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두 황태자, 이재용-정의선의 서로 다른 길

[10대 재벌의 경영권 승계-하] 삼성과 현대차의 고민

등록 2005.11.11 19:14수정 2005.11.1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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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따갑다. 엄격히 따지면 재벌총수 일가에 대한 곱지 않은 눈초리다. 그동안 한국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해왔음에도, 국민들의 시선이 따가운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투명하지 못한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와 경영권이 문제다. 특히 재벌 2·3세로의 경영권 승계는 기업 차원을 넘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경영권 승계를 앞둔 재벌들의 모습과 문제점, 향후 방향 등을 두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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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왼쪽)와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왼쪽)와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오마이뉴스 권우성

"정의선 사장 지분 추가 취득, 책임경영 차원... 지분 1.99%로"

지난 1일 기아자동차가 내놓은 보도자료 제목이다. 한 장짜리 보도자료에는 기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기아차 관계자의 말이 인용돼 있다. '정 사장의 지분 취득이 기아차 경영진으로서 책임경영 차원이며, 지주회사인 현대모비스 주식 취득이 아닌 만큼 후계구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료를 받은 대부분의 언론들은 기아차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자동차업계를 맡고 있는 중앙일간지 한 기자는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구조나 정 사장의 위치, 역할 등을 아는 사람이라면, 후계구도와 무관하다는 말이 얼마나 궁색한지를 잘 알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법원의 삼성 에버랜드 편법증여에 대한 유죄판결 이후, 재계는 '이재용-정의선'으로 대표되는 재계 두 황태자의 경영권 승계과정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경영권 승계 행보가 관심거리다. 이유는 주요 계열사 지분이 거의 없는 정 사장의 경영권 승계 방법이 향후 재벌의 경영권 승계 '모델'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암초 만난 이재용 상무와 삼성의 고민

이미 96년에 사실상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한 삼성의 경우는 막판에 암초를 만난 경우다. 올들어 터져 나온 삼성공화국 논란과 'X파일' 사건의 불법정치자금 제공 문제에 이어, 국정감사 기간에는 지배구조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그 정점에 이건희 회장과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가 있다. 이 회장은 지난 9월초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한 이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이 상무 역시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이 상무를 둘러싼 문제들도 녹록치 않다. 삼성 지배구조의 핵심인 에버랜드 편법 증여 사건은 검찰 조사와 고등 법원 심리가 진행 중이다. 삼성은 1심 판결에 불복해, 이미 항소했고 끝까지 법정에서 해결할 태세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금융산업구조조정에관한법률(금산법) 개정도 지배구조와 관련돼 있고, 최근에는 이 상무가 최대주주로 있는 비상장계열사인 서울통신기술의 주식 헐값 매각 논란에 휩싸여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달 이 상무 등 전·현직 임원들을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해 놓은 상태다. 이 상무가 직접 고발 당사자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삼성이 올해 헌법재판소에 제기한 공정거래법에 대한 위헌소송도 이 상무의 경영권 승계 구도와 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 상무와 직접적 관련은 없다고 하지만, 삼성 'X파일'에 대한 검찰 수사도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포스트 이건희' 시대의 이재용 그룹 장악력은?

지난 5월 '고려대 100주년 삼성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이재용 상무(오른쪽)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5월 '고려대 100주년 삼성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이재용 상무(오른쪽)가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물론 이 같은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재계 안팎에선 이 상무의 경영권 승계는 무난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법원 판결이 1심인데다, 이 상무 등과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여러 변수가 있다고 하지만, 이 상무로의 승계는 그대로 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상무의 그룹 장악력은 이건희 회장 때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에버랜드의 최대주주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등 그룹 전체에 대한 지분 장악력이 취약하다. 또 제도적으로 기업 환경이 전문 경영인과 독립 경영쪽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게다가 과거 벤처기업인 'e-삼성' 등 IT 기업을 운영하다 실패해 계열사가 그대로 부실을 떠안은 사례는 이 상무의 경영 리더십에 여전히 의문부호를 찍게 만드는 요인이다.

따라서 '포스트 이건희' 시대에는 총수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 되는 것보다, 삼성이 그동안 갖춰어 온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훨씬 더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그만큼 계열사의 자율성도 높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재벌들의 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져 온 것은 사실"이라며 "무엇보다 재벌 총수 오너의 결정이라도 해당 계열사의 이익을 침해하게 되면, 계열사 경영진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사회전반에 걸쳐 투명성이 크게 확대되고 시민의식이 높아진 것도 있지만, 계열사 사장이 기존 주주 이익과 배치되는 결정을 하게 되면 이제는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상장사인 기아차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라?

지난 4월 '2005 서울모터쇼'의 기아자동차 프레스데이 행사장에 모습을 비친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이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지난 4월 '2005 서울모터쇼'의 기아자동차 프레스데이 행사장에 모습을 비친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왼쪽에서 세 번째).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이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오마이뉴스 권우성
현대자동차 그룹의 고민은 어떻게 정의선 사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느냐다. 편법적인 경영 승계가 봉쇄된 마당에 정 사장이 현대자동차 그룹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선 시장에서 지분을 사서 늘리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회사의 주식인가였다.

기아자동차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룹 지주회사격인 현대모비스의 1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또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도 한몫했다. 기아차는 모비스의 지분 18.19%를 가지고 있다. 모비스는 또 현대차 지분을 11.24% 가지고 있고, 현대차는 다시 기아차 지분을 38.67%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기아차 지분 늘려 사실상 지주회사인 모비스를 장악하는 방식인 셈이다. 실제로 정 사장은 올 2월 7일과 11일, 14일 세 차례에 걸쳐 기아차 주식 350만주(1.01%)를 사들였다. 이어 지난 1일 정 사장은 다시 기아차 주식 340만45OO주(0.98%)를 사면서, 지분을 1.99%로 늘렸다.

하지만 기아차 지분을 늘리는 데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기아차 주가가 꾸준히 오르면서, 정 사장의 지분매입 비용도 크게 늘고 있다. 현재 주가를 기준으로 정 사장이 앞으로 10%까지 지분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6000억여원이나 되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경영권 승계의 실탄창구, 비상장 계열사

현대자동차 지배구조
현대자동차 지배구조오마이뉴스 한은희
정 사장은 이 돈을 어디에서 마련할까. 이 과정에서 주목받는 것이 정 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비상장 계열사들이다. 정 사장은 현대자동차의 물류를 독점하고 있는 글로비스의 지분 39.85%를 가지고 있다.

또 최근 아파트 건설에 뛰어든 건설회사 엠코(25%), 카오디오 등 자동차부품업체인 본텍(30%)의 최대주주로 올라있다. 이밖에 올 5월에 만들어진 종합광고대행사 이노션에도 40% 지분으로 참여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기아차 주식의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이들 비상장계열사들이 동원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이들 회사들을 주식시장에 상장한 후, 배당금이나 지분 처분 등으로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7월 현대차그룹에서는 글로비스를 내년에 상장할 계획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글로비스의 경우 현대차의 지원 속에 지난해 당기 순이익만 696억원을 기록한 알짜회사다. 삼성증권에서는 글로비스가 상장될 경우 주당 20만 원은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39.85%를 가지고 있는 정 사장은 지분만큼 배당만 받아도 277억 원이 손에 들어오게 되고, 24%의 지분만 팔아도 1조5000억 원이라는 거액의 실탄을 만질 수도 있다. 비상장 계열사들이 경영권 승계의 실탄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지나 국정감사에서 심상정 의원은 "정의선 사장이 이들 4개 비상장회사에 594억 원을 투자하고 불과 2~3년 만에 4000억 원 이상의 이득을 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 최한수 경제개혁팀장도 "글로비스 등이 급성장할수 있었던 것은 현대차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라며 "시장 감시 밖에 있는 비상장회사를 밀어주고, 상장하거나 합병으로 주요 계열사 지분을 취득하게 하는 것도 편법 상속"이라고 비판했다.

경영수업중인 이재용 상무, 경영중인 정의선 사장

재계 순위 1, 2위의 삼성과 현대자동차그룹은 여러가지로 비슷하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잘나가는 주력 계열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첫 번째고, 에버랜드와 현대모비스를 사실상 지주회사로 두고, 계열사별 순환출자식 지배구조 형태를 띠는 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이건희-정몽구 회장의 뒤를 이를 30대 중반의 외아들 '이재용-정의선'이 있다.

하지만 이들 '재계 두 황태자'의 길은 사뭇 다르다. 지난 2002년 이후 3년째 '상무' 직함 달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는 여전히 경영 수업중이다. 그룹의 중요한 행사에서도 먼저 나서는 법이 거의 없다. 이건희 회장이 가는 곳이면 항상 그림자처럼 수행한다.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은 99년 현대자동차 자재본부 이사로 회사에 들어왔다. 이후 2001년 상무로, 2002년 전무로 국내영업본부 영업과 기획을 담당했다. 올해 들어서는 기아자동차와 현대모비스, 현대자동차 기획총괄본부 사장으로 올라섰다. 경영 일선에 있는 것이다.

이 상무와 달리 정 사장은 정몽구 회장을 수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난 3월 기아차 수출 500만대 기념식에도 단독으로 연설했다. 정 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현대차 그룹의 후계자로 입지를 굳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얼핏 보면, 경영수업중인 이 상무보다 경영 일선에 뛰어든 정 사장이 현대차그룹의 후계구도를 완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법원의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 상무는 현재 에버랜드 지분 25.1%를 가진 최대주주다. 에버랜드는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는 있는 회사다.

하지만 정 사장은 그렇지 못하다. 정 사장은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는 주요 계열사 지분이 거의 없는 상태다. 그나마 최근에 기아차 지분을 늘려서 2% 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다.

경영은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지분구조만 따지면 매우 취약하다. 정 사장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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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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