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쌀밥

[쌀사랑 릴레이 기고 ⑦] 농민시인 고재종

등록 2003.11.27 14:53수정 2003.11.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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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식량자급율은 5%에 불과하다. 그나마 쌀이 있어 식량 자급율 30%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내년이면 우리나라 쌀 시장은 시장에 전면 개방될 처지에 놓여있다.

<오마이뉴스>는 식량안보의 중요성을 환기하기 위해 '쌀사랑 릴레이기고'를 주1회 선보이고 있다. 개그우먼 김미화씨가 첫 테이프를 끊은 이래 재미 여성신학자 현경교수까지 모두 6명이 참여했고, 일곱번째로 고재종 시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고 시인은 '그리운 쌀밥'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내왔다. 원고료는 20킬로그램짜리 우리 쌀로 다음 기고자에게 전달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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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사랑 릴레이 ① : 개그우먼 김미화] "음메, 기살어! 농민들 기 살려줄 때"

고재종 시인.
고재종 시인.고재종
이 땅의 농민들이 벼 한포기 제 목숨처럼 여기며 생산해낸 쌀, 지금은 그것 내다 팔 자유조차 앗겨버린 쌀로 지은 밥일지라도 여러 종류의 밥이 있다네

가령 쌀이 남아도니 쌀 못 사겠다고 눈을 부릅뜨면서도 뒤로는 무공해쌀이라고 미제 칼로스쌀 몰래 사다가 최신식 외제솥에 수증기로 지어먹는 고관대작들의 유유자적한 밥은 빼고라도

한때는 일꾼들의 밥을 잘라 배 채우더니 이젠 이 나라 땅이란 땅이며 집이며 온통 집어 삼키고 그만 배에 비계살이 오르고 가슴에 숨이 차오르니 더는 견딜 수 없어 소위 자연식이니 건강식이니 한답시고 계약재배까지 한 쌀로 지어먹는 재벌들의 현미밥

혹은 비프스테이크네 뭣이네 양식 좋아하는, 이제 좀 산다 하는 자들이 사흘이면 한 번꼴로 외식 나가 그 양식에 귀찮게시리 꼭꼭 여벌로 따르는, 그러나 거기엔 손 한 번 안 대어 그만 쓰레기통으로 가는 접시밥이 있는가 하면

그러나 귀 떨어지도록 추운 날 막노동판에서 오돌오돌 떨다가 낮참 허드레 국밥집에 어수룩어수룩 달려가 버얼건 비곗국물에 꾹꾹 말아 소주 몇 잔에 비지땀 닦으며 먹는 늙은 품팔이꾼들의 국밥


혹은 이 나라 공장이란 공장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둥둥 비린 것 몇 점 뜨는 국물에 적셔 먹는, 그러나 그것조차도 몇 술이면 바닥나버리는 식판밥이나 늦은 저녁 불 꺼진 자취방에 돌아와 라면 국물에 말아 먹는 차디차게 식은 밥

혹은 이 땅의 여름이면 우리 농부들 들에서 뮛 빠지게 일하다 늙은 어머니가 낑낑 이어 내온, 그리하여 하늘도 구름도 윗논 아랫논의 이웃도 지나가는 건달패도 불러서 논두렁 둥그러니 둘러 앉아 먹는 고봉 들밥도 있고


또는 대학 안 나오면 아무것도 안 되는 이 나라에서 오로지 대학이 지상목표인 뭇 학생들 밥 열두시까지 죄수처럼 교실에 갇혀 수험공부 하느라 아침마다 반찬 투정하며 두 개씩이나 싸가는 도시락밥

또는 죄 많은 나라 죄 닦음 하느라 꽃 같은 장정들 전선에서 삼년씩이나 혈기 왕성한 청춘을 썩히며 질리게도 퍼먹는, 그 삼 년씩 묵힌 보유미로 지어 푸슬거리는 짬밥

더욱이는 그 밥 때문에 도둑질하거나 강도질하거나, 그 밥의 평등을 위해 민주니 통일이니 하는 이름으로 싸우다가 그만 철창에 갇혀 우는 이들이 먹는 그 나팔꽃씨도 섞이고 콩씨도 섞인 한도 설움도 많은 콩밥

더욱이는 그 해 오월 남도에서 꽃처럼 싸우다 두부처럼 잘려나간 넋들이 양동 혹은 대인시장 아줌마들이 꽁꽁 뭉쳐 건네준 밥, 그 눈물로 먹은, 함성으로 먹은, 피 젖은 피 젖은 주먹밥도 있고

또또 뭇 서민들이 먹는 정부미밥, 소년 소녀 가장이며 영세거택 보호자들이 달마다 동사무소에서 타다가 서럽게 서럽게 짓는 구호미밥도 있어 가지각색이니, 참으로 통탄스럽고 눈물나고 뜨겁고 배부른 것이 밥인데

그러나 정작 우리 농민들이 쌀 생산하며 꿈꾸는 밥은 눈빛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조선의 뭇 착한 사람들 곳곳의 일터에서 돌아와 지어미 지아비 둥개둥개 새끼 어르며 웃으며 김치 반찬 한 가지에라도 감사해하며 달게 달게 먹는 저녁 시간의 두레반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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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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