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한 동네' 정동을 아십니까?(3)

등록 2002.07.28 20:27수정 2002.08.0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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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덕수궁과 정동 일대에 남아 있는 역사현장을 중심으로 탐방을 떠나보기로 하자.

대한문(大漢門)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 , 창경궁의 정문은 '홍화문',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으로 모두 '화(化)'자 돌림인에 유독 경운궁(덕수궁의 원래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의 정문은 '대한문'인 것일까?

경운궁의 원래 정문인 '인화문'
경운궁의 원래 정문인 '인화문'우리궁궐길라잡이
1896년 경운궁 중건 당시의 정문은 대한문이 아니라 경운궁 남쪽으로 난 문인 '인화문(仁化門)'이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으로 지금의 서울시청사 별관, 얼마 전까지 서부지원이 있던 부근의 경운궁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고종이 아관파천후 경운궁을 재건하여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에도 인화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인화문(仁化門)'은 지형상 앞이 가로막혀 답답하고, 정면으로 도로가 뻗어갈 수 없었다.

1910년대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
1910년대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한국청년연합회(KYC) 우리궁궐길라잡
1900년대 대안문 앞을 기점으로 방사선 도로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대안문(현 대한문)은 도로가 모여들고 접근이 용이한 서울의 중심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안문이 경운궁의 주 출입문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대안문 앞은 넓은 광장이 있어서 군대사열, 복합상소, 군중집회 등이 많이 벌어져 사실상의 정문 노릇을 하였으며, 대안문이 경운궁의 주 출입문으로 이용되면서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은 문으로써의 효용성을 잃고 퇴화되었던 것이다.


경운궁의 정문 이름은 '인화문(仁化門)'에서 1894년 대안문으로, 그리고 1904년 4월 14일 대화재로 1905년 경운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고종의 명으로 '대한문'으로 바뀌었다.

현재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대한문은 원래 자리에서 두번이나 뒤로 물러서게 된다.
현재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대한문은 원래 자리에서 두번이나 뒤로 물러서게 된다.신용철
대안문(大安門)에서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대안문의 '안(安)'이 여자가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고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되어 친일행각을 한 배정자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경운궁의 정문이 사실상 대한문으로 되면서 대한문은 원래의 자리에서 두 번이나 뒤로 물러나게 된다. 처음은 1914년 일제가 태평로를 만들면서 한번 뒤로 물러났으며, 1968년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또 다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석조전

석조전은 말 그대로 '돌로 지어진 건물'로 이 건물의 이름은 없는 것이며, 석조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1893년 이래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 (Sir John Mclery Brown)의 발의에 의해 영국인 기사 하아딩(G. R. Harding)에 의뢰해 설계한 건물로 처음에는 경희궁에 짓기로 한 것을 브라운의 주장에 따라 경운궁에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05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인 '메가다'가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오면서 건축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가 석조전은 '메가다'에 의해 완공되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당시 우리나라의 외세침략의 아픈 상처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국내 최초의 궁궐박사로 불리는 홍순민 교수는 "브라운이 경희궁이 아닌 경운궁에 석조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시 영국공사관이 경운궁과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석조전의 시공은 일본 '오쿠라 토목회사'에서 했는데, '오쿠라'는 경복궁을 해체해 일본으로 빼돌리는 데 앞장선 인물로 유명하다.

석조전은 1900년대 건립한 서양식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한 순 석조건물로 건축양식은 18세기 말∼19세기초 프랑스·독일·영국에서 유행한 '콜로니움(Colonial)'양식의 일종인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경운궁 석조전
경운궁 석조전신용철
석조전은 1937년 11월에 준공된 석조전 서관(별관)과 더불어 '이왕가(李王家)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석조전과 관련하여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1946년 해방 후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이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제한적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구성되어 1946년 1월 16일 석조전에서 첫 예비회담을 개최했다.

또한 석조전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 총투표 실시를 감시하기 위해 들어온 국제연합(UN) 한국위원회에서 사용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외부의 석조전과 내부 계단의 철제 장식만 남겨둔 채,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미군은 석조전에 본부를 두고 경운궁에 주둔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덕수궁에 주둔한 미군은 대한제국과의 일방적인 국교단절을 선언하며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버린 미국공사관을 다시 점거했다.

한국전쟁 이후 복구된 석조전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일당에게 점령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그 후 '국립미술관' '현대미술관'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2년 12월 문화재청이 창덕궁의 궁중유물을 전시하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개관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석조전에서 눈여겨볼 것이 또 하나 있다. 석조전 건물 앞에 자리잡고 있는 '분수'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조경에는 '분수'라는 것이 없다. 본래 물이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물이 거꾸로 치솟는 것은 '역천'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조전 앞 '분수'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던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과는 달리 인공적이고 기하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식 정원이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운교

서울시립미술관 1985년 우리나라 근대식 재판소 평리원이 있던 자리
서울시립미술관1985년 우리나라 근대식 재판소 평리원이 있던 자리신용철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선 자리는 일제때 경성지방법원이 있던 곳으로 1886년에는 국립 육영공원이 세워졌으며, 1895년 우리나라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이 들어선다.

1897년 이후 영선사는 덕수궁의 대지와 궁내부, 의정부가 있는 도로 건너편으로 다리를 놓았다. 이것을 '운교' 또는 '홍교'라고 불렀으며, 이준 열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평리원과 덕수궁 사이에 구름다리가 놓여져 있어 고종이 자주 왕래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운궁 '운교' 혹은 '홍교' 고종이 즐거 거닐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운궁 '운교' 혹은 '홍교'고종이 즐거 거닐었다는 기록이 있다.신용철
대한문에서 하비브하우스 방향으로 걸어오다보면 덕수궁 돌담길 중간에 주위 돌담길과는 다른 담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평리원과 덕수궁 사이에 놓여져 있던 '운교' 혹은 '홍교'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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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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