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 귀차니즘... 차별성도 없는데 누굴 찍나?

[현장] 대학생들이 부재자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3가지 이유

등록 2006.05.26 11:52수정 2006.05.26 15:41
0
원고료로 응원


투표 용지가 든 봉투 안에는 각 지역 구, 시, 군 의 단체장·의원과 비례대표 등을 뽑는 색색의 투표용지 6장과 후보자 정책 자료집이 들어있었다. 연세대 캠퍼스(서대문구 신촌동)에는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됐다.
투표 용지가 든 봉투 안에는 각 지역 구, 시, 군 의 단체장·의원과 비례대표 등을 뽑는 색색의 투표용지 6장과 후보자 정책 자료집이 들어있었다. 연세대 캠퍼스(서대문구 신촌동)에는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됐다.오마이뉴스 이민정

연세대 3학년에 재학 중인 강용건(24·서울 마포구)씨는 부재자 투표 첫날인 25일 오후 1시께 수업이 끝나자, 곧바로 부재자 투표용지를 배포하는 대학본부 앞으로 달려갔다.

이름 옆에 서명한 뒤 두께가 꽤 두꺼운 황색 봉투를 건네 받아 투표소가 있는 백주년 기념관으로 향했다. 봉투를 뜯어보니 생전 처음 보는 색색의 투표용지 6장과 지방선거 입후보자들에 관한 정책자료집들이 빼곡하다. "왜 이렇게 많냐"며 깜짝 놀란 강씨는 지난 2004년 총선을 건너뛴 뒤 처음으로 선거권을 행사한다.

강씨가 부재자 투표에 나선 이유는 꼭 찍고 싶은 후보가 있었기 때문. "얼마 전 학교에서 부재자 투표 신고를 받기에 재미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대학 캠퍼스는 강씨처럼 투표를 앞두고 들뜬 대학생 유권자가 많지 않다. 투표 가능 연령이 19세(87년 6월 1일 이전 출생자)로 낮아졌지만, 부재자 투표가 실시되는 대학은 전국 9개교에 불과하다.

2002년 대선 당시 교내 부재자 투표소 설치가 허용된 후 교내 부재자 투표소는 감소세를 타고 있다. 2004년 전국 12개 대학교에 기표소가 섰지만, 올해 5·31 지방선거에는 3개교가 더 줄었다.

부재자 투표 첫날 서울 시내에는 연세대와 고려대, 세종대 등 3곳만 부재자 투표소가 열렸다. 선거법 규정상 2000명 이상의 선거인 신고가 있어야 설치가 확정되는데, 이를 채운 투표소는 연세대(2129명)와 고려대(2345명) 두 곳뿐이다. 그마저도 고려대는 25일 하루만 부재자 투표소를 연다.


세종대의 경우 신고자가 2000명을 넘지 않았지만 이웃한 건국대의 부재자 투표 신고가 500여 명이고, 광진구 내 부재자 투표소가 멀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예외규정'을 뒀다.

기자는 부재자 투표 첫날인 25일 연세대를 찾았다. 대학 캠퍼스에서 이제는 '희귀종'이 된 부재자 투표자들을 만나 학생들이 편리한 교내 투표소를 찾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유 하나, 무관심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된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 앞에는 부재자 투표소를 알리는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 하단에는 "20대의 투표로 낡은 정치 바꿔내요"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된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 앞에는 부재자 투표소를 알리는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 하단에는 "20대의 투표로 낡은 정치 바꿔내요"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오마이뉴스 이민정
"오늘 부재자 투표날인가요?"

기숙사 근처에서 만난 한 남학생에게 "부재자 투표 했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되돌아온 답이다. 그나마 부재자 신고를 하고, 투표일을 휴대전화 문자로 받아본 학생이다.

'이쑤시개로 쇠파이프를 만들던' 학생운동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다. 혁명, 사회과학 등을 향한 상아탑의 관심은 이제 토익 점수와 학점 등 취업분야로 옮아갔다.

이날 대학본부 앞에서 투표용지를 배부하던 이효준(25·경북 포항)씨는 "학생들이 선거에 관해 너무 무관심한 것이 문제"라며 "자신의 지역구에 누가 출마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며칠 전 새내기 한 명이 '심각한 취업난 속에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대학에 왔다'고 말해 충격받았다"면서 "이제 대학에서 정치나 사회적 이슈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대생인 김유석(27·광주시)씨는 "학생들이 정치적 의식을 갖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데,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것 같다"며 "공대생들은 정치이슈를 농담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고, 심지어 사회과학부 학생들도 뚜렷한 정치적 소견을 갖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김씨는 언론의 보도행태도 꼬집었다. 그는 "언론이 선거의 중요성을 인물중심으로 돌리고 있다"며 "정책 등 선거의 본질을 짚기보다는 후보자의 개인사, 과거 등을 보도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 둘, 차별성 없는 입후보자들

25일 연세대 유권자 운동본부 '20대 권리찾기' 소속 학생들은 대학본부 앞에서 부재자 투표를 신고한 이들에게 투표용지를 배포하고 있다.
25일 연세대 유권자 운동본부 '20대 권리찾기' 소속 학생들은 대학본부 앞에서 부재자 투표를 신고한 이들에게 투표용지를 배포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이민정
"하기는 했는데,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의무감에 했다."

이날 오전 투표를 끝낸 이후 백주년 기념관 앞에서 만난 김도형(20)씨. 그는 생애 첫 투표라 신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단다. "수많은 후보 중에 매력적인 사람이 없다"며 "공약도 비슷하고, 특히 등록금 문제나 통신사 요금 등 대학생들을 위한 정책이 눈에 띄지 않아 투표가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이아무개(관악구)씨도 "홍보물을 유심히 봤는데 정책들이 다 비슷하다"며 "정책이라고 나온 것들이 실현가능성이나 타당성을 찾아볼 수 없고, 후보들간의 차별성도 없다"고 지적했다. "후보자들이 이미지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유 셋, 귀차니즘

"투표하려면 동대문구청까지 가야 하고, 절차도 너무 복잡하다. 학교에 투표소가 있으면 모를까, 귀찮아서…."

서울시립대에 재학중인 김태성(22·경남 창원)씨는 부재자 투표 신고도, 투표를 위한 귀향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김씨는 부재자 신고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절차가 복잡하고, 귀찮다"고 일축했다. 이어 "굳이 투표를 위해 주소지를 옮길 이유도 없고, 서울에 살면서 창원에 나온 후보들을 찍는 것이 진정한 국민 참여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투표일은 학생들에게 쉬는 날 이상의 의미는 없다"며 "취업이나 학업성적 때문에 바쁜데 다른 이슈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지방선거부터는 주소지에 살고 있더라도 투표일에 참여하지 못하면 부재자로 신고할 수 있다. 일찌감치 부재자 투표에 참여한 뒤 투표 당일을 온전히 쉴 수 있음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젊은 유권자가 더 많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2. 2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3. 3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4. 4 미쉐린 셰프도 이겼는데... '급식대가'가 고통 호소한 이유 미쉐린 셰프도 이겼는데... '급식대가'가 고통 호소한 이유
  5. 5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한강 노벨상에 숟가락 얹는 보수, 그들에게 필요한 염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