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사 안에 자리한 서산대사 사당인 수충사정용국
이제는 다시 평양으로 가서 고별만찬을 하고 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우리 대표단 각자는 한동안 머리 안이 서걱서걱하는 마찰음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생각을 비벼서 사는 사람들이니 만큼 얼마나 많은 날개들이 즐겁게 또는 슬프게 피어날 것인가. 이런 것들은 다 우리들에겐 새로운 것들이니 다 약으로 삼아 좋은 글을 쓸 일이다.
<웰컴 투 동막골>과 <어떤 나라> <천리마 축구단>
글을 마감하려는 오늘 나는 조선이 새롭게 인식되고 평가받으려는 자발적인 자기변화와 더불어 주변국들의 폭넓은 이해가 내려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어제 <경향신문>의 사설과 대니얼 고든 감독이 만든 <어떤 나라>와 <천리마 축구단>에 대한 영화평을 보면서 조금씩이나마 북이 신나는 세상으로 나서주기를 꿈꿨다. 비록 허구의 상상이 만들어낸 영화요 외국인이 찍은 다큐멘터리였지만 그곳에는 즐거운 비명이 있지 않은가?
먼저 경향신문의 사설 한 토막을 보자(2005년 8월 29일자).
"'웰컴 투 동막골'에는 같은 시기에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미와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화려한 트렌디풍 영화가 주는 감각적이거나 말초적 자극이 없다. 현실을 투사한 리얼리즘도, 통쾌무비한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미 '권력'으로 간주되는 대형 스타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같이 도저한 자본의 영화미학이 통하지 않는 장치들이다.
한데도 가장 비극적 현대사를 판타지한, 그래서 몽환적이거나 동화적일 수밖에 없는 '동막골'에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국전쟁을 할아버지의 전설쯤으로 아는 젊은 세대건, 한국전쟁이 여전히 살아 있는 상처이자 고통인 세대이건, 모두를 위무할 만큼 '동막골'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총은 작대기가 되고, 수류탄은 터져 팝콘비로 내리는 동막골에서 일방적 편가름이나 승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군도, 인민군도, 미군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한편이 되는 그 무(無)적(敵)의 마을은 물론 현실에서 부재하는 거짓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각박한 편가름과 소통의 단절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은 동막골의 세상을 꿈꾼다. '아이들처럼 막 살아라'라는 함의의 동막골에 들어가 잊어버린 순수를 희구한다."
이런 내용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들이 과연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맞는가 라는 의문이 절로 난다. 한 기자는 어제 동막골의 영화제작자와 관람객 500만명을 다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능청을 떨 정도니 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보안법에 대한 협박이고 결례인가 말이다. 차라리 이렇게 연명하느니 보안법은 자결하는 편이 체면을 살리는 길임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각설하고, 영국인 감독 대니얼 고든에게 조선의 실 상황을 찍게 허가한 북의 태도는 상당히 전향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한국어 제목이 '어떤 나라(A State of Mind)', '천리마 축구단(The Game of Their Lives)'이긴 하지만 원제를 보면 고든 감독도 북의 'Mind'와 'Lives'를 읽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렇게 조선은 슬금슬금 세상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 고든 감독의 노력이 4년 걸렸다지만 북이 자기네들도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계산이 그 밑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북이 검열을 안했을 리 없는데도 당연히 잘렸어야 할 필름의 일부분도 과감하게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하게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엄살도 내비치고 그렇지만 우리들의 이데올로기는 확실하다는 메시지도 보내는 것이다.
여행기가 엉뚱한 길로 나갔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이런 영화를 통하여 꿈꾸고 터지는 아름다움처럼 우리들의 각박한 현실이 그렇게 꽃피기를 한없이 바라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을 빌려다 구치한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앙큼한 영화나 고든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우리 시대의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불식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이에 힘입어 조선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우리가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찾아가는데 약이 되고 힘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청천강 금강다리를 점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