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 평면도한국청년연합회 우리궁궐길라잡이
덕수궁 자리는 원래 왕궁이 아니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선조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으로 모든 궁궐이 불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옛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을 임시궁으로 삼고 이름을 '시어소'라고 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1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했다.
경운궁이 왕이 임어하는 정식 궁궐이 된 것은 고종때. 고종은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약 1년간 몸을 피하면서 대한제국 건설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구상하면서 덕수궁을 재건하여 1897년 2월 20일 돌아온다.
그후,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칭하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그러던 중, 1907년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한 후부터 경운궁은 일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일제와 친일관료들에 의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넘겨주면서 '경운궁'은 일제에 의해 원래 이름이었던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으로 덕수궁이란 이름은 이 궁궐의 원래 이름이 아니라 조선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던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였다. 이렇듯 '덕수'는 고종이 아들 순종에게 황제를 물려주면서 붙여진 궁호이다.
조선시대 정동은 어떤 지역이었나?
정동지역은 크게 ①덕수궁 지역 ②수옥헌을 중심으로 미국, 러시아, 프랑스 공사관 지역 ③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 지역 ④선원전을 중심으로 하는 옛 경기여고, 덕수초등학교 지역 ⑤서학당을 포함하는 영국영사관, 성공회, 조선일보 지역의 다섯개 권역으로 나눠 볼 수 있다(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
정동지역은 역사적으로 왕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곳은 왕실 가족들에게 선호되는 지역으로 계속적으로 왕자들이나 귀족들이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은 많은 왕자, 공주들을 두었고, 그들의 지위에 맞는 집을 주었다. 그래서 정동지역은 비공식적으로 왕실의 소유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동과 경운궁(현 덕수궁 터)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축하기 전까지만 해도 왕실의 관심은 거의 없던 지역이었다.
정동지역의 변화를 몰고온 미국
정동지역이 처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 공사가 이곳 땅을 매입하기 시작한 1883년 5월 20일 즈음. 1880년 초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은 4대문 안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외국사절단들도 4대문 밖에 건물을 지어야만 했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년)이 체결된 후, 미국 21대 아더 대통령은 1883년 3월 7일 조선주재 초대 미국특명전권공사로 푸트(H. Foote)를 임명했다.
영국과 독일이 정식 외교사절이 아닌 영사만을 임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지위의 외교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중요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1883년 한양으로 들어온 푸트 공사는 조선해관 총세무사로 있는 묄렌도르프(독일인)의 집에 머무르다 1883년 5월 20일 민계호 소유의 사저를 구입하여 미공사관을 개설한다.
"경성부사"의 기록에 의하면, 푸트 공사가 1883년 당시 중부 정동에 있는 민계호 소유의 사저를 구입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미국의 덕수궁터 구입과 관련하여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정동지역 땅매입은 1883년 5월인데, 조선에서 외국인의 땅매입이 가능했던 것은 1884년 10월부터였다. 이로 미뤄 미국이 조선의 땅(정동)을 불법 취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