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소주의 1960년대 지면광고. 위의 광고와 비교해보면 상전벽해를 느낄 수 있다.진로 제공
이후 산업의 하나로서 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1920년대 초반인데 당시 전국의 소주 제조업체는 무려 3200여 개에 달했다. 그야말로 '군웅할거'였다. 내가 서민들의 술상에 오르며 막걸리의 인기를 완벽히 제압한 건 1964년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져온 경쟁과 스트레스가 막걸리에 비해 '독한 술'인 나의 소비를 기하급수적으로 촉진시킨 것이다.
나로선 기쁜 일이지만, 생존의 정글에서 하루하루를 얼음판 걷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니 마냥 즐거운 추억만은 아니다. 그 때 당시 나의 제조장은 전국에 555개가 산재해 있었다.
내 조부모와 부모의 역사를 확 바꾼 사건은 1964년 정부가 강행한 이른바 '양곡관리법에 따른 증류식 소주의 제조금지'. 식량이 모자라던 판에 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것이 당시 정권에겐 호사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내 선조격인 '증류식 소주'는 거의 사라지고, 희석식의 내가 메이저로 부상했다.
내 몸에 함유된 알코올 도수도 세월에 따라 변해왔는데 1960년대 전까지 35%이던 내 알코올 도수는 1990년대까지 25%를 유지하다가, 순한 맛을 선호하는 신세대의 입맛에 맞춰 2001년에는 22%, 2004년에는 21%까지 떨어졌고, 현재는 낮은 도수의 내가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제 내가 태어나던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정제과정을 거친 내 몸에는 특유의 맛을 내기 위한 갖가지 첨가물들이 섞여진다. 설탕과 포도당, 구연산과 아미노산, 거기에 솔비톨과 무기염류까지.
내 맛은 바로 이 첨가물에 따라 달라지는데 각 제조사들은 여기에 그들만의 노하우와 기술력을 쏟아붓는다. 보해에선 이 과정에 위장에 이롭다는 단풍나무 수액을 넣기도 한다. 나를 만드는 회사들이 이 때까지 축적한 제 나름의 전략이 펼쳐지는 이 과정을 '첨가물 혼합 공정'이라 부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첨가물을 함유한 내게 남아있을 미세한 찌꺼기 등을 걸러내기 위한 과정이 이어지는데 그것이 '여과 공정'이다. 소주의 맑은 빛깔은 이 과정을 통해 빚어지게 된다.
년간 생산량 30억병, 시장규모 2조3천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