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대한문은 원래 자리에서 두번이나 뒤로 물러서게 된다.
신용철
대안문(大安門)에서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대안문의 '안(安)'이 여자가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고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되어 친일행각을 한 배정자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경운궁의 정문이 사실상 대한문으로 되면서 대한문은 원래의 자리에서 두 번이나 뒤로 물러나게 된다. 처음은 1914년 일제가 태평로를 만들면서 한번 뒤로 물러났으며, 1968년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또 다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석조전
석조전은 말 그대로 '돌로 지어진 건물'로 이 건물의 이름은 없는 것이며, 석조전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1893년 이래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 (Sir John Mclery Brown)의 발의에 의해 영국인 기사 하아딩(G. R. Harding)에 의뢰해 설계한 건물로 처음에는 경희궁에 짓기로 한 것을 브라운의 주장에 따라 경운궁에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05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인 '메가다'가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오면서 건축 주도권이 그에게 넘어가 석조전은 '메가다'에 의해 완공되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당시 우리나라의 외세침략의 아픈 상처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국내 최초의 궁궐박사로 불리는 홍순민 교수는 "브라운이 경희궁이 아닌 경운궁에 석조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시 영국공사관이 경운궁과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석조전의 시공은 일본 '오쿠라 토목회사'에서 했는데, '오쿠라'는 경복궁을 해체해 일본으로 빼돌리는 데 앞장선 인물로 유명하다.
석조전은 1900년대 건립한 서양식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한 순 석조건물로 건축양식은 18세기 말∼19세기초 프랑스·독일·영국에서 유행한 '콜로니움(Colonial)'양식의 일종인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