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식 화백의 '눈 내리는 백두산'정용국
필시 집에 이것을 들고 가면 비구상의 강한 색상이 주류를 이루는 그림을 그리는 아내의 꾸지람 들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었다. 이 그림은 신 이사장의 것보다 커서인지 처음에 120유로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팔짱을 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더니 최 화백은 바짝 다가오며 말했다
"작가 선생, 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듯이 이 그림도 값을 부르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이단 말입니다. 그러니 꼭 사갈 수 있는 가격을 말해 주시면 내가 알아서 드리도록 하갔으니 말씀을 해 보시란 말입니다."
나는 물건 흥정을 잘 하는 편은 못되는 사람임에도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박하게 값을 깎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결국 60유로에 나도 백두산을 살 수 있었다. 최 화백은 내가 신 이사장에게 그림을 팔 때 옆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특별히 싸게 주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흥정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 값을 깎고도 맘이 편치 않았던 것은 왜일까? 꽤 오랫동안 나는 맘이 짠했다.
저녁 식사 시간 때까지 자투리 시간을 보내는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들은 현관에 놓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술판을 벌인 황석영 선생과 고은 선생 일당들이었다. 역시 '황구라'라는 별명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소재는 '김하기 음주 침략 사건' 으로 아마도 절정에 이른 듯했다.
"그 때 내가 감옥에 있었는데 어느 날 교도관이 날 부르더니 김하기를 아느냐고 하더란 말이야 그래서 소설 쓰는 작가라고 대답했더니 아 글쎄 김하기가 압록강을 건너서 월북을 했다면서 내가 김하기를 북에 파견한 거 아니냐고 하는 거야 미치겠드만 그래서 난 얼떨결에 아무 상관도 없는데 김하기 때문에 면회정지 한 달 먹었대니까 아까 북쪽 사람들 하고도 이 사건을 얘기했는데 내가 김하기 월북사건 이랬더니 북쪽 사람들이 단순히 월북이 아니라 음주 침략이라구 해서 배꼽을 잡았어!"
문단에서 김하기 월북 사건은 참으로 전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완전한 만남'으로 인기가 있었던 김하기 소설가가 어느 날 갑자기 월북을 했다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뒤집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여러 가지 이설이 있고 또 이야기가 재구성되어 아직도 원고료를 받으러 갔느니 여자를 따라 갔느니 하는 지방판본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날 다행히 김하기는 내 옆자리에서 식사를 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은 많은 고초도 겪고 수많은 질문과 의심을 받았다고 전제하면서 만나는 이마다 이 사건을 질문해서 본인도 말하기 싫은데 하도 억측이 난무하니 그 진상을 밝히는 것이라 하면서 그 대강을 말해 주었다.
이글에서 들은 대로 다 적을 수는 없는 사정이고 그는 중국 쪽에서 술을 마신 후 정말로 만취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압록강 물을 헤엄 쳐서 건너 가다가 나중에는 거의 휩쓸려 떠내려갔는데 다행히 강 건너에 죽지 않고 도착했던 것이다. 다행히 보름 만에 아무 불순한 의도도 없고 본인의 강력한 귀환 의사에 따라 그는 중국으로 추방되는 형식을 거쳐 국내로 돌아왔다.
정말 그는 술 때문에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가 동아대학교의 운동권 출신이고 아주 진보적 견지에서 쓴 소설까지 있는 터라 의심은 더해지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북의 감옥에서 15개월을 보내고서야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 후로 김하기는 술을 끊었다고 하면서 건배를 해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시인 신형식은 횡성군이란 글씨가 박힌 모자를 쓰고 다녀서 시선을 끌었는데 알고 보니 방북을 앞두고 가진 작가회의 예비교육 시간에 북에 갈 때는 영어가 적힌 옷이나 모자를 쓰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리 집을 뒤져봐도 영어가 안 적힌 게 없어서 그 모자를 쓰고 왔다하여 한차례 웃었다. 그런데 그 옆의 아는 이가 그 모자는 검도선수인 아들이 쓰던 것이고 그 아들이 횡성군 대표로 대회에 나갔으니까 결국은 아들 자랑하려고 한 것이니 그 모자를 쓰면 일거양득 아니냐고 부연 설명을 붙여 주었다. 그래서 신 시인은 아예 횡성군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