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7월 수해를 입은 구로공단 복구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연합뉴스
박정희 정권이 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대규모 비리 사건 중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악적인 사건이 '구로 분배농지 소송사기 조작의혹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소불위의 박정희 정권이 직접 개입했으면서도, 사건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대법원의 2차 파기환송에 이어 재심까지 가게 됨으로써 정권 내내 소송이 진행된 유일무이한 사건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내내 소송... 무슨 일이길래사건 피해자인 백원만 등 200여 명(자손 등 155명 신청)은 1942년 경작해 온 구로동 일대 농지가 일본 육군성(陸軍省)에 강제로 수용됨에도 일제가 군용지로 사용하지 않자 해당 농지에서 계속 농사를 짓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귀속농지를 관리하던 신한공사, 중앙토지행정처 등의 관리를 받으며 경작을 지속하다 1949년 농지개혁법에 의거 1950년 농지분배를 받게 됐다.
문제는 국가가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이하 '구로공단')를 조성하면서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은 공단조성에 필요한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들 농민들을 경작지에서 강제로 몰아내고 이곳에 공단부지와 간이주택, 공영주택 등을 지어 분양했다.
이에 농민들은 자신들이 국가로부터 농지 분배를 받은 땅이라며 1964년 국가를 피고로 하는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정권은 소송과정에서 이곳이 분양받은 땅임을 주장하던 공무원들의 초기 진술을 번복하게 하는 등 개입했으나 법원이 농민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패소했다.
민사소송으로는 더이상 국가가 이길 수 없게 되자, 정권은 1968년 이들을 소송사기범으로 몰아 수사하면서 재심을 신청(1968년 3건, 1970년 1건)했다. 그러나 증거 미비 등으로 수사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상당수의 피해자들이 무혐의나 기소유예 등으로 불기소처분됨으로써 공단부지를 돌려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5월 "법무부장관으로 하여금 정부 측이 패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을 직접 지시하였다. 검찰은 1970년 7월 민사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을 영장도 없이 집단으로 연행, 구금하고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하면서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사기 소송이었음을 자백하도록 강요했다. 또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던 농민들에게도 소유권을 포기하거나 사기소송을 인정하도록 했다. 이에 불응한 40여명의 사람들을 소송사기죄로 기소했으며, 농지분배 사실을 계속 증언한 공무원들은 위증죄로 각각 기소한 후 형사재판을 거쳐 모두 처벌했다.
국가는 농민들을 사기소송범으로 기소한 형사재판이 최종적으로 끝난 1984년까지 15여년간 재심 민사재판을 심리하지 않은 채 두었다가(재심의 1심 선고는 1989년에 이루어짐) 위 형사재판의 결과를 바탕으로 심리를 진행해 모두 승소했다.
농부들 붙잡아 때려서라도... 구로공단을 지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