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여름. 월북한 시인 조운의 시비(詩碑) 훼손사건을 접한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지난 시절의 이념이 한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매도하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는 우렁우렁한 목소리.
그의 엄중한 경고가 있은 후 2개월. 마침내 조운 시비가 전남 영광에 다시 세워졌다. 불행한 시대 속에서 불행한 삶을 강요받았던 한 시인의 지울 수 없는 노래가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향의 사람들과 만난 것이다. 거기 새겨진 '석류'라는 시가 지금도 그대로 기억된다.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시인 이승철을 처음 만난 건 그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에서 활동하던 때다. 그 시절 그는 비단 위에 언급한 조운 시비 훼손사건만이 아니라, 각종 정치·사회적 현안에 대해 작가회의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김남주(시인. 1994년 작고)'라는 이름 자체가 금기이던 시절. 공안당국의 탄압을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함에도 당당히 김남주라는 이름을 달고 <나의 칼 나의 피>를 출간했던 사람이자,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작가회의가 내놓는 다분히 과격한(?) 성명서의 초안 작성자. 애초 이승철은 기자에게 과격한 투사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는 싸움꾼의 모습이 아닌 '가슴 훈훈한 술꾼' 이승철을 만나게된 건 그보다 한참 후다.
어떤 지연과 혈연으로도 묶이지 않는 기자에게 시시때때로 전화를 넣어 "여그 괜찮은 횟집인디 한잔 허세", 혹은 "아따, 얼굴 잊어 묵겄네, 시방 맥주 먹고있응께 을지로 영락골뱅이로 나오쇼"라는 말로 객지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서른 셋 청춘의 갈증을 달래주던 아니, 요새도 달래주고 있는 이승철. 그의 '선후배 사랑'에는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요 근간이다.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사건으로 공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시절. 자신이 직접 볶은 멸치와 손수 무친 깻잎반찬을 삼양라면 봉지에 꽁꽁 묶어 차입해주던 사람.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택시비가 없어 오도가도 못하는 가난한 문단 후배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만원 짜리 한 장을 찔러 넣어줄 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이승철인 것이다.
연전에 나온 그의 시집 <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을 다시 읽는다. 물신과 폭력만이 횡행하는 세상을 슬픈 목소리로 질타하면서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이승철의 시들. 그에게 시는 차가운 세상을 녹이는 한 잔의 화주(火酒)가 아니었을까?
저항하는 지식인의 냉철함과 인정 많은 시인의 따뜻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그와의 술자리,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서 이승철과 취하는 날들은 유쾌하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다시 한번 그 유쾌함에 취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