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한 동네' 정동을 아십니까?(1)

등록 2002.07.25 14:05수정 2002.07.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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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대사관측이 덕수궁 터에 미대사관, 아파트, 군인숙소 등을 신축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시민단체들이 그곳은 대한제국을 비롯한 우리 근대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장차 복원해야 할 매장문화재가 묻혀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의 터전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덕수궁 전경
덕수궁 전경겨레문화답사연합
신축 미대사관, 아파트 등을 설계한 마이클 그레이브스 교수는 덕수궁 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을 반대하는 것은 '반미감정'때문이라고 하고, 시민단체들은 '주둔국의 문화재를 짓밟고, 대규모 복합 외교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오만한 힘의 논리이자, 부당한 문화침탈 행위'라고 맞서고 있다.

덕수궁 터가 위치한 정동지역이 우리의 근대사에서 어떠한 역사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길래 미대사관측과 시민단체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일까? '덕수궁 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과 관련하여 정동과 덕수궁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정숙한 동네' 정동


일제시대 촬영한 경성 항공사진
일제시대 촬영한 경성 항공사진
정동지역은 경복궁을 중심축으로 하는 한성부의 서부 언덕진 곳을 말한다.

태조 이성계는 1397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비가 죽자 사대문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다는 원칙과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복궁 망루에서 바라보이는 사대문 안 정동 인근 황화방 북쪽 언덕에 묘를 두도록 했다. 또한 왕후의 영혼을 위해 흥천사라는 절을 세웠으며, 신덕왕후의 능을 '정능'이라 했다.

정능은 '정숙한 여인의 무덤'이란 뜻으로 정(貞)은 존경받는 부인의 능에 부쳐지는 이름이었다. 이렇게 하여 덕수궁 일대가 '정숙한 동네' 즉, 정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덕수궁의 원래 이름 '경운궁'

경운궁 평면도
경운궁 평면도한국청년연합회 우리궁궐길라잡이
덕수궁 자리는 원래 왕궁이 아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선조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옛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을 임시궁으로 삼고 이름을 '시어소'라고 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1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했다.

경운궁이 왕이 임어하는 정식 궁궐이 된 것은 고종때.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간 몸을 피하면서 대한제국 건설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구상하면서 덕수궁을 재건하여 1897년 2월 20일 돌아온다.


그후,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칭하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그러던 중, 1907년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한 후부터 경운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일제와 친일관료들에 의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넘겨주면서 '경운궁'은 일제에 의해 원래 이름이었던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덕수궁이란 이름은 이 궁궐의 원래 이름이 아니라 조선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던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였다. 이렇듯 '덕수'는 고종이 아들 순종에게 황제를 물려주면서 붙여진 궁호이다.

조선시대 정동은 어떤 지역이었나?


정동지역은 크게 ①덕수궁 지역 ②수옥헌을 중심으로 미국, 러시아, 프랑스 공사관 지역 ③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지역 ④선원전을 중심으로 하는 옛 경기여고, 덕수초등학교 지역 ⑤서학당을 포함하는 영국영사관, 성공회, 조선일보 지역의 다섯개 권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정동지역은 역사적으로 왕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곳은 왕실 가족들에게 선호되는 지역으로 계속적으로 왕자들이나 귀족들이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은 많은 왕자, 공주들을 두었고, 그들의 지위에 맞는 집을 주었다. 그래서 정동지역은 비공식적으로 왕실의 소유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동과 경운궁(현 덕수궁 터)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축하기 전까지만 해도 왕실의 관심은 거의 없던 지역이었다.

정동지역의 변화를 몰고온 미국

정동지역이 처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공사가 이곳 땅을 매입하기 시작한 1883년 5월 20일 즈음. 1880년 초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4대문 안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외국사절단들도 4대문 밖에 건물을 지어야만 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이 체결된 후, 미국 21대 아더 대통령은 1883년 3월 7일 조선주재 초대 미국특명전권공사로 푸트(H. Foote)를 임명했다.

영국과 독일이 정식 외교사절이 아닌 영사만을 임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지위의 외교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1883년 한양으로 들어온 푸트 공사는 조선해관 총세무사로 있는 묄렌도르프(독일인)의 집에 머무르다 1883년 5월 20일 민계호 소유의 사저를 구입하여 미공사관을 개설한다.

"경성부사"의 기록에 의하면, 푸트 공사가 1883년 당시 중부 정동에 있는 민계호 소유의 사저를 구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미국의 덕수궁터 구입과 관련하여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정동지역 땅매입은 1883년 5월인데, 조선에서 외국인의 땅매입이 가능했던 것은 1884년 10월부터였다. 이로 미뤄 미국이 조선의 땅(정동)을 불법 취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동과 덕수궁 일대 지도 덕수궁 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 부지를 볼 수 있다. (현 덕수궁은 원래 규모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
정동과 덕수궁 일대 지도덕수궁 터 미대사관, 아파트 신축 부지를 볼 수 있다. (현 덕수궁은 원래 규모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
미 대사관저는 원래 덕수궁 소유였던 것을 여흥(麗興) 민씨(閔氏) 일가의 것으로 넘어간 것이다. 민씨 가문은 조선조 말 권세가로 고종과 혼례를 올린 명성황후의 집안이다. 조선조 말 명성황후 시대에 경운궁은 명성황후 민씨 집안의 소유였다.

미대사관 기록에 의하면, 미대사관저 자리는 민계호, 민영교의 사저였는데 푸트 공사가 1884년 8월 14일에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같은 해 김감역 소유의 토지를 매입했으며, 1890년 김영보의 토지를 매입해 총 3차례에 걸쳐 정동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게 된다.

"궁궐 인근 지역에는 외국인과 본국인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서로 팔고 살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외국인이 양옥을 높이 지어 궁중을 내려다보니 그때마나 공무수행에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이에 각 궁궐을 열거 기록하여 보고하오니, 살펴보시고 각 궁궐 담장으로부터 500m 이내의 지역에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마음대로 새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옛집을 매매할 경우에는 반드시 관공서의 허락을 받은 후에 팔겠다는 의사를 각 공관에 먼저 알리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1902년 5월 한성부와 외부(현 외교통상부)사이에 오고간 보고서 내용)

대한제국 황실은 경운궁으로부터 500미터 이내 지역에 대한 개발 제한을 가하고 있었으며, 집의 높이를 제한하고 있었다. 또한 정동 일대의 옛집을 매매할 경우, 한성부와 외부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왜냐 하면, 황실은 정동지역을 "녕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동 지역에는 첫 외국공관으로 미국 공사관이 자리잡았고, 처음 세워진 이양관은 1888년 경희궁에 소속된 언덕인 상림원에 들어선 러시아 공사관과 러시아 아치이다. 또한, 1889년에는 옛 서울지방법원 언덕에 독일공사관이, 1901년엔 서소문 부근에 지어진 이탈리아 공사관, 배재학당, 영국공사관, 프랑스공사관 등 약 25개 건물이 들어섰다.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한 원구단
고종이 황제즉위식을 한 원구단
이런 공사관 건물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서면서 정동지역은 도시화되기 시작했다. 정동지역이 변화하게 된 두번째 계기는 1887년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하고 경운궁을 신궁으로 설정하면서부터이다.

고종황제는 조선과 교류하기를 원하는 서구 열강들의 압력으로 외국 사절단의 수가 증가하자 정동지역의 제한을 완화하여 외국사절단이 정동 지역을 이용하도록 했다.

김정동 교수(목원대학교 건축학과, 문화재 전문위원)는 "정동지역을 외국 사절단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완화한 것은 외세의 압력을 파악한 고종이 필요할 때 덕수궁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외교적 은신처를 갖기 원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왜 열강들이 정동지역을 선호한 것일까?

고종이 즉위한 1897년 정동지역은 한성부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종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동은 외국인이 선호하는 지역이 되어 외국인들을 위한 시설이 급격히 들어서면서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외국 공사관과 기독교 건물들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개화기의 상징으로 덕수궁 내에 '이양관'이 들어선다.

거세지는 외세 열강의 압력으로 고종이 정동지역의 제한을 완화하면서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 정동.

그렇다면 열강들은 왜 정동지역에 공사관을 세우려했던 것일까?

김정동 교수(목원대 건축학과, 문화재 전문위원)는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던 정동이 외국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한강 마포나루와 이어지는 서대문을 통하는 성곽 내 지역 △경복궁에 접근하기 용이한 위치 △경희궁과 덕수궁이 그 권역이었던 점 △정동 땅이 전통적으로 왕실의 재량권이란 점 △외세의 압력을 파악한 고종이 필요할 때 덕수궁을 피해 근처의 외교적 은신처를 갖기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덧붙이는 글 | 도움말 및 자료= 목원대 김정동 교수, 한국청년연합회 우리궁궐길라잡이, 겨레문화답사연합 궁궐지킴이

덧붙이는 글 도움말 및 자료= 목원대 김정동 교수, 한국청년연합회 우리궁궐길라잡이, 겨레문화답사연합 궁궐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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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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