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승계중인 재벌들, 속이 탄다

[10대 재벌의 경영권 승계 - 상] '이재용식' 부의 세습, 이제 끝

등록 2005.11.09 10:05수정 2005.11.0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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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따갑다. 엄격히 따지면 재벌총수 일가에 대한 곱지 않은 눈초리다. 그동안 한국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음에도, 국민들의 시선이 따가운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투명하지 못한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와 경영권이 문제다. 특히 재벌 2·3세로의 경영권 승계는 기업 차원을 넘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경영권 승계를 앞둔 재벌들의 모습과 문제점, 향후 방향 등을 두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재벌 경영권 승계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비상장계열사 등 과거와 같은 방식의 편법증여를 통한 경영권 승계가 막히면서 재벌들은 새로운 루트를 찾고 있다.사진 왼쪽부터 삼성, 현대·기아차, LG, SK그룹 사옥.
재벌 경영권 승계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비상장계열사 등 과거와 같은 방식의 편법증여를 통한 경영권 승계가 막히면서 재벌들은 새로운 루트를 찾고 있다.사진 왼쪽부터 삼성, 현대·기아차, LG, SK그룹 사옥.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기사보강-9일 오전 11시]

"이제 그런 방식은 안 된다고 봐야지요. 그래도 우리는 (지주회사격인) 지분을 오래 동안 천천히 늘려 와서 나은 편인데…. 위쪽 그룹 사람들은 아마 속이 탈겁니다."

A그룹 계열사에서 경영기획 총괄업무를 맡고 있는 한 임원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성(姓)조차도 언급되는 것을 꺼렸다. 회사 이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선 그를 만나기도 어려웠다. 시간적 여유도 없고, 딱히 할 얘기도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선술집에서 그를 만난 시각도 자정께였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바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각종 리포트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새가 없다고 했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지난달 초인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이 유죄라고, 그때 '아,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장 윗선에서 관련 리포트를 준비하라고…. 게다가 우리 회사도 거의 지주회사 격이니까, 더 신경도 쓰이고…."

그는 재벌도 다 같은 재벌이 아니라고 했다. 상위 4대 재벌과 10대 재벌이 다르고, 20대 재벌이 또 다르다고 한다. 계열사가 많고 순환출자구조가 복잡한, 오너의 지분이 작은 그룹일수록 경영권 승계 문제는 정말 풀기 어려운 숙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4대 재벌을 염두에 둔 듯 했다.

10대 재벌 가운데 5개 재벌, 경영권 승계 현재진행형


10대 재벌 경영권 승계 현황
10대 재벌 경영권 승계 현황오마이뉴스 이지연
실제로 많은 재벌그룹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좁혀 말하면 경영권 승계를 앞둔 재벌총수 일가들이다. 특히 지난달 4일 법원이 삼성의 편법증여를 두고 '유죄' 판결을 내리자, 이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커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최근 국내 주요 재벌그룹을 상대로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해 조사를 벌인 결과, 상위 10대 재벌 가운데 5개 그룹 정도에서 경영권 승계가 진행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5개 그룹은 현대자동차, LG, 한화, 금호아시아나, 두산그룹 등이다.


최근 기아자동차 지분을 추가로 사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본텍과 글로비스 등 비상장계열사 최대주주로 있으면서 정몽구 회장의 후계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LG는 구본무 회장이 양자인 광모씨(26)로의 경영권 승계를 고민 중이다. 딸만 둘을 둔 구 회장은 유교적 가풍과 가족회의를 거쳐, 지난해 11월 구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광모씨를 양자로 들였다. 광모씨는 LG의 지주회사격인 (주)LG의 지분 2.80%를 가지고 있다.

한화는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동관씨(22)가 지주회사격인 (주)한화 지분 3.11%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동관씨는 올 6월 한화의 IT 자회사인 한화S&C의 지분 60%를 인수하면서 최대주주가 됐다. 한화S&C의 나머지 지분도 차남인 동원, 삼남인 동선씨 형제가 가지고 있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8월 고 박성용 그룹 명예회장의 장남인 재영씨(35)가 금호석유화학과 금호산업 등의 지분 모두를 상속받았다. 이에 따라 재영씨는 고 박정구 회장의 장남인 박철완씨와 함께 금호그룹 3개사의 대주주로 떠올랐다. 철완씨는 재영씨와 사촌간이다.

최근에는 박삼구 회장의 장남인 세창씨(30)가 금호타이어 기획조정팀 부장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금호아시아나는 박삼구 회장이 공식적인 그룹 회장을 맡고 있지만, 2세 형제들이 그룹 지분을 비슷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경영권을 공유하는 '형제경영'체제를 보이고 있다.

최근 형제의 난으로 박용성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간 두산은 현행 지배구조 자체에 대한 변화 가능성까지 나오고 있다. 상위 재벌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4세 경영체제에 들어선 두산은 향후 지배구조 변화에 따라 경영권에 큰 변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 이지연
나머지 그룹 가운데 삼성은 사실상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 단계에 있지만, 그룹 지주회사격인 에버랜드에 대한 편법증여가 유죄 판결을 받아 막판 승계 작전에 제동이 걸렸다.

이밖에 소버린과 경영권 분쟁에서 이긴 SK 최태원 회장과 올해 LG그룹에서 분리해 7월 출범한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경우 경영권 승계 움직임은 거의 없는 상태다. 재벌 2.5세로 불리는 최 회장의 나이가 45세로 아직 젊은데다, 최 회장의 세 자녀 역시 경영권을 승계하기에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또 올해 LG로부터 나와 7월에 공식 출범한 GS그룹은 허창수 회장이 지주회사인 GS홀딩스 지분 5.68%를 가지고 있다. 허 회장 이외 나머지 4형제의 홀딩스 지분을 포함하면 16.66%다.

롯데쇼핑 등 그룹 주력계열사 대부분이 비상장 회사인 롯데그룹은 신격호 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으로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신 부회장은 롯데쇼핑 지분의 21.19%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재벌 그룹 쪽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경영권', '승계' 등의 단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는 곳도 많았다. 기아차는 정 사장의 기아차 지분매입이 경영권 승계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였고, LG도 광모씨의 양자입적과 경영권 승계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또 대부분 기업들이 "현재 경영권 승계 움직임은 거의 없다"는 입장을 비슷하게 나타냈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의 경영권 승계에 대해서는 계열사 CEO에게 물어봐도 알기 어려운 내용"이라며 "오너와 샐러리맨의 차이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더이상 이재용식 모델은 통하지 않는다"

3세 체제로 경영권이 이동중인 재벌들의 경우 상위 4대 재벌과 하위 재벌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16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와 전경련 회장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3세 체제로 경영권이 이동중인 재벌들의 경우 상위 4대 재벌과 하위 재벌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16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와 전경련 회장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대부분 3세 체제로 경영권이 이동중인 재벌들의 경우 상위 4대 재벌과 하위 재벌 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덩치가 큰 재벌일수록 소유와 경영권을 넘기는 과정에서 극도의 진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진통을 겪으면서도 경영권 승계는 예정대로 진행 중인 곳도 상대적으로 많다.

반대로 중하위 그룹들의 경우 상위 재벌보다 원활하게 경영권 이동이 이뤄지고 있다. 삼성과 친족그룹인 CJ그룹처럼 이재현 회장으로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한 곳도 있다. 또 이들 하위 그룹의 경우 4대 재벌총수 일가와 달리 해당 그룹의 지분율도 상대적으로 높다.

따라서 삼성 이재용 상무의 편법증여나,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 두산그룹의 '형제의 난' 등 그룹 권력이동 과정에서의 경영 분란이 외부에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재벌연구 전문가인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4대 재벌의 경우 기업이 커지는 과정에서 오너 일가의 지분이 줄어들면서 3세 경영체제로의 승계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면서 "대신 하위 재벌의 경우 총수 일가 지분율이 높아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고 분석했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소장(한성대 교수)은 "이건희 회장은 62개 계열사를 단지 0.28% 지분으로 지배하고 있다"면서 "계열사를 동원한 그룹 전체 지배권을 장남 재용씨에게 넘기려다 법원으로부터 사실상 제동이 걸렸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비상장 계열사를 통한 주식을 헐값으로 매각하는 방식의 이재용식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다"면서 "상위든, 하위재벌이든 정당하지 못한 부의 세습과 경영권 이양에 대해선 사회가 용납하지 않을것"이라고 강조했다.

'3세 경영'을 준비 중이거나 진행 중인 재벌들은 숨을 고르고 있다. 편법적인 경영 승계라는 지름길이 막힌 재벌들은 새로운 루트를 찾고 있다. 그동안 하나같이 '투명'과 '정도'를 외쳐온 재벌오너 일가의 대응을 국민들은 다시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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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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