28일을 전국 차원의 '농민 총파업'을 하겠다고 선언, 공권력과의 대규모 충돌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전농은 이날 전국 100여 곳에서 동시다발 집회를 열고 정부에 쌀협상 비준동의안 연내 처리 방침 철회를 요구할 계획이다.


이처럼 농민들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지만 정부와 여당은 쌀협상 비준동의안 처리에 대한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쌀협상 비준안은 이미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상정돼 있다. 국정감사가 한창인 지난 9월 23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여당의 '기습 상정'에 항의해 상임위 회의실을 점거하는 등 진통을 겪었지만 결국 상임위에 비준안이 올라갔다.


a 민주노동당은 정부의 졸속적인 쌀협상 비준안 처리 강행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비준안 처리 방침을 확고히 하고 있다. 지난 9월 23일 통외통위 회의실을 점거한 민주노동당 의원들.

민주노동당은 정부의 졸속적인 쌀협상 비준안 처리 강행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비준안 처리 방침을 확고히 하고 있다. 지난 9월 23일 통외통위 회의실을 점거한 민주노동당 의원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서로 한발씩 양보한 결과다. 열린우리당은 기습처리하지 않는 대신 통외통위에 비준안을 상정하자고 제안했고, 민주노동당은 공청회를 한번 여는 조건으로 통외통위 상정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애초 정부와 여당은 19일을 쌀협상 비준동의안 처리의 '마지노선'으로 삼아 국회 본회의 표결까지 마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반발이 거세자 일단 계획을 수정했고, 민주노동당은 지난 12일 밤 통외통위 차원의 공청회 카드를 관철시킨 다음 쌀협상 비준동의안의 상임위 상정을 인정했다.

노 대통령 "국가 손실 막대"... 비준안 처리 공개 주문

절차로 보자면 이제 쌀협상 비준동의안은 통외통위 통과와 본회의 표결만 남아 있다. 상임위 논의 과정에서 일부 진통이 예상되지만, 한나라당과 손잡은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연내 처리를 강행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쌀협상 비준동의안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 노 대통령은 지난 12일 이해찬 총리가 대독한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국회의 (쌀협상) 비준동의가 늦어질 경우 금년도 의무이행이 불가능하게 돼 대외신인도가 저하되고 국제적 분쟁이 일어나는 등 국가적 손실이 막대할 것"이라며 경고했다.

사실상 공개적으로 여당에 비준안의 조속한 처리를 당부한 셈이다. 다음날인 13일에는 이에 화답하듯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쌀협상 비준안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통외통위는 18일 오후 2시 쌀협상 비준동의안과 관련한 상임위 차원의 공청회를 연다. 그 외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공청회를 통해 농민단체와 정부·여당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정부안이 그대로 강행 처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농민들이 삭발과 무기한 천막농성, 쌀가마니 태우기 등으로 강경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a 전북 부안군농민회가 쌓아논 나락 가마니. 전농은 오는 28일 전국 100여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전북 부안군농민회가 쌓아논 나락 가마니. 전농은 오는 28일 전국 100여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 전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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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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