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실 문의 노루발은 누가 달았을까

평양 북남작가대회 참가기(14) 사람아, 이사람들아

등록 2005.08.15 19:29수정 2005.08.16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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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붉은 빛이 감도는 비포장에 접어들었다. 유난히 붉은 색이 짙어서 길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이깔나무의 푸른 빛과 대비되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양쪽으로 얼마나 나무가 많은지 도저히 그 안을 들여다 보기 힘들 정도였고 삼림로가 이리저리 나 있어서 나무를 베거나 다른 볼일들을 하는 이들은 이 길을 이용하고 있었다. 트럭이 들어갈 정도로 구축된 삼림로엔 군인이나 작업자들이 여럿이서 다니고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곳이었음에도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계속해서 수첩에다가 무언가 기록하는 것을 본 조선작가동맹 소속 김승기 선생이 내게 무엇을 하려고 쓰느냐는 질문을 해 왔다. 내가 서울에 가서 여행 소감을 인터넷 신문에 게재하려고 한다 했더니 김 선생은 이것저것 인터넷에 관하여 질문을 했다. 그 신문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이며, 독자는 얼마나 되는지, 그 사업으로 벌이는 되는지, 상당히 많은 질문을 하는데 그 요지를 보건대 아직 김 선생은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장단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단추 하나를 눌러서 세계와 연결되는 한국의 인터넷 상황은 가히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는 사실을 독일에 가서 실감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초고속 인터넷 망으로 무장하고 있을 당시였는데 선진국의 선두 조에 속한 독일의 프랑크프르트에는 전화 모뎀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선의 갈등은 여기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컴퓨터가 상당수 들어와 있어서 큰 식당에도 계산대에는 개인용 컴퓨터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연결은 급속한 개방을 뜻한다. 컴퓨터라는 이기를 통하여 개인정보나 세상의 소식이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면 지금 조선에 있어서의 신문이나 방송의 상항만 보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의 지도자들도 경제를 위한 개방과 내부 결속을 위한 폐쇄의 두 고민거리에서 항상 망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한 개방 없이는 경제를 살릴 수 없으니 어쩔 것인가. 중국이나 소련의 체재가 급속한 변혁을 헤치고 나가고 있는 모습을 김정일 위원장은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밀영 고향집 앞에 선 조선작가동맹 참가자들. 왼쪽으로부터 남대현, 리호근, 김병훈, 오영재, 박경심, 박세옥, 홍석중 선생.
밀영 고향집 앞에 선 조선작가동맹 참가자들. 왼쪽으로부터 남대현, 리호근, 김병훈, 오영재, 박경심, 박세옥, 홍석중 선생.정용국
창규형의 개인기 발휘로 백두산 밀영까지의 여정은 가뿐했다. 소낙비도 적당히 그쳐주어서 대표단은 김일성 주석이 무장 항일 투쟁시 근거지로 삼았다는 대원실과 사령관실 그리고 정일봉 밑에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를 둘러 보았다.

특히 생가 뒤의 봉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우뚝 솟아 있어 모습이 웅장했는데 그 봉우리에 거대한 바위에 정일봉이라는 이름을 새겨서 넣었는데 여성 안내원은 그 돌의 무게가 몇 백 톤 되며 한 글자의 획 깊이가 일 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김일성 주석이 지은 한시를 설명하고 있는 밀영의 여성 안내원
김일성 주석이 지은 한시를 설명하고 있는 밀영의 여성 안내원정용국
재미있는 것은 김일성 주석이 썼다는 칠어율의 한시와 그 해석을 큰 바위에 새겨서 세워두었는데 그 돌의 무게가 김정일 위원장 생일인 2월 16일과 같은 216톤이라고 했다. 아무튼 조선의 유적지에는 생일과 나이 등의 숫자를 돌의 무게에 맞추어 제작한 경우가 많아서 듣고 나면 너무 작위적이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오곤 했다.

백두산 밀영 고향집 뒤에 있는 정일봉
백두산 밀영 고향집 뒤에 있는 정일봉정용국
밀영 유적지는 조선이 상당히 중요시하는 곳으로 여겨졌는데 조선의 건국자인 김일성 주석의 항일 근거지이고 더구나 김정일 위원장의 생가가 있는 곳이니 김 부자와 생모까지 아울러 여러 모로 국가의 탄생 배경을 말해줄 수 있는 실질적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밀영 유적지 대원실 내부 모습
밀영 유적지 대원실 내부 모습정용국
유적지에는 세 채의 단출한 통나무집이 있는데 사령관실, 대원실, 생가가 그것이었다. 규모로 보아서는 소규모 유격대가 머물렀을 정도이며 일제시대에 제작된 지도와 살림살이, 총기류, 이부자리 등 명성에 비해 실제로는 몇 점 되지 않는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성 안내원은 샘물터에 우리를 세운 다음 수질이 좋은 물이어서 한 모금 마시면 십 년씩 젊어진다는 설명을 하자 너도나도 다 한 모금씩 약수를 마셨다. 옆으로 흐르는 냇물은 소백산수인데 건수가 아니라 지하에서 샘솟는 물이어서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했는데 물의 양이 상당했다.

유적지 안내원들은 우리 대표단에게는 아마 조심해서 별도의 설명을 준비하고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였지만 그 말투나 설명에 있어서 감정이 풍부하고 작은 예 하나만 가지고도 김부자의 사랑과 세심함을 도출해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밀영에 있는 대원실 문고리는 노루발을 달아 놓았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대원실 문에 손잡이로 달아 놓은 노루발.
대원실 문에 손잡이로 달아 놓은 노루발.정용국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문고리가 쇠로 되어 있어서 대원들이 추운 날에 문을 열 때마다 고리가 손에 붙어서 고생하는 것을 보시고 노루의 발을 달아 주시었습니다. 노루발은 털이 있어서 추운 날에도 손이 달라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루발에서는 일종의 향과 함께 독을 제거해 주는 성분이 나와 대원들의 손을 깨끗하게 해 주는데 이러한 작은 일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무한하신 부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안내원은 거의 여성들이었는데 그녀들의 입에서는 몇 번씩의 같은 수식어가 반복되어 나온다. 김일성 주석의 이름 앞앞에는 ‘위대한 수령’ 김정일 위원장 이름 앞에는 ‘경애하는 지도자’가 빠짐없이 붙어 있고 객관적 서술이나 설명을 하는 신문이나 방송의 내용도 문구 안에서 조차 극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이곳에서 한일무장투쟁을 전개할 당시 이곳은 춥고 여름이 짧아서 거의 주식을 귀리나 옥수수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당시의 어려움에 대해서 설명하는 말을 들었다.

사실 우리들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시기에는 모든 언론과 방송까지도 김일성 주석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하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김일성 주석의 무장 항일 투쟁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한국에서 교육받거나 알아들을 만한 지식을 공급받지 못했다. 그 지식의 일부는 비공식적이고 전설 같은 말을 바람처럼 전해 들었을 뿐 국정 또는 검인정 교과서를 통해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지금 조선과 한국 안에는 엄연히 헌법과 각종 법률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실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울지도 웃지도 못할 판이 아닌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현행법을 무시하고 또는 범죄행위를 하고 있는 꼴이 되고 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평론가들과 시인들은 고려호텔 서점에서 많게는 몇 십 권씩 책을 사가지고 왔다.

이를 고려해서 작가회의 측에서 출판물이나 각종 인쇄물에 대하여 단체로 통일부에 신고서를 쓰게 하였지만 이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에 지나지 않았다. 입국장에서 몇 명은 책과 테이프나 신문류 등을 압류당하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연구 목적의 이유를 들어 돌려받았다고 했다. 이미 나의 가방 속이나 디지털 카메라 칩과 캠코더 안에는 노동신문과 평양시민과의 대화와 많은 정보가 반출되었으니 국가는 나를 어찌할꼬? 국정원은 내 머리를 압류할 것인가?

우리가 베개봉 호텔에 도착하여 1진과 합류하였을 때에는 이미 거의 저녁 때가 다 되었다. 마치 알프스의 산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드는 아담한 이 호텔은 고급스럽지는 않은 중급의 숙소였다.

고려 호텔과는 달리 여러 가지 비품이나 시설물에 있어 차이가 많이 났으며 낮에는 한 때 전기가 나가서 화장실 사용이 곤란하기도 하였다. 날씨가 춥기 때문인지 방에 에어컨이 없었지만 창을 열어 놓으니 덥지는 않았고 밤에는 창문을 꼭 닫고 잘 정도였다.

베개봉 호텔에서는 또 다른 한 군의 한국 사람들과 조우하게 되어서 깜짝 놀랐다. 거의 중국 국경을 통해서 백두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고 조선을 통해서는 불가능 한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외에도 꽤나 많은 인원들이 이 코스로 백두산을 다녀간 것이다.

그 일행들은 연세대와 서원대의 역사문화 국제학술 대회에 온 교수들이었다. 인원도 거의 30명 되는 것으로 보였고 그들은 이제 평양으로 간다는 것이니 우리가 타고 온 그 프로펠러 여객기로 갈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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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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