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관에서 바라본 스키장과 뾰족지붕, 도로가 잘 정비된 삼지연읍 전경.정용국
어색한 대기념비 관람을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본격적인 정신 교육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백두관'이 바로 그곳이었다. 조선은 외국인이나 자국 인민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주체사상을 고양할 시설이나 전시관 등을 마련하여 두었다.
백두관은 지정학적으로 주체사상을 교육하기에 좋은 곳이 아닐 수 없다. 밀영의 유적지가 지척이고 겨울에는 스키장이 있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며 베개봉 호텔까지 갖추고 있으니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지연읍은 변방에 자리한 소읍치고는 주택 개량이 잘 되어 있었으니 마치 스위스풍의 뾰족 지붕에 빨강, 파랑 등 원색을 칠한 지붕들이 줄지어 나란히 큰길 옆으로 늘어서 있다. 스키장을 이곳에 설치한 것과 도로를 잘 만들어 놓은 이유도 모두 항일 유적지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들이라고 보여진다.
삼지연읍, 북한의 스위스?
백두관은 그동안 우리가 보고 들은 어느 전시장보다도 주체사상을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선전하는 곳이었다. 최신 컴퓨터 영상을 통하여 주체사상의 배경과 진로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육하고 있었다.
우리가 조별로 관람하고 영상자료를 보는 시간에 줄지어 다른 소조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거나 우리와 비껴가며 영상자료를 보았다. 대부분 단체복을 입은 학생들이거나 군인들로 보였다.
그러나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니 조선에서는 대학생들도 단체 활동시나 교육에 참가할 때는 군복과 비슷한 복장을 입는다고 말해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밤색의 복장이었지만 휘장이나 계급장 모자 등의 모양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서 우리들이 그것을 구분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1층에서 영상자료와 모형들을 보고 2층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이미 전산화하여 입력 시켜둔 김일성 주석의 음성을 주제별로 듣거나 출력할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가 여럿 놓여 있어서 김일성 주석의 육성으로 교시나 회의 주재 장면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안내원의 들뜬 목소리와 열성에 우리 일행들이 부응하지 못하고 창 너머로 보이는 스키장과 형형색색의 뾰족 지붕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에만 분주하자 안내원 동무는 난감해 했다. 그리고는 얼른 출입문을 가리키며 날씨가 더우니 밖으로 나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자며 말머리를 돌렸다.
마석의 모란공원을 아십니까?
차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의 오영재 시인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대화 중에 오 시인이 나에게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나는 오 시인이 전남 강진이 고향인데 우여곡절 끝에 이곳에 오게 된 것을 아는 터라 남쪽의 지명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경기도 남양주시에 산다고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그럼 마석 모란공원을 아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남양주시의 와부읍에서 모란공원은 아주 가까운 거리이며 또한 모란공원은 민주 열사들이 많이 묻혀 있는 공원 묘원이었다. 늘봄 문익환, 전태일, 박종철 등의 유해가 이곳에 있어서 6·15 공동선언 5주기 기념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란공원을 어찌 아시느냐고 반문하자 오 시인은 당신의 부모님 묘소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서울에는 형제들이 살고 있어서 묘소를 돌보고 있다는 말로 보아 공식 경로는 아니라도 형제들의 소식을 멀리서나마 전해들은 것 같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며칠 전에는 화상 상봉을 통해서 구순의 노모가 이미 뇌졸중으로 말 한 마디 못하는 장면을 북에서 보고 통곡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어찌 이산가족의 아픔을 말로 다 표현하고 글로 다 쓸 수 있겠는가. 남과 북에서 천만 명에 이르는 가족들이 60년을 보지 못하고 인생의 길이 어긋난 채 살아가는 현실은 세계에 뉴스가 아닐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도 노모의 묘소도 알고 형제가 어디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아는 오 시인은 다행이 아닐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대체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동안 이미 노환으로 세상을 뜨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부디 통일이 빨리 되어서 오 선생님이 마석에 오시면 모란공원엘 모시고 가겠노라는 허무한 대답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라는 뼈아픈 현실 때문에 그동안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을 막론하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며 살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자. 한 핏줄끼리 전쟁을 한 것은 물론이요, 각종 군사적 충돌과 테러, 이를 악용한 정권들에 의해 피폐화되었던 개인들의 정신 공황은 또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그렇다. 이젠 이만큼 했으면 그만 할 때도 되었다. 그만큼 울고 겪었으면 충분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지금부터는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점들을 인정하고 그 기틀 위에 새로운 대결과 협력을 통한 평화를 모색하고 함께 사는 슬기로운 길을 걸어 나가야 한다.
대표단 일행이 지루한 교육 여정을 마치고 베개봉 호텔로 돌아 왔으나 안개로 늦어진 비행기는 1진을 태우고 평양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정이 이렇게 되면 사실 오늘밤 묘향산에서 갖게 되어 있는 남과 북 문인들의 문학의 밤 행사는 불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늘 개인적인 대화와 접촉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남한의 작가들은 아쉬운 일정을 놓치고 만 셈이었다.
단체가 움직이고 안내를 받고 설명을 듣는 것은 일정한 선이 있고 '공식적'이라는 한계가 늘 붙어 다니게 마련이어서 막상 사사롭고 궁금한 실상을 묻거나 대답을 통하여 추측해 보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학의 밤 같은 행사는 얼마나 느슨하고 개인 접촉이 좋은 자리인가. 더군다나 술이라도 한 순배 돌려지면 한결 애틋하고 솔직한 말들을 서로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북조선에서도 한글 이름 많이 씁니다"