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샷~' 김태희에 스며들다

[탄생에서 소멸까지 ⑤ - 소주] 서민과 함께 한 100여년

등록 2005.11.22 09:33수정 2005.11.2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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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쉽게 만나고 소비하는 것들일수록 그것의 원재료가 무언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제품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무심히 넘어가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공정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하는 친숙한 제품의 탄생에서 소멸까지를 직접 제품의 입장이 되어 1인칭 화법으로 서술해보았다. 기획 다섯 번째 기사는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소주다. <편집자주>
진로 제공
스물 일곱에 요절한 미국의 록 가수 짐 모리슨은 럭셔리한 내 친구이자 경쟁자이기도 한 위스키를 가리켜 "영혼재귀의 수단"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이런 문학적 표현이라면 그가 어찌 한국의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을 따를까.

'귀천'의 시인 천상병은 나를 "장엄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추켜세웠고, 오세영 시인은 "스스로 존재의 결빙을 푸는 묘약"이라 했으며, 그 역시 서른 일곱에 요절한 호방담대한 시인 김관식은 두 되 짜리 주전자에 든 나를 남겨질 자식인양 안타까이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 때 김 시인은 내가 주는 취기를 연료 삼아 <시경(詩經)>을 번역 중이었다.

소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다. 내가 규격화된 병 속에 들어가 판매되기 시작한지 100여년.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긴 시간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분노를 달래주고 기쁨을 배가시키며,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했다.

조상들의 은덕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놀라지 마시라. 오늘 나를 마신 사람이 누구냐. 바로 탤런트 김태희다. 나를 생산한 진로라는 회사의 지면모델을 맡아 상큼한 미소로 나의 판매 신장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그녀. 오늘은 출연한 드라마의 종영파티가 있었고, 그녀가 PD의 권유에 나를 '원 샷' 했다. 허니, 지금 나는 김태희의 구강점막으로 스며들고 있는 중이다.

이제 잠시 후면 난 그녀의 기쁨을 극대화시켜주겠지. 그 순간을 기다리며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오늘까지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들을 준비들 되셨는가?

내 몸의 주요성분은 물... 주조용수가 나의 품질을 가늠한다

진로소주 생산공장.
진로소주 생산공장.진로 제공
보해소주 생산공장의 첨단시설.
보해소주 생산공장의 첨단시설.보해 제공
곡물로 만든 양조주를 연속식 증류기로 증류한 순수한 알코올(이를 '주정'이라 부른다)을 마시기 좋게 물로 희석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내가 태어난다. 주정의 원료로 쓰이는 것은 보통 쌀과 보리, 혹은 고구마나 타피오카.


순수 알코올 95%의 주정은 원료와 품질에 따라 각각의 맛과 향이 일정치가 않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 '정제'다. 정제공정을 거친 주정은 일정한 향과 순화된 맛을 가지게 된다.

나를 만드는 회사는 앞서 이야기한 진로에서부터 두산과 보해, 금복주와 대선, 선양과 무학 등 다양하다. 내 몸의 절대량이 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이들 회사는 각기 생산하는 내 친구들을 보다 깨끗하고 기능성이 뛰어난 물(주조용수)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진로의 경우는 섭씨 1천도에서 구워낸 대나무숯에 통과시킨 주조용수를 사용한다. 여타 회사들이 주조용수에 쏟는 정성 역시 이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

이제 김태희의 혈관 속으로 흐르기 시작한 내가 그녀의 기분을 '업'시켜 노래까지 하게 만들고 있다. 거 참, 그녀는 연기만이 아니라 노래까지 잘 한다.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다. 모두가 노래에 귀 기울이는 막간을 이용해 내 조상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내 시조가 중국을 거쳐 이 땅에 도착한 건 고려 말이다. 당시 시조는 순수한 곡물로 만들어졌고, 뒤끝이 깨끗해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하지만, 값이 비싸 일반 백성들은 감히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당시 평민들의 술은 막걸리 즉, 탁주였다.

내 조상의 역사를 바꾼 건 박정희 정부, 그 무서웠던 '양곡관리법'

진로소주 로고의 변천사.
진로소주 로고의 변천사.진로 제공
진로소주의 1960년대 지면광고. 위의 광고와 비교해보면 상전벽해를 느낄 수 있다.
진로소주의 1960년대 지면광고. 위의 광고와 비교해보면 상전벽해를 느낄 수 있다.진로 제공
이후 산업의 하나로서 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건 1920년대 초반인데 당시 전국의 소주 제조업체는 무려 3200여 개에 달했다. 그야말로 '군웅할거'였다. 내가 서민들의 술상에 오르며 막걸리의 인기를 완벽히 제압한 건 1964년이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져온 경쟁과 스트레스가 막걸리에 비해 '독한 술'인 나의 소비를 기하급수적으로 촉진시킨 것이다.

나로선 기쁜 일이지만, 생존의 정글에서 하루하루를 얼음판 걷듯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니 마냥 즐거운 추억만은 아니다. 그 때 당시 나의 제조장은 전국에 555개가 산재해 있었다.

내 조부모와 부모의 역사를 확 바꾼 사건은 1964년 정부가 강행한 이른바 '양곡관리법에 따른 증류식 소주의 제조금지'. 식량이 모자라던 판에 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것이 당시 정권에겐 호사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이에 따라 내 선조격인 '증류식 소주'는 거의 사라지고, 희석식의 내가 메이저로 부상했다.

내 몸에 함유된 알코올 도수도 세월에 따라 변해왔는데 1960년대 전까지 35%이던 내 알코올 도수는 1990년대까지 25%를 유지하다가, 순한 맛을 선호하는 신세대의 입맛에 맞춰 2001년에는 22%, 2004년에는 21%까지 떨어졌고, 현재는 낮은 도수의 내가 시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제 내가 태어나던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정제과정을 거친 내 몸에는 특유의 맛을 내기 위한 갖가지 첨가물들이 섞여진다. 설탕과 포도당, 구연산과 아미노산, 거기에 솔비톨과 무기염류까지.

내 맛은 바로 이 첨가물에 따라 달라지는데 각 제조사들은 여기에 그들만의 노하우와 기술력을 쏟아붓는다. 보해에선 이 과정에 위장에 이롭다는 단풍나무 수액을 넣기도 한다. 나를 만드는 회사들이 이 때까지 축적한 제 나름의 전략이 펼쳐지는 이 과정을 '첨가물 혼합 공정'이라 부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첨가물을 함유한 내게 남아있을 미세한 찌꺼기 등을 걸러내기 위한 과정이 이어지는데 그것이 '여과 공정'이다. 소주의 맑은 빛깔은 이 과정을 통해 빚어지게 된다.

년간 생산량 30억병, 시장규모 2조3천억원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와 관련된 이런저런 잡담을 좀 더해 보자. 내 시장규모는 지난해를 기준으로 2조3천억원. 이를 다른 방식으로 계산하면 약 30억병에 달한다. 굉장하지 않은가? 그 큰 시장에서 수위를 점하고 있는 업체는 진로다. 2004년 시장점유율은 55.4%. 생산량은 18억4천만병.

언급되는 숫자의 단위가 원체 높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아래는 진로의 생산량만을 재미있는 데이터로 변환한 것이다. 진로의 시장점유율을 염두에 둔다면 전체 생산량으론 어떤 데이터가 나올 것인지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1년간 진로에서 생산되는 나(길이 21.5cm)와 내 친구들을 모두 눕히면 지구둘레 9배에 해당하는 길이다(39만5600km). 지구와 달의 거리인 38만4400km보다 길다. 년간 만들어진 나를 모두 부으면 코엑스 수족관을 288번 채울 수 있다(66만1918kl).

지난 세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신인류'가 오늘날 나의 주 소비자. 만취형의 술자리와 강권하는 술잔을 경원하고 지양하는 그들이지만, 나의 소비는 아직도 꾸준히 성장중이다. 이는 세기가 바뀌었음에도 무한경쟁이 야기하는 스트레스는 여전하다는 반증이리라.

이제 남은 이야기를 마저 끝내자. 여과와 정밀여과 공정까지를 마친 나는 모두가 짐작하다시피 병에 담겨진다. 나를 담는 병의 색깔도 참으로 여러차례 변해왔다. 투명한 유리에서 갈색, 다시 연녹색의 병까지. 텔레비전 화면에서 가끔 보여주는 내 모습은 바로 이 '병입 공정'을 찍은 것이다.

나를 마신다는 건 애국의 길?

병에 담긴 내 형제들은 주류 도매상과 할인마트, 편의점과 소매상 등으로 각각 헤어져 우릴 마셔줄 사람을 기다렸다. 난 운좋게도 여기 방송국이 밀집한 여의도 한 식당으로 옮겨져 왔고, 앞서 이야기했듯 탤런트 김태희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쉽지 않은 행운을 누린 것이다.

그녀 역시 대부분의 현대인이 겪는 무한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지 않을 터. 그런 이들에게 세상만사 잠시 잊고 덧없을 망정 한 조각 웃음을 주는 게 나와 내 친구들의 역할이라면 나는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런 이유로 여한이 없다.

내 몸값의 53%는 세금이다. 한 병의 나를 마신다는 건 270원48전의 주세와 81원14전의 교육세를 마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서민들은 이처럼 부지불식간에 성실한 납세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니, 그들이 비싼 술을 마시는 불성실한 부자 납세자들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말한다면 오버일까?

진로와 보해에서 생산하는 소주들.
진로와 보해에서 생산하는 소주들.진로·보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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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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